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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76)

13화

“가장 안전한 사람 맞아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다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예뻐서 자혁은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질 거 같아 자혁은 주먹을 쥐었다.

웃는 사람이 예뻐 보이는 것도, 만지고 싶은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으니 자신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일했던 거예요?”

“비 오는 날이면 불면증에 시달려서.”

어쩐지 요 며칠 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요?”

“기억 안 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불면증은 아니지만, 자신과 비슷한 것에 다연의 경계가 조금 풀렸다.

“비 오는 날이 힘들어요.”

아까 공연장에서 만났을 때도 다연은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비 오는 날은 운전하는 게 힘들어서요.’

아무래도 운전 실력이 아닌 ‘비 오는 날’이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듯했다.

“운전만 힘든 게 아니었나 보군.”

다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차를 타고 있었어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고…….”

사고가 났었다. 떨어진 차 문밖으로 튕겨 나간 다연은 살았고, 차는 엉망으로 구겨진 채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었다.

커다란 손이 다연의 얼굴을 감쌌다.

“애쓰지 마.”

“…….”

“괴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네.”

그의 손이 다연의 눈을 가려주었다.

“눈 감아. 말하고 싶으면 하고 그러다 잠들면 그냥 자.”

“네.”

따뜻한 손이 눈을 덮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인형의 키스처럼 괴로운 기억을 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주 큰 사람 인형이 옆에 누워있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 뒤 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먼저 잠든 사람은 며칠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했던 그였다.

다연은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가 그랬던 거처럼 다연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미간을 어루만졌다.

“잘 자요. 좋은 꿈 꾸고요.”

* * *

낯선 감각에 눈을 떠 보니 이불 속 다연이 자신의 가슴에 꼭 붙어서 자고 있었다.

가슴을 간지럽히던 게 그녀가 내뱉는 숨결이라는 것이 인식되면서부터 몸 안에 열기가 일기 시작했다.

다연이 안전하다고 했는데 지금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면 다연을 깨우게 될까 봐 몸을 서서히 뒤로 뺀 뒤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문제는 그가 뒤로 물러나는 만큼 다연이 꿈틀거리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돌겠군.’

점점 더 가까이 붙는 다연 때문에 자혁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천천히 몸을 뒤로 빼서 상체를 반쯤 일으켰을 때 잠에서 깬 다연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서 서로의 몸이 부딪쳤다. 중심을 잃은 다연이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품에 안았다.

-쿵!

다연을 안은 채 떨어진 자혁은 바닥에 부딪친 통증보다 품속에 꿈틀거리는 그녀가 더 신경이 쓰였다.

“괜찮아?”

“난 괜찮은데…… 자혁 씨는요?”

자신에게 안겨 있는 다연은 괜찮지만, 안고 있는 사람은 괜찮지 않았다.

“당신이 먼저 일어나주면 괜찮을 거 같아.”

“미안해요. 잠깐만요.”

둘 사이에 이불이 있긴 했지만, 너무 가깝게 밀착되어 있었다.

다연이 몸을 일으키려 움직일 때마다 자혁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저기…… 이불이 너무 꼭 감겨 있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겠어요.”

“하아, 돌겠군.”

자혁은 그녀를 꼭 안은 채 옆으로 몸을 돌렸다.

“꺄악.”

갑작스럽게 몸이 돌려진 다연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자혁과 마주 본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다연이 이제껏 보았던 표정 중 가장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대로 있어. 내가 먼저 일어날 테니까.”

다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자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다연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침대에 걸터앉혀 두고 그가 눈을 맞추었다.

“운동 신경이 없는 거 같지 않은데 의외로 허당이야.”

“이건…… 예상 못 한 일이잖아요.”

아직도 이불에 싸여 있는 다연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하는 게 아이처럼 귀엽게 보였다.

자혁은 다연의 머리를 쓰다듬듯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비 그쳤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연의 방을 나갔다.

혼자서 몸에 감긴 이불을 풀던 다연은 순간 멈칫했다.

“뭐야…… 정말 같이 잤나 봐…….”

그것도 자신이 먼저 옆에 있어 달라고 했었던 것까지 떠오르자 순식간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 * *

같이 한 침대에서 잠들고 난 다음 날부터 자혁은 일주일 동안 출장을 갔다.

그의 집에 혼자 있는 게 처음이라서인지 다연에게는 그의 부재가 대단히 크게 다가왔다.

도망자처럼 외국에 숨어 지내던 때도 매일 혼자 밥을 먹었는데 그가 없는 저녁 식사 자리는 굉장히 쓸쓸했다.

이 실장이 집에 왔을 때 다연은 내심 반가웠다.

“자선 파티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저 혼자요?”

“부부 동반입니다.”

지난번 발레 공연에도 부부로 참석했지만, 인사를 나눈 사람은 단장 한 명이 전부였다.

부부 동반이라면서 자혁은 아직 출장 중이었다.

“구자혁 씨 출장 중이잖아요. 내일 오전에 온다고 했잖아요.”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지금 회사에 계십니다.”

그와 함께 출장 갔던 이 실장이 지금 다연을 데리러 온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실장이 왔다는 건 자혁의 출장이 끝났다는 거였다.

다연은 외출 준비를 하며 혹시 몰라 클러치에 약을 챙겨 넣었다.

“네, 가죠.”

부부 동반 자선 파티라면 그동안 두 사람이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리였다.

다연이 한국에 온 이유.

이런 자리에 자혁과 함께 참석해서 위장 결혼을 포함한 모든 소문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이 실장이 데려왔던 샵에 다연이 들어서자 실장이 반갑게 인사했다.

헤어와 메이크업이 끝날 무렵 자혁이 샵 안으로 들어왔다.

“구 사장님,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나눈 자혁의 시선이 다연에게 고정되었다.

일주일만이라 굉장히 반가웠다.

“왔어요?”

출장이 힘들었는지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그런데도 눈빛만은 여전히 강렬했다.

“예쁘네.”

툭.

자혁은 한마디 툭 던져 놓고 의상실로 들어가 버렸다.

잔잔하던 호수에 파도가 이는 줄도 모르고.

“역시 사모님께는 다르시네요. 저런 말도 하실 줄 알고요.”

사모님 소리는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거북했다.

“농담은 자주 해요.”

“어머, 사모님. 지금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신데요?”

다연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어서 다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드레스로 갈아입으셔야죠.”

직원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진한 네이비색 홀터넥 드레스였다.

혹시나 목이 노출되는 옷을 입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연의 목에 있는 점이 완전히 가려지는 디자인인 것이 다행이었다.

다연이 나오자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같은 네이비 계열에서 조금 톤 다운된 실크 턱시도를 입은 자혁이 서 있었다.

다연을 보자마자 그의 반듯한 이마가 일그러졌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건데, 구자혁 씨.’

실장은 자혁의 옆으로 다연을 데리고 가 나란히 거울 앞에 세워두고 다시 점검했다.

“드레스 잘 어울리세요.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결혼사진보다 훨씬 나아요.”

굳은 인상을 하고선 자혁은 거울에 비친 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구 사장님 안목은 탁월하세요. 홀터넥 드레스가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는데 사모님한테는 정말 딱이에요.”

과하지 않는 진주 장식이 넥을 감싸고 있었다. 목에서 가슴 라인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시스루 재질로 다연의 하얀 살결이 고스란히 비쳤다.

“오늘 자선 행사에 가면 우리 사모님한테 눈길 많이 가겠어요.”

“생각만 해도 부담되는데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다연의 손을 실장이 꼭 잡아주었다.

“오늘 많이 힘드실 거예요. 다들 한강 기업 안주인이 어떤 사람인가 눈에 불을 켜고 볼 테니까요.”

괜찮아요. 그거 하러 왔으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대신 다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옆에만 붙어 있어.”

화가 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을까.

“그동안 꼭꼭 숨겨둔 이유가 있었네요. 네, 사모님 누가 훔쳐 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우세요.”

저기요, 그런 게 아니랍니다.

실장은 다연에게 자혁의 보타이를 넘겨주었다.

“이걸 왜…….”

“행사장 들어가기 전에는 꼭 매주세요. 넥타이도 그렇고, 질색하시거든요.”

그의 타이를 매준다니 그건 정말 부부 사이에나 해줄 법한 일이라 다연은 부담스러웠다.

“괜찮아. 이 실장이 해주면 돼.”

“어머, 구 사장님. 사모님이 계시는데 왜 비서한테 매달라고 하세요?”

저희가 이런 거 해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다연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인형 놀이의 인형이 되려고 온 것이다. 이 정도쯤이야 협조해 줄 수 있었다.

다연은 실장이 건네주는 보타이를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들었죠? 얌전히 협조해줘요.”

“출근할 때도 안 하려고 하시죠?”

“네. 타이라면 질색해요.”

진짜 아내가 된 거처럼 다연이 대답했다.

자혁의 시선이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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