17화
그녀의 향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왜 막 안겨?”
야.
다연이 눈을 크게 뜨고 자혁을 올려보았다. 겁에 잔뜩 질린 눈에 원망? 아니 이건 욕하는 거 같았다. 더 놀렸다간 또 울겠네.
아는 척해주지 않아서인지 메리가 두 다리를 들며 뛰어 다연의 허벅지에 발자국을 찍었다.
“아니야.”
다연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혁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기요, 구자혁 씨.”
“다시 내려줘?”
그러기에는 메리가 너무 격하게 달려들었다. 다연은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게까지만요.”
눈을 꼭 감는 다연을 보며 자혁이 낮게 웃었다.
메리의 발자국 테러를 견디며 앞으로 자혁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연을 가게 안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색시 물어갈까 봐, 겁내기는.”
문 앞에 있던 퇴촌댁이 놀리듯 하는 말에 다연의 얼굴이 자혁에게 안겨 있을 때만큼이나 붉어졌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혁이 계속 다연을 살피는 것을 보고 퇴촌댁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구 사장, 뭐 잘못했어?”
“네?”
“구사장은 색시 눈치 보고, 색시는 눈이 부은 거 보니 운 거 같고. 쯧쯧쯧. 사내들이란 하여튼. 여자 울리지 말아. 못써.”
퇴촌댁은 혀를 차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품에서 떨 때는 언제고 다연이 자혁을 보며 의기양양해졌다.
“사장님 말씀 들었죠? 못쓴다잖아요.”
“내가 연필은 아니잖아.”
설마, 지금 유머라고 한 거야?
다연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유머 센스 좋아졌다는 말 취소할래요. 어디서 그런 이상한걸.”
“구글이.”
툭.
걔는 참 별걸 다 알려준다.
“다른 것도 몇 개 더 있는데.”
“하지 마요.”
정색하는 다연을 보며 자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이 헤퍼져서 큰일이다.
퇴촌댁이 음식을 내오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더 이상할 뻔했다.
반찬을 다 놔주고 퇴촌댁은 놀리듯 또 한마디 했다.
“색시, 이상한 게 뭐냐면 말이야. 여자는 꼭 자기를 울린 사내한테 안겨서 울더라고.”
“네?”
“품에 한 번 안고 싶어서 울리는 건지 한번 잘 생각해봐.”
다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로 향했다.
“맹세하는데.”
자혁은 오른손을 들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런 비열한 짓은 내 취향 아니야.”
안고 싶은 사람은 다연이 아니라 미미겠지. 굳이 다연을 안아보겠다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다연은 다시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린 채 식사했다.
여기로 오는 내내 다연의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갑자기 어두워졌다. 자혁의 시선이 다연의 숙인 얼굴에 고정되었다.
“색시 어디 안 가. 밥 먹어.”
퇴촌댁의 말에도 자혁은 살펴보느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집에 갈 때도 메리가 달려왔으면 좋겠다. 그럼 울리지 않아도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길 테니까.
* * *
식혜를 마시며 다연은 능소화가 드문드문 피어 있는 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초록 잎 사이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주황색 꽃을 바라보았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덕분에요.”
자혁은 창밖을 무감하게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3주 뒤에 다시 오자.”
“네?”
자혁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때쯤이면 꽃이 가득 필 거야. 볼 만해.”
다연은 그제야 그가 왜 다시 오자고 했는지 이해했다. 능소화가 가득 피면 그의 말대로 볼 만한 정도가 아주 예쁠 것이다.
“당신은 예쁜 꽃 봐.”
다연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구자혁 씨는 뭘 할건데요?”
“지금처럼 당신 보고 있으면 되지.”
누가 들으면 다정한 연인이 하는 말로 착각했을 것이다. 친절하게도 그는 다연이 착각하지 않도록 무섭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예쁜 꽃 놔두고…… 왜 저를 봐요?”
“각자 눈에 예쁜 거 보면 되는 거 아닌가?”
다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거짓말.”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당신한테 거짓말을 한 적 없어.”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다연은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던 식혜를 손에 들었다. 하지만 이어서 들리는 그의 말 때문에 다연은 식혜를 마실 수 없었다.
“당신은 예쁜 꽃 봐, 나는 당신 볼 테니까.”
그는 거짓말을 진담처럼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 같았다. 아니면 연기를 아주 뛰어나게 하는 사람이거나.
* * *
눈물 뚝뚝 흘리다 간 여자는 소식이 없는데 눈물 없이 울다간 남자는 불쑥 또 나타났다.
예약된 날짜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마디 했더니 제날짜에 상담실에 온 자혁을 보며 정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컨디션이 지난번보다 나아 보였다.
“오늘은 좋아 보이네.”
“그럭저럭.”
정신은 자혁에게 집중해 보려 했다.
“이번에는 다른 경우인 거 같아서 걱정했어. 상대방의 감정이 보이다 안 보이면 더 혼란스러울 테니까.”
“걱정됐다면서 전화 한 통이 없던데. 지금도 나 말고 다른 사람 걱정하는 거 같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혁은 상담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신의 모든 것을 분석해보았다.
“내 걱정했다면서 손으로 만지고 있는 건 다른 사람 상담 기록지잖아. 목소리 톤도 가라앉은 게 평소와 달라.”
“하산해라.”
오랜 기간 자혁이 해왔던 훈련 때문에 환자에게 속마음을 들킬 줄 몰랐다.
“지난번에 울었다는 그 여자?”
“노코멘트.”
정신은 다연의 기록지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내랑 지내는 건 어때?”
“그 사람이 쓰는 언어, 그때의 상황을 분석해봤어.”
자혁은 그동안 그런 데이터를 모아 분석한 뒤 상대방의 감정을 유추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왔었다.
오랫동안 해온 훈련이라 정확도가 높았다. 상대방이 자혁을 속이기 위해 작정하고 연기를 하지 않는 한.
“숨기고 싶은 게 있었나 봐.”
“자연스러운 거야. 너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만큼 친해진 건 아니잖아.”
“숨바꼭질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감정을 유추하는 것을 놀이라고 생각하자고 했었다.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찾아볼까 해.”
자혁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였다.
“숨기는 게 뭔지 알아야겠어.”
* * *
따뜻해진 날씨를 믿고 얇은 옷을 입었던 게 문제였는지 온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다연은 장 여사가 출근할 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사모님, 어디 불편하세요?”
“몸살인가 봐요.”
장 여사는 다연에게 다가와 얼굴을 보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 보려 했다. 다연이 놀라서 얼른 피하자 장 여사가 당황했다.
“땀 때문에 끈적여서요.”
다연의 어색한 변명에 다행히 장 여사의 얼굴이 금세 풀렸다.
“부끄러움도 많으셔.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되니까, 죽 끓여드릴게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제 일인 걸요.”
장 여사가 방을 나가자 다연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처럼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가장 조심해야 했다. 이럴 때는 닿은 곳만 발진이 올라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퍼져서 약을 먹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아 응급실을 가야 했다.
다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어가 방문을 잠갔다.
혹시나 다연이 잠든 사이 장 여사가 들어와 걱정된 마음에 이마라도 짚으면 안 될 일이었다.
오늘 상담이 있는 날인데 아무래도 못 갈 거 같았다. 졸음이 쏟아져 자꾸 눈이 감겼다.
다연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 * *
집에서 연락이 왔다는 비서 실장의 말에 사인하던 자혁의 손이 멈추었다.
“집?”
처음 있는 일이라 말하는 이 실장도 듣고 있는 자혁도 서로 어색했다.
“장 여사님이 연락하셨습니다.”
다연은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연락을 했었다.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동안 장 여사가 회사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할 일이 없었던 통에 누구인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 사모님이 열이 난 거 같았는데 지금 방문을 잠그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졌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다연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었다.
“오늘 일정 어떻게 됩니까?”
“네? 네.”
이 실장이 태블릿을 보는 동안 자혁은 사인을 마치고 펜을 탁 소리가 나게 놓았다.
“전부 취소하세요.”
이 실장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자혁은 재킷을 든 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 * *
집에 들어서자 장 여사가 다연의 방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장 여사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자혁은 목소리와 행동으로 유추했다.
“아침에 열이 나는 거 같아서 이마를 만져보려고 했는데 사모님이 땀 때문에 끈적인다고 피하셔서 체크를 안 했더니, 죄송합니다.”
“제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보세요.”
“사장님…….”
“괜찮습니다.”
장 여사는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조금 풀어진 자혁의 얼굴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죽 끓여뒀습니다.”
“일어나면 챙기겠습니다.”
장 여사가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자혁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두었다.
“미미야, 나왔어.”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1층 마스터룸 잠금 풀어줘.”
[잠금 해제를 위한 2단계 인증을 해주세요.]
“부탁이야.”
[확인되었습니다. 잠금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다연의 방문이 열렸다. 자혁은 장 여사가 들고 가려고 했던 물수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가까이 가 보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다연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렸다.
얼굴은 창백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혁의 큰 손이 다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나는 거 같은데 자혁의 손이 더 뜨거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체온계라도 사 오는 건데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자혁은 휴대폰을 들어 가장 친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더니 자혁이 이제껏 들어봤던 정신의 목소리 중 가장 짜증 내는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왜?]
늘 평온한 말투였던 정신이 요즘은 계속 짜증을 내는 거 같았다.
“요즘 들어 짜증 자주 내는 거 같아. 환자한테 이래도 돼?”
[왜 전화했는데?]
조금 전의 외마디 질문에서 조금 친절하게 바뀌었어도 목소리에서 짜증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난번 어떤 여자가 울었다고 말한 뒤부터 정신의 짜증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때 그 여자가 아직도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