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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76)
  • 11화

    “믿음이라고요?”

    언제 봤다고 그 사람을 믿어? 그 오만한 남자를 내가 믿는다고.

    의사의 말에 다연의 첫 반응은 거부감이었다.

    “한다연 씨를 다치지 않게 한다는 믿음이요. 쉽게 말해 안전하다는 믿음 말입니다.”

    “아…….”

    작은 탄성이 나오며 다연은 하얀 개가 나타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릴 때 큰 개에게 물렸던 기억 때문인지 다연은 개가 무서웠다.

    위협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반가워서 가까이 온 것을 알면서도 다연은 너무 무서워 자혁에게 매달렸다.

    이 사람이라면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해주겠지.

    위기의 순간 그런 믿음이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건 다연만의 믿음일 뿐이었다.

    허락 없이 그에게 매달린 것이 기분 나빴는지 집으로 오는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정신은 지난번 왔던 환자를 일주일 만에 마주했다.

    라포르 형성을 하는 게 먼저라 이 주에 한 번 오라고 했더니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오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말할 사람이 없어서요.”

    예의 바르게 하는 말로 봐서는 진심이었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직업이니까. 정신은 환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요?”

    “지금이요.”

    오늘도 과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편 이야기인가요?”

    다연이 정신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자주 화를 내나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다연을 보며 정신은 의사로서의 본분을 잠시 잊고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싶었다.

    “늘 화가 나 있는 거 같아요.”

    “예전에도 그랬나요? 아니면 최근에 갑자기 변한 건가요?”

    다연의 대답을 기다리며 정신은 지난번 다연이 왔을 때 결혼한 지 2년 됐다고 한 걸 떠올렸다.

    혹시 권태기 징조는 아닐까 싶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돼서요.”

    2년이?

    기간에 대한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2년은 결코 얼마 안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니었다.

    “제가 2년 동안 외국에 있었거든요.”

    사이다를 마신 거 같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의문 하나가 풀렸다.

    결혼하자마자 부인은 외국에 남편은 한국에 있었다면 남편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한 게 이해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정말 상담이 어려운 환자였다.

    “남편과 더 친해지고 싶은가요?”

    “아니요.”

    다른 질문과 달리 다연의 대답이 빨랐다. 이런 경우 둘 중 하나였다.

    대답처럼 친해지고 싶지 않았을 때 아니면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감추는 경우. 지금은 후자로 보였다.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다연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요. 무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다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툭 대답했다.

    “남편에게는 오랫동안 좋아한 여자가 있거든요.”

    다시 속이 답답했다. 겨우 사이다 한 모금 먹이더니 고구마 10개는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다시금 몰려왔다.

    의사가 환자에게 측은지심 정도는 가져도 되는 감정이었다. 그걸 넘어선 동정심을 가지는 건 자칫 의사의 본분을 잊고 선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동정심이 일었다.

    피부가 닿아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니.

    다음 주에 오겠다며 나가는 다연에게 정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또 보자는 말밖에 없었다.

    * * *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해한다고 그들이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자혁은 사람의 얼굴에 무감해졌다.

    대신, 목소리와 말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새로운 광고 시안을 발표하는 기획실장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이번 건설될 아파트 광고 컨셉은 안락함입니다.”

    “안락함.”

    자혁은 마지막 단어를 그대로 따라 했다.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지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집이란 개념이 사람에게 처음 가져다준 의미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안전.”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표정이 굳어가는지도 모르고 자혁은 다시 한번 마지막 말을 소리 내어 말했다.

    기획실장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떨렸다.

    “어떤 무서운 것을 맞닥뜨릴 때 가장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본능.”

    자혁은 며칠 전 큰 개가 나타났을 때 자신에게 달라붙었던 다연을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기, 사장님.”

    이 실장의 목소리에 자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계속하세요.”

    자혁의 굳은 얼굴을 보니 이번 광고도 틀렸는가 보다. 기획실장은 몇 날 며칠 준비한 광고를 다시 뒤엎을 생각 하니 앞이 깜깜했다.

    발표하는 기획실장의 말이 자혁의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처럼 다시 심장이 쿵쿵 뛰며 다연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던 떨리던 손도.

    왜 자신의 품으로 왔을까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뜻밖의 사람이 답을 주었다.

    사람이 무서운 것을 맞닥뜨리면 가장 안전한 곳을 찾는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무서운 존재가 나타났을 때 다연에게 가장 안전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자혁이 피식 웃었다. 동시에 자혁을 뺀 전원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장님, 다시…….”

    “이대로 진행하세요.”

    자혁은 다시 한번 옅게 웃어 보이곤 회의실을 나왔다.

    쓸데없는 일에 자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서 큰일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자혁은 정신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어?]

    “자꾸 뭔가를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건 왜 그래?”

    [특별히 만지고 싶은 거라도 있어?]

    자혁은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그 손으로 다연의 손을 잡았을 때와 넘어질 때 잡았던 말랑한 살덩이를 떠올려 보았다.

    “말랑하고 세게 잡으면 부서질 거 같고. 조금 축축한 거 같기도 한데. 그냥 좀 이상한 거.”

    정신은 무언가를 찾아보는지 컴퓨터 자판 소리가 들렸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럴 수 있어. 자연스러운 충동이야. 장난감 하나 문자로 보내줄 테니까. 그거 만지고 놀아. 도움이 될 거야.]

    전화를 끊고 자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연스러운 충동이라니 다행이었다.

    웃는 다연이 예뻐 보이는 것도.

    다연을 만지고 싶은 것도 모두 정상이라는 말에 자혁은 안도했다.

    그녀의 손을 대체 할 수 있는 장난감이 있다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보내준 문자를 그대로 이 실장에 전송하며 당장 구해오라 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이 실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거 하나로 회의실에 모인 비서실 직원 모두 긴장했다.

    비서실 전체 회의 중이라 해도 사장의 연락보다 최우선인 것은 없었다.

    “혹시 말이야, 자네들.”

    이 실장의 비장한 말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실장은 휴대폰 화면이 보이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슬라임이 뭔 줄 아는가?”

    * * *

    예상 못 한 사고(?) 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은 집이 아닌 밖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발레 공연을 예매했다는 그의 말에 다연은 굉장히 반가웠다.

    종일 내리는 비를 의식하지 않고 오랜만에 보는 발레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그녀의 볼이 상기되었다.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자혁은 눈에 띌 정도로 멋있는 모습이었다. 매일 그림 같은 모습을 보면서도 매번 감탄스러웠다.

    그녀를 발견하고 옅게 웃는 그에게 이끌리듯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그가 십 분 이상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가 와서 택시가 잘 안 오더라고요.”

    “오늘 차 안 가지고 나온 건가?”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그녀가 외출하는 것은 자혁도 알고 있었다. 매번 차를 가지고 다니던 다연이 비가 오는 날 차를 두고 간 것이 의문이었다.

    “비 오는 날은 운전하는 게 힘들어서요.”

    비오는 날에는 다연의 운전 실력이 미숙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럼, 들어갈까?”

    자혁은 그녀가 먼저 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네.”

    그를 지나쳐 가느라 다연은 로비에서 뛰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자혁이 단단한 팔로 그녀의 양어깨를 잡아주어 가까스로 아이와 부딪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자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팔짱을 끼게 했다.

    “여기서는 이렇게 가지.”

    손을 잡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쩍슬쩍 말랑한 것이 닿을 때마다 자혁은 긴장해야 했다.

    그의 사정은 모른 채 그녀는 공연을 본다는 것에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 공연 정말 보고 싶었어요.”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JK발레단 공연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다행이야. 한 사람이라도 즐길 수 있어서.”

    그녀가 이토록 공연을 좋아할 줄은 자혁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발레 별로예요?”

    “춤에는 흥미 없어.”

    대화 없이 표정이나 몸동작만으로 된 춤은 자혁에게는 좀비 영화보다 끔찍했다.

    오늘 받은 초청장도 거절하거나 다른 직원에게 주려다 다연이 생각나서 처음으로 관람하러 온 것이었다.

    “춤은 언제부터 춘 거야?”

    “어릴 때요.”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것을 알지 못하고 자혁이 농담처럼 말했다.

    “시(詩)보다는 화(畵)에 능하고, 음주와 무(舞)를 즐기는 걸 봐선 옛날로 치면 선비쯤 되려나?”

    “기생이었을 수도 있죠.”

    그의 농담에 다연은 금세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춤추는 거 아니라는 거 알아. 당신 안에 있는 걸 풀어내려고 추는 거지.”

    구자혁은 참 이상한 남자였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그녀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스스로 풍류 속에 빠져 사는 선비 쪽이 더 가까워.”

    “한량이 아닌 선비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자기 밥벌이는 하니까.”

    다연이 그의 팔에 기대어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 몸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자혁은 속이 울렁거렸다.

    “구 사장님, 정말 와주셨네요.”

    초청장을 보낸 단장이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것이 보여 다행히도 자혁은 그녀의 몸을 덜 의식하게 되었다.

    “저기 앞에 보이는 사람이 와서 인사할 거야.”

    “누구예요?”

    “초청장 보낸 사람. JK단장 이수희. 나이는 60대. 한국에서 유명한 발레리나는 모두 저 사람이 발굴해서 키웠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단장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초청에 응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축하합니다. 여기 제 아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JK단장 이수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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