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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76)
  • 15화

    “난 연기 아니었는데.”

    심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숨 쉬어.”

    무심하게 말하며 그는 다연을 에스코트했다.

    대략 인사를 마치고 나서야 자혁은 다연을 데리고 오랜 친구가 있는 테이블 근처로 올 수 있었다.

    “대충 인사 다 했어. 이제 편하게 있어도 돼.”

    자혁은 음료가 든 잔을 다연의 손에 쥐여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뭐 좀 먹어야 하지 않아?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알아서 먹을게요.”

    다연의 큰 눈이 주변을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구자혁, 나 있는 거 안 보이냐? 소개해주는 거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아직, 더 기다려. 이 사람이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자혁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친구의 얼굴이 못 볼 것을 본 얼굴이었다.

    “어우, 적응 안 돼. 넌 됐고. 제수씨, 반가워요. 이 자식 친구 이경수입니다.”

    그의 친구답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연이 고민하는 사이 자혁이 친구의 손을 툭 하고 쳤다.

    “손잡는 거 안 돼. 그냥 인사만 해.”

    아내의 손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은 자혁의 도 넘는 행동에 그의 친구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 자식도 미친놈이었어. 결혼하면 애들이 왜 다 이상해지냐, 왜?”

    경수의 설레발에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았다. 다연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구자혁 씨 아내입니다.”

    * * *

    그의 팔짱을 끼고 함께 인사를 하니 정말 그의 아내가 된 거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힐 거 같으면 자혁은 품에 끌어당겨서 보호해주었다.

    다연이 조금이라도 곤란해하면 먼저 나서서 대답해 주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 틈에 있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경수라는 그의 친구를 만나 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다연은 그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조금 더 편안해지는 모습이었다.

    경수가 자혁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미미는 잘 있어?”

    “그럼, 잘 있지.”

    그다음부터 다연은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 속에 낄 수 없었다.

    미미의 존재를 아는 사람에게 구자혁 씨 아내라고 인사했다는 사실만으로 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니 감정이 메말랐다. 자신을 보며 옅게 웃는 그에게 다연은 더는 웃어 줄 수 없었다.

    * * *

    자선행사의 분위기는 좋았다. 어느 순간 다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좋았던 분위기가 바뀌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경수와 인사를 나눴을 때만 해도 다연은 잘 웃었다.

    다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은 경수와 개발 중인 AI 이야기를 하고 난 뒤였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혁의 옆에 잘 있었지만, 이상하게 빈 껍데기만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지 낀 작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고생했어.”

    “구자혁 씨도요.”

    다연의 말투가 달라졌다.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졌다.

    자혁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다연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자혁이 다연의 손목을 잡았다.

    “한다연.”

    꽉 잡지 않으면 빠져나갈 거 같은 다연의 작은 손을 그는 힘을 주어 잡았다.

    “아파요.”

    자혁은 손을 놔주는 대신 다른 한 손도 잡아서 다연의 정면에 섰다.

    똑바로 눈을 잘 맞추던 다연이 계속 시선을 피했다. 다연의 표정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 속이 울렁였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하나도 보이지 않아 울렁거렸다.

    “왜 이래요.”

    “피하지 말고 내 눈 좀 봐.”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 듣고 있으니까.”

    자꾸 피하니까 오기가 생겼다. 자혁은 다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리면 똑같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그렇게 피하기만 하는 게 답답해서 손을 들어 다연의 얼굴을 양손을 감싸서 똑바로 바라보았다.

    볼은 잡은 양손에 축축한 물기가 만져졌다.

    한다연이 울고 있었다.

    “한다연.”

    “나 좀 제발…… 가만히 둬요. 혼자 있고 싶어요.”

    자혁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다연을 잡을 수 없었다.

    다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울고 있는 줄 몰랐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답답했다. 자혁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미미야, 나왔어.”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미미야.”

    [네.]

    “미미야.”

    [네, 말씀하세요. 저 여기 있어요.]

    “여자가 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해?”

    [검색에서 찾은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게 아니야, 미미야. 지금 한다연이 울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 *

    눈이 퉁퉁 부은 다연을 바라보는 정신은 심란한 마음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울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한마디 던지면 저 큰 눈에서 눈물이 막 쏟아질 거 같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여기 말고 산책을 좀 해볼까요?”

    “네.”

    정신은 의사 가운을 벗어 놓고 병원 야외 정원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커피를 다연에게 건네며 산책하듯 조용히 걸었다.

    다연도 익숙한 장소인지 자연스럽게 산책로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네.”

    다연은 따뜻한 커피를 양손으로 잡았다.

    “예전에 주치의 선생님이랑 여기 자주 걸었어요. 그리고…… 다른 분이랑도요.”

    확실히 다연은 상담실 안에서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말이 조금 많아졌지만, 여전히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은 여전했다.

    상담 기록지는 없었지만, 정신은 다연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진 교수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내년에는 돌아오시는 거예요?”

    “내년에 진 교수님 오시면 주치의 바꾸실 겁니까?”

    다연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슬퍼 보여 정신은 함께 웃어 줄 수 없었다.

    “내년에는 제가 여기에 없을 거예요.”

    아, 그래서 웃음이 슬펐구나.

    정신은 앞에 보이는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 앉을까요?”

    “네.”

    벤치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앉은 정신과 달리 다연은 허리를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양손으로 커피가 든 컵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년에 어디 가야 합니까?”

    “제가 원래 있었던 곳이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게 왜 슬픈 일일까. 오늘은 그 부분을 좀 건들어 보고 싶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게 싫은 건가요?”

    “왜 그렇게 물어보세요?”

    다연이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컵은 만지작거렸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간다고 말하는 게 굉장히 슬퍼 보여서요.”

    툭툭.

    다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정신은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 * *

    다연과 헤어지고 상담실로 돌아와 보니 자혁이 팔로 눈을 가린 채 안락의자에 누워 있었다.

    오늘은 자혁이 오는 날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힘든 일이 있었나 했겠지만, 오늘은 펑펑 우는 여자를 봐서인지 정신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키지도 않을 거면 예약 날짜는 왜 잡는 건데?”

    “지금 형 목소리. 짜증 내는 거 같아.”

    “맞아. 짜증 났어.”

    자혁은 눈을 가린 채 피식 웃었다.

    “왜 짜증 났는데?”

    주인도 없는 방에 먼저 들어와 있더니 이제는 그 주인 행세까지 하려 했다.

    “나 상담해주는 거냐?”

    “형도 힘들 거 아니야. 나 같은 사람 만나는 거 말이야.”

    의사 가운을 입던 정신의 행동이 멈췄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정신은 자혁의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왜 짜증이 났는지 말 안 해줄 거야?”

    “어떤 여자가 울어서.”

    자혁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내가 아는 여자도 울었는데…….”

    자혁은 여전히 눈을 가린 팔을 내리지 않았다.

    “우는데 표정이 안 보여서 우는 줄도 몰랐어. 등신처럼.”

    “자혁아.”

    “진짜…… 내가 싫더라. 여자가 우는 것도 모르고, 우는 걸 알아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도 모르더라고…… 내가.”

    자혁은 몸을 옆으로 돌려 등을 보이며 누웠다.

    한 번씩 자혁은 심한 자괴감에 빠지곤 했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 너도 오늘은 마음으로 울다 가라. 정신은 자혁의 어깨를 두 번 토닥여주었다.

    * * *

    주연은 명품으로 휘감고 정기 모음이 있는 호텔 스파로 향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입고 있는 옷의 금액에 따라 자존감이 올라가지만, 옷을 다 벗었을 때는 완벽한 바디라인을 가진 사람의 자존감이 가장 높이 올라갔다.

    이 모임에서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 주연의 고개가 빳빳하게 올라갔다.

    오늘은 어디 기업 남편이 속을 썩이는지 혹은 어느 집 자식이 누구와 선을 봤는지. 어떤 잡다한 이야기가 오갈 것인지 기대되었다.

    “주연 씨, 소문 들었어? 한서그룹 사모 지금 갓난쟁이 키운대.”

    “2주 전에 우리 여기서 만났잖아요. 홀쭉한 배가 언제 불러서 아기가 태어났대요?”

    몰라서 물어본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의 흥을 돋워 주기 위한 물음이었다.

    “시 어르신 아기래.”

    “남편 자식도 아닌 시아버님 아기요?”

    거기에 모여 있는 여자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듣고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어, 내가. 그동안 한서 그룹 걔가 우리 딸 좀 무시했어? 소문이 파다해서 지금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갓난쟁이 데리고 끙끙거리고 있겠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주 여사는 정말 속이 후련한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주 여사에게 물었다.

    “아, 맞다. 자기 자선 행사 갔다고 했었지? 정말 구자혁 사장이 와이프 데리고 온 거 맞아?”

    주연도 궁금했던 거라 주 여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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