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76)
  • 16화

    마석건설 정도는 초대장을 받을 수 없는 소위 상위 레벨 기업들만의 자선 행사였다.

    주연은 초대받지 못한 행사라 자존심이 상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기다렸다.

    오늘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초대받은 사람이 주 여사였다.

    “정말 데리고 왔어? 사람 맞아?”

    “말도 마. 그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모두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젊은 부류는 집안에서 한 번쯤 선을 청해 보았거나 나이 든 부류는 딸자식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했던 기업이라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소문대로 사람이 아니거나 데리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흉한 모습이길 바랐다.

    “그림같이 예쁘더라.”

    모두가 실망한 눈빛이었다.

    “그 여자도 그냥 그림 아니야? 구 사장도 그냥 조각품이라는 소문이 아직도 파다했잖아. 감정도 뭣도 없어서 남자구실 못 하는 그냥 조각품.”

    모두가 까르르 웃어도 주연은 웃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남자구실 하는지 아닌지까지는 부부만 알 거고. 위장 결혼이니 말 많았는데 행사에 제 와이프 데리고 나와 인사시키는 걸 보니 가짜는 아닌 거 같더라고.”

    “연기일 수도 있잖아.”

    주 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우리 집 양반 때문에 눈맞은 것들 눈빛만 봐도 아는 귀신이 됐잖아.”

    자기 입으로 하는 말인데도 아무도 주 여사에게 동조해 주지 않았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나중에 돌아올 후환이 두려워서였다.

    “눈 맞은 남자, 여자. 딱 그 눈빛이었어.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따로 봐도 그림인 것들이 같이 팔짱 끼고 돌아다니는데 진짜 예술품이 따로 없더라고.”

    주 여사는 목이 타는지 커피를 한 번에 쭉 빨아 마셨다.

    “주 여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하네요. 나중에 사진 돌면 꼭 봐야겠어요. 흠이 있다고 소문 자자한 잘난 남자 꿰찬 여자가 누구인지 말이에요.”

    주연이 칭찬하는 듯 깎아내렸다.

    미모와 젊음을 내세워 지금 이 모임에서 탑이라고 주연을 칭찬하던 주 여사가 그림같이 예쁘다고 한 여자가 궁금했다.

    “내 정신 좀 봐. 안 그래도 내가 자기들 보여 주려고 몰래 사진 찍어 왔잖아. 저기 김 실장, 내 휴대폰 좀.”

    김 실장이 건네주는 휴대폰을 들고 주 여사는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머, 진짜 그림이네. 이 허리 봐. 한 줌이네. 한 줌.”

    주 여사가 보여 준 사진은 자혁의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기다려봐. 내가 그 와이프만 가까이서 따로 찍은 게 있어.”

    주 여사는 휴대폰 화면을 검지로 옆으로 쓱 밀더니 다시 앞으로 죽 내밀었다.

    “청초하네. 주 여사 말대로 그림처럼 예쁘네.”

    “사진을 보니 이해가 되네. 왜 그동안 꼭꼭 숨겨 두고 안 보여줬는지 말이야.”

    “너무 흉해서 숨겨 둔 게 아니라 너무 예뻐서 숨겨 뒀다는 소문이 맞았어.”

    모두가 사진을 보며 놀라워했다. 주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연은 주 여사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 여사님, 저 사진 좀 자세히 보면 안 돼요?”

    “안 되긴, 자.”

    주 여사는 아무런 경계 없이 주연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주연은 주 여사가 찍은 사진을 넘겨보며 유심히 보았다.

    홀터넥 드레스에 목에 있는 점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사진 속 여자는 다연이 확실했다. 그리고 자혁과 손을 꼭 잡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기 좋지? 행사 내내 둘이 손 꼭 잡고 다니는 데 얼마나 보기 좋았는데.”

    “그러네요.”

    주연이 아는 한다연은 다른 사람과 스킨십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주연의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 * *

    정신은 오랜만에 은사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시차를 확인하고 전화를 건 정신은 다연의 상담 기록지를 책상 위에 던지듯 툭 올려두었다.

    “진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저 제정신입니다.”

    [오랜만이구먼, 한국은 여전한가?]

    여유로운 은사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내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내 환자 중에 말썽부리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보구만?]

    정신은 마음을 들킨 거 같아 실없이 웃었다.

    “혹시, 한다연 씨라고 기억하십니까?”

    진 교수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다연 양이 혹시 병원에 왔던가?]

    “네.”

    정신은 다연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하고 조언을 구했다.

    “남편과 함께 두는 것이 좋은지 분리가 나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자네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이번 상담 때는 많이 울었습니다. 병원에 오기 전부터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왔었거든요.”

    [다연 양이 울어?]

    진 교수는 믿어지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네. 울었습니다.”

    [거참, 신기한 일이구먼.]

    “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남편 옆에서 많이 울게 그냥 둬.]

    아내 앞에서 버젓이 사랑하는 여자와 통화도 하고 여자를 울리는 남자인데도요?

    [좀 울어야 해. 의학적 내 소견은 그거일세.]

    전화기를 내려놓고 정신은 통화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정신은 예전 진 교수가 강의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학적으로 눈물은 진정 작용이 있습니다.’

    * * *

    친엄마가 돌아가셨던 열여섯 살 이후부터 다연은 오랫동안 울지 못했었다.

    정리되지 않고 요동치던 마음이 울고 나니 차분히 진정되는 것만 같았다.

    자혁과 서류상 결혼이 끝나면 다연은 스페인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곳도 자신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떠돌고 있는 곳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어디에도 다연의 자리는 없었다.

    지난번 한국에서 혼자 첫 외출을 하던 날 자혁이 무심히 했던 말에 혼자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거 같았다.

    ‘잘 다녀와.’

    그는 아마 심부름 보낸 직원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표정 없는 얼굴로 무심히 툭.

    다연은 마당에 서서 음악을 틀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서서히 춤을 추었다.

    퇴근하던 장 여사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사모님, 그러다 탈진하겠어요. 물도 마셔주면서 추세요.”

    “감사합니다.”

    “춤 같은 거 모르는 무식쟁이가 봐도 우리 사모님 춤에 한이 많네요. 구슬퍼요.”

    다연이 환하게 웃었다.

    “한이 많은 음악 맞아요. 정확하게 보셨는데요.”

    “다음에는 한 많은 음악 말고 사랑 노래로 춤추세요. 사랑스럽게요.”

    장 여사는 다연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곤 퇴근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인지 다연은 배가 고팠다.

    지난번 자혁이 데리고 갔던 산채 정식을 먹고 싶어 검색해보아도 상호가 나오지 않았다.

    다연은 오늘 꼭 산채 정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검색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연락하는 게 정말 싫었지만, 마지막 남은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지난번 갔던 산채 정식집 주소 좀 알려주세요.]

    다연은 휴대폰에 메시지를 다 쓰고도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곳이 아니어도 식사는 할 수 있었지만, 다연은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다연은 눈 딱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고민했던 것과 달리 답장은 빨리 왔다.

    [10분 뒤 집 앞으로 나와.]

    주소를 가르쳐 달라니까 왜 나오래! 무슨 뜻인지 몰라? 다연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며 메시지를 섰다.

    [주소만 알려줘요.]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연은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금방 답장이 왔다.

    [나와.]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었다. ‘구자혁=오만함’이었다는 것을.

    다연은 투덜거리며 10분이 지나서 집 앞으로 나갔다.

    자혁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차에 기대어 있었다. 다연이 나오자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주소만 알려주면…….”

    “타.”

    자혁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 다연은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다연이 차에 부딪치지 않도록 자혁이 손으로 막아주었다.

    미미한테만 다정하지 왜 자신에게까지 이토록 쓸데없이 다정한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자혁은 다연이 있는 쪽은 보지 않고 앞만 보았다.

    “벨트 매.”

    툭.

    행동뿐만 아니라 말도 다정하게 해주지. 한결같이 툭 던지는 말이 똑같아 서운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우는 여자 질색이라면 내치지 않아서 말이다.

    내비게이션 검색을 하면 주소를 알아두려고 했는데 자혁은 아는 길인지 그냥 출발했다.

    지난번에 활짝 피웠던 꽃이 지고 파릇한 새잎이 돋아 있었다.

    다연은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에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는 남자만 빼면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다연은 창문을 닫고 자혁에게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왜 그랬는지 안 물어봐요?”

    “여자가 우는 건 물어보는 거 아니래.”

    “누가…… 그래요?”

    심각한 표정의 남자가 누군가에게 이런 것을 물어봤을 거로 생각하자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아는 형이.”

    다연은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말아서 깨물었다.

    자혁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를 무심하게 몇 번 쓰다듬었다.

    “미안.”

    툭.

    “사과는 왜 하는 건데요?”

    “무조건 사과하래.”

    “그것도 아는 형이 알려줬어요?”

    “아니.”

    아는 형에게 물어본 것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누구에게서 나온 말일지 기대되었다.

    “있어…… 아는 거 많은 친구.”

    다연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저 큰 덩치의 남자가 쩔쩔매며 알아봤을 걸 생각하니 미웠던 마음이 스르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혁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지난번 개가 또 있을까 봐 다연은 주변을 살피며 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메리 없어.”

    나도 알거든요.

    자혁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자혁의 모든 것이 대부분 거대했다. 큰 키도, 커다란 손도. 심지어 심장 소리마저.

    “왜…… 막 안아요?”

    “메리 올까 봐.”

    자혁의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메리는 후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뛰어난 개였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것인지 오늘도 하얀 꼬리를 흔들며 다연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엄마야.”

    자혁이 당겨 안지 않아도 다연이 자혁의 허리를 잡고 꼭 안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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