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다연은 굉장히 하얬다. 그래서 다른 색이 입혀지면 하얀색이 더 두드러지게 희게 보였다.
목에 있는 점이 보일까 봐 매번 스카프를 두르는 것이 신경 쓰여 고른 드레스가 하얀 피부를 더 도드라지게 했다.
도자기 같은 살결을 한 번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지금 보타이를 직접 해주겠다고?
자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하아. 슬라임 가지고 올 걸 그랬다.
시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살며시 팔짱을 껴오는 다연 때문에 자혁은 몸이 굳었다.
“실례할게요.”
“좋으실 대로.”
샵 입구에 대기 중인 차까지 짧은 거리였지만,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기분이 이상해서 자혁은 재킷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거라도 만지지 않으면 그녀에게 손을 댈 것만 같았다.
차에 있던 이 실장이 다급한 걸음으로 자혁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건설 현장에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문제라니요?”
“작은 사고가 있었답니다.”
건설 현장에서의 사고라는 게 걸렸다. 이 실장에게 보고가 될 정도면 제법 큰 사고일 것이다.
사고 경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이 실장을 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이 실장님이 직접 가 보세요. 사고 경위 그리고 피해 상황, 파악되는 대로 보고하세요.”
“행사장 수행은 강 대리 부르겠습니다.”
자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운전은 내가 하면 됩니다. 얼른 가 보세요.”
“그건 콘솔 안에 있습니다. 그럼.”
이 실장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자혁은 다연을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차에 오를 때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막아주자 샵 안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캭 하고 질러대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무엇을 해도 그림 같은 사람인데 아내를 아껴주는 행동에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듯했다.
자혁의 익숙한 듯 몸에 밴 듯한 매너에 잠시 심장이 떨렸지만, 다연은 이내 미미가 떠오르며 차게 식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화하는 미미에게도 이렇게 하겠지.
‘미미한테는 한없이 다정하구나. 목소리도, 행동도.’
갑작스럽게 감정이 널뛰어서인지 벨트를 당기는 다연의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가만히 있어.”
그가 벨트를 당기려는 상체를 기울이며 긴 팔을 뻗었고, 서로의 볼이 스치듯 솜털이 닿았다.
-따닥.
솜털이 쭈뼛 설 정도의 전기가 일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다연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가 벨트를 마저 당겨 채우며 멀어졌다.
“숨 쉬어.”
굳은 얼굴로 무심하게 툭 던진 말에도 다연은 편하게 숨쉬기 어려웠다.
* * *
자선 행사가 열리는 곳은 서울 근교 있는 미술관 야외 정원이었다.
일찍 출발했는데도 퇴근 시간이 겹치자 차가 더디게 움직였다. 차가 빽빽이 줄지어 있는 도로 위에 둘만 있자니 어색한 침묵만 이어졌다.
출발 전 정전기가 일었던 순간부터 온몸의 솜털이 서 있는 느낌에 다연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
그가 왼팔을 운전석 창문에 올린 채 옆에 앉은 다연을 바라보았다.
“힘들어?”
“아니요.”
샵에서는 잘도 웃더니 지금은 다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선명하게 보였다가 잿빛으로 보이는 것이 반복되었다.
지금도 힘들지 않다는 말이 진심이 아닌 거처럼 들렸지만,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자혁은 혼란스러웠다.
“불편한가?”
“이거 하려고 왔는데 참아야죠. 고작 일 년인데요.”
그녀의 대답은 결국 힘들고 불편한데도 지금 참고 있다는 말이었다.
해야 할 일이니 하겠지만, 일 년이 지나면 그녀는 할 일 마쳤다는 듯 다시 가버리겠지.
‘끝날 때까지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게 조용히 있다 갈게요.’
지난번 다연이 했던 말과 함께 자혁의 신경을 툭툭 건들었다.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해?”
“딱히 불편할 게 없어요. 그렇다고 아주 편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진짜 부부가 아니라서?”
다연이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말을 외면했다.
결국 행사장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자혁은 입구에 차를 세우지 않고 직접 주차장까지 운전했다.
다연이 손에 들고 있던 보타이를 들었다.
“혼자 할 수 있어.”
자혁이 보타이를 가져가려 하자 다연이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힘으로 하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협조하기로 했잖아요.”
“대답 안 했어.”
자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다연과 계속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까 콘솔에서 꺼내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도 해결해야 했다.
자혁은 자신의 손에 있는 것 먼저 해결하기로 하고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그동안 잠깐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와 달리 공식적인 자리니까.”
자혁은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결혼반지야.”
다연의 표정이 굳었다.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거 같아 심플한 걸로 골랐는데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았다.
다시 닫으려고 하는데 다연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내가 껴야 해요? 그래도 결혼반지인데?”
반짝이는 다연을 눈을 보니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위 내시경을 해봐야 할 거 같다.
“알았어요. 내가 낄게요.”
다연이 반지를 가져가려는 순간 자혁이 케이스를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타이 먼저.”
보타이를 줄 거로 생각했는데 다연은 양팔을 들어 자혁의 목을 보타이를 둘렀다.
다연의 어깨가 자혁의 볼에 살짝 닿았다.
아무래도 다연에게서 나는 향이 몸을 굳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이, 착하다.”
다연은 보타이를 메주고 해맑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예쁘네.”
“거울도 안 보고 어떻게 알아요.”
자혁의 시선은 집요하다고 할 만큼 다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타이 메준 사람이.”
조금 전까지 해맑게 웃던 다연이 당황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얀 손이 네이비색 드레스 위에 포개어져 있었다.
자혁은 다연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언제 봐도 작은 손이었다. 너무 작아 손에서 빠져나갈까 봐 자꾸 힘을 주어 세게 잡게 되는 손이었다.
자혁은 두 개의 반지 중에 작은 것을 꺼내 다연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사이즈를 말한 적도 없는데 어쩜 이렇게 꼭 맞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예쁘네.”
반지 말고 한다연이.
다연은 반지 케이스 안에 남이 있는 반지를 꺼내 들었다.
“당신 반지는 내가 끼워줄게요.”
당신이라는 말이 뭐라고 자혁은 또 속이 울렁거렸다.
작고 하얀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더니 자혁의 약지에도 다연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떨려왔다.
누군가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아내에게 키스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이제 갈까?”
“네.”
자혁은 다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걸었다.
두 사람이 행사장 안으로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결혼 발표 후 2년 만에 사진이 아닌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부부의 모습을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연이 긴장했는지 자혁의 팔을 세게 잡았다. 자혁은 다른 손으로 몇 번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그걸로 안심되지 않는지 다연이 더 세게 꼭 잡았다. 자혁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자 다연이 웃으며 말했다.
“무서운 얼굴 말고요. 좀 웃으라고요.”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어 오늘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오면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모든 신경이 옆에 있는 다연에게 향해 있었다.
“지금처럼요, 예쁘게.”
“멋있는 게 아니고?”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
다연의 말에 자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진짜 조각 같아서 조각 미남이라는 별명의 남자가 웃다니 그것만으로 오늘 이 행사는 이미 성공적이었다.
“구 사장,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사람이랑 온 걸 보니 아주 보기 좋구먼.”
“이런 미인이라면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을 거 같긴 해. 나도 젊었을 때는 안사람이 어디 가는 게 싫었지.”
다연과 함께 인사를 하면 모두 다연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다연은 조금 짓궂은 농담에도 자연스럽게 웃어넘겼다.
“그동안 공부하러 외국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공부도 좋지만, 이제 슬슬 2세도 봐야지.”
예상 못 한 질문에 두 사람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결혼한 부부에게 자녀 계획을 묻는 게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 회장. 요즘은 그런 거 물으면 꼰대 소리 들어.”
“아, 그런가? 허허. 세상이 참 많이 변했어.”
다행히도 명도건설 김 회장이 도와주어 곤란한 질문을 지나갈 수 있었다.
“2세 얘기에 두 사람 다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좋을 때 구만.”
점점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다연은 어디로 숨어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가장 안전한 곳을 생각해 보니 지금도 구자혁이었다.
다연이 그의 등 뒤로 숨는 것을 보며 짓궂은 어른들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여기서 또 뵙네요.”
걸걸한 웃음을 뚫고 여자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발레 공연장에서 봤던 JK단장이었다.
첫 만남에서도 그렇고 볼 때마다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고개만 까딱이는 자혁과 달리 다연이 친근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부부 동반 행사에 나오신 걸 보니 이제야 두 분이 진짜 결혼한 사이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말의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런 자리 부담스러워서 한국에 있어도 그동안은 제가 피했어요.”
“편한 자리는 아니죠. 만나는 사람이 많으면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니까요.”
“제가 은둔형인 거 어떻게 아시고. 네, 맞아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피곤해지니까요.”
대외적인 표정인지 이수희 단장의 얼굴에는 지난번과 같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 사람 아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주목받거든요.”
다연은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보세요. 이 사람 표정이요. 이런데 오면 꼭 이렇게 굳은 표정이라니까요. 웃는 게 훨씬 멋있는데 말이에요.”
다연이 사랑스럽게 웃는 것을 보며 굳었던 자혁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인사해야 분들이 많아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시선을 주는 통에 자혁은 자연스럽게 다연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단장이 있던 곳과 멀어지자 자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기응변에 아주 능해.”
“당신만 하겠어요?”
자혁이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나만 하냐니?”
“지난번 공연장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구자혁 씨 완벽한 연기에 비하면 한없이 어설프죠.”
“당신은 연기였어?”
자혁이 걸음을 멈추고 다연과 눈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