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공손히 맞잡은 손의 주름을 보지 못했다면 그녀는 40대로 보일 정도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동안이었다.
예리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다연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다연입니다.”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세요.”
다연이 자혁을 슬쩍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되물었다.
“소문이요?”
“네. 사모님이 굉장한 미인이라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기 아까워 꼭꼭 숨겨두는 거라고 했거든요. 직접 뵈니까 구 사장님이 숨겨둘 만하시네요.”
“더 보여 주기 아까우니까, 그만 들어가겠습니다.”
어디서 저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배웠는지 민망함은 다연의 몫이었다.
“구 사장님 농담을 진담처럼 하시네요.”
“진담입니다.”
점점.
그냥 두면 안 될 거 같아 다연이 그의 팔을 슬쩍 흔들었다.
“두 분 보기 좋아요. 오늘 첫날이라 소소하게 이벤트 준비했는데 참여 한번 해주세요. 즉석 사진도 찍어드리니 기념이 될 거예요.”
“보여 주기 아깝…….”
그가 낯간지러운 말을 또 남발하는 것을 막고자 다연은 손으로 그의 입을 가렸다.
“네, 좋아요.”
단장이 웃으며 앞장서자 다연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혁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을 보고 그녀는 자기 멋대로 대답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 생각했다.
“사진 찍는 거 싫어요?”
“아니.”
“표정이 굳었는데요?”
“갑작스러워서.”
다연이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여기저기 사진 많이 찍히잖아요.”
“사진 말고.”
다연은 그가 무엇을 갑작스럽다고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입술에 닿아서.”
“……!!”
더는 민망한 말이 나오는 것을 막고 싶어 한 행동이라 그의 입술이 닿은 것은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민망함은 다연의 몫이었다.
“이벤트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제시된 표정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겁니다. 사모님의 표정을 구 사장님이 맞히시는 거예요.”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발레 공연이기에 기획한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다연은 조금 전보다 더 굳은 얼굴의 자혁을 마주 보고 섰다.
입술에 그녀의 손이 닿은 것 때문에 아직도 심기가 불편한 거 같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신호에 그녀는 제시된 문제를 바라보았다.
첫 문제는 ‘웃음’이었다.
굳은 얼굴의 자혁을 보고 웃는 게 쉽지 않았지만, 다연은 지금 자신이 공연 중이라고 생각하며 밝게 웃었다.
“예쁘게 웃네.”
윽, 오글거리는 대답이었다.
다음으로 제시된 것을 보며 다연이 울상을 지었다.
“웃는 얼굴이 더 예쁜데 왜 울상이야.”
다연의 마음을 아는 거처럼 마지막으로 제시된 단어는 ‘화낸다’였다.
“예쁘다고 했는데 왜 화난 얼굴이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역할을 그가 이토록 완벽하게 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연기력이 정말 곧장 배우로 데뷔해도 될 정도였다.
다연은 그가 못 하는 일이 있기나 한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기념사진…… 찍어드릴게요.”
단장도 민망한 얼굴이었다.
자혁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기념사진은 수줍어하는 다연의 모습이 찍혔다.
인화된 사진을 건네던 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사모님…… 전에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아니요. 오늘 처음 뵙는걸요.”
“하긴, 사모님 같은 미인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텐데 말이죠.”
단장은 조금 전 당황해하던 표정을 지운 채 미소를 지었다.
“곧 공연 시작이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단장이 가고 나서야 다연의 얼굴빛은 정상으로 되돌아왔지만, 자혁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뒤 다연은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림 도구가 든 파우치를 꺼내 들었다.
워터브러쉬에 물을 채워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 위에 붓이 스칠 때마다 갓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오랜만에 잡은 붓을 금방 놓을 수 없어 다연은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려 놓고 보니 그동안 그녀가 그렸던 풍경화가 아닌 인물이 주제였다.
“예쁘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지혜에게 전송하자 곧장 답변이 왔다.
[대박! 차기작 주제가 ‘연인’일 줄이야. 완전 사랑스럽잖아.]
다연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보여요?]
그동안 다연이 그렸던 것은 여행 일러스트였다. 인물이 주제인 것은 처음이라 자신이 없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이경주 작가님. 여행 시리즈 다음은 연인 시리즈로 한번 가 보자.
아 참, 온라인 클래스는 생각해봤어? 얼굴 빼고 손만 나오는 걸로 하자니까.]
생각할 시간을 더 달라고 답장을 보내고 다연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제 일이지만, 마음대로 결정하기에는 다연은 자혁이 마음에 걸렸다. 무사히 이혼할 때까지 그의 아내 역할만 충실하려 했지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좋은 제안을 받으니 커리어를 더 쌓고 싶은 욕망이 앞섰다.
* * *
비가 오면 어김없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혁은 오늘도 잠들지 못했다.
공연장에 있었던 일도 그의 불면증을 부추겼다. 공연 때마다 표정 맞히기와 같은 이벤트를 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늘 공연에 자혁과 아내가 함께 참석하겠다는 것은 비서실에서 통보해주었다. 그의 참석을 알고 급조한 이벤트라면 누구의 지시였을지 알 것만 같았다.
작은아버지이자 부사장인 구재철.
지난번 협상 자리가 불발된 것도, 오늘 일도 그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아.”
자혁의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잠을 못 잔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정말 먹기 싫은 수면제가 든 약통을 꺼내 들고 자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무렵 끙끙 앓은 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다연, 둘 뿐이었다. 자신이 내는 소리가 아니면 다연이 내는 소리였다.
그녀의 발 앞으로 다가가자 소리는 더 커졌다. 자혁은 노크하며 그녀를 불렀다.
“한다연, 어디 아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자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악몽을 꾸는 것인지 다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한다연.”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들리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리질 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둘 수 없어 자혁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연아.”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양어깨를 흔들자 다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악몽이라도…….”
나쁜 꿈을 꿨는지 물으려던 그의 말은 끝까지 잇지 못했다. 다연이 그의 품에 안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자혁은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연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자혁은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는 그녀의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꿈을 꾼 건가?”
다연이 물을 입에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물을 꿀꺽 삼킬 뿐 다연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이 아니더라도 자혁은 오랜 훈련으로 그녀의 반응만으로 답을 알 수 있었다.
오늘과 같은 꿈에 자주 시달린다는 말이었다.
자혁은 양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말했다.
“다시 잠들 수 있겠어?”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거처럼 보였다.
“말해봐.”
아, 이렇게 주어 빼먹고 말하는 거 별로라고 했던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다연은 물을 마시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고 짙은 눈과 마주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 자혁이라고 했던가.
매번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연에게 구자혁은 현재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나요?”
난제였다.
아무렇지 않게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여자였고, 자신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부탁하는 것을 보면 인간애 외에는 다른 감정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사람에게 짐승이 되면 안 되는데 이성의 지시를 위반한 그의 손이 자꾸만 그녀에게 뻗어 나가려 했다.
“무리한 부탁인가 봐요. 괜찮아요. 혼자 있는 거 익숙하니까요.”
대답이 늦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무리인 건가 싶어 다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 있을 때도 비는 왔었다. 악몽을 꾸는 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그때마다 혼자였던 다연은 어찌어찌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냈었다.
그가 다시 2층에 올라가 버린다 해도 다연은 늘 그랬듯이 혼자 다독일 수 있을 것이다.
자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무리한 부탁이었는가 보다.
“당신은 이불 속, 나는 이불 위.”
“네?”
“잠들 때까지 있어 달라면서.”
자혁은 취침 등만 켜두고 다연의 옆에 누웠다.
그는 말한 대로 이불 위로 올라와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웠다.
다연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가 누운 쪽을 바라보며 가로로 누웠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연이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옅게 웃었다.
“무슨 꿈인데 자주 꾸는 거야?”
“…….”
다연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켜 그녀와 마주 보며 가로로 누웠다. 그리곤 검지로 이불을 슬쩍 들추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
“네?”
“당신. 한 번씩 대답해 주기 싫어서 질문으로 대답을 숨길 때가 있어.”
정곡이 찔린 것보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부분 약점이 될까 봐 숨긴다는데. 그런 건가 싶어서.”
“약점이라기보다는…… 당신한테 어디까지 말해도 좋은지 고민될 때가 있어요.”
다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린…….”
“진짜 부부가 아니니까?”
“……네.”
심장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다연은 입 안 속살을 지그시 물었다.
자혁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 이상한데요. 지금은…… 가장 안전한 사람이 당신이에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장 위험한 게 아니고?”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다연이 피식 웃었다.
한밤중에 남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도 그 사람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만 사실이었다.
구자혁이 가진 흠 중에는 남자구실을 못 한다는 것은 한집에 사는 지금 다연에게는 가장 안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