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76)

10화

다연은 양손 가득 장 본 것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큰 집은 언제나 적막했다. 그래서 다연의 작은 움직임도 큰 소리처럼 들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다연은 웍을 꺼냈다.

며칠 전 이제는 제법 친해진 가사도우미 장 여사가 먹고 싶은 것을 물었을 때 다연이 지나가는 말로 묵은지가 있을까요 하고 말했었다.

오늘 아침 장 여사는 작은 김치통을 보여 주며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웍에 소중한 묵은지 두 포기를 깔고 두툼하게 썬 목살을 넣고 쌀뜨물을 넣었다.

밥솥이 없어 냄비에 쌀을 올려놓으니 집에 음식 냄새가 담긴 온기가 퍼졌다.

몸을 움직이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거 같았다.

오랜만에 찾아간 병원은 다연이 처음 방문했을 때 했던 심리검사를 다시 제안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의사 이름도 제정신이라니. 마치 그의 직업을 예견해서 작명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이름에 맞춰서 직업을 택했을 수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언제 들어왔는지 자혁이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 * *

약속이 일방적인 통보로 취소되었다. 자혁의 신경이 곤두선 것은 취소를 약속 시각 5분 전에 통보한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취소한 이유가 작은아버지의 농간이라는 것이 가장 신경에 거슬렸다.

이 실장이 룸미러로 뒷좌석에 있는 자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사장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 없습니다. 집으로 가죠.”

비가 오면 고질적인 불면증으로 자혁은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며칠째 계속된 비 때문에 만신창이라는 말이 지금 그의 모습에 딱 맞는 표현이었다. 성한 곳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잠은 좀 주무십니까?”

자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컨디션을 보면 두 시간도 겨우 잔 거 같았다.

뒷좌석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오른손을 펴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자혁을 보며 이 실장은 평소보다 더 주의 깊게 운전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자혁은 심호흡을 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온기가 있었다. 음식 냄새도. 그가 답답하던 가슴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낀 것은 슬며시 웃고 있는 다연을 보았을 때였다.

자혁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물었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언제 왔어요?”

자혁이 온 것을 보자마자 예쁜 웃음이 사라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화가 난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아직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표정이 원래 다 그래?”

“어때 보였는데?”

“나에게 화가 난 거 같았어.”

정신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기 일에 충실하듯이 자혁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만 물었었다.

저 여자라면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방금.”

다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자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은 늘 있지.”

“약속은요?”

“취소됐어.”

잘 보이던 네 표정이 지금 하나도 안 보여. 왜 너도 잿빛으로 변한 건지 모르겠어.

굳어 있는 자혁의 얼굴을 보며 다연이 옅게 웃었다.

“잘됐다.”

자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음식을 너무 많이 했는데, 같이 좀 먹어줄래요?”

세상에서 가장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더니 배시시 웃는다. 그 표정이 너무 선명해서 자혁의 속이 울렁거렸다.

“저녁 먹었으면 어쩌려고.”

“제가 말 안 했던가요?”

다연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못하더라고. 구자혁 씨가요.”

자혁의 얼굴이 어떤지는 상관하지 않고 다연은 그릇에 밥을 퍼서 수저와 함께 식탁에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앉은 옆 의자를 빼서는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앉아요, 지금 엄청나게 배고파 보여요.”

자혁은 재킷을 벗고 다연의 옆에 앉았다.

“혹시 처음 보는 음식은 아니죠?”

자혁이 시선으로 돌려 다연을 바라보았다.

“유머 센스는 별로라고 했던 거 같은데.”

“풉.”

다연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다연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배고프면 속이 안 좋을 때가 있어요.”

다연은 길게 찢은 김치에 고기를 돌돌 말아 자혁의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그래, 배고파서 속이 울렁거리는가 보다.

자혁은 숟가락을 들었다.

숭늉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으면 다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먹어달라고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원래 이렇게 대식가였어요?”

자혁은 다연이 준 밥을 다 먹고 냄비에 있던 밥까지 더 해서 김치찜을 다 먹어 치웠다.

“배고팠어.”

이런 말을 진지한 얼굴로 하는 자혁을 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자혁은 몸을 옆으로 돌려 다연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셔도 마주 보는 게 아닌 나란히 앉는 게 편했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말소리에만 집중하기에 더 편했으니까.

선명하게 보이는 표정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자혁은 다연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다.

“내가 집에 들어와서 말 걸었을 때, 표정이 왜 그랬지?”

물어보는 사람이 너무 진지해서 다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집주인 허락도 없이 너무 함부로 행동한 건 아닌가 싶었다.

“집에서 요리 금지인데 내 멋대로 한 건가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정신이 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자혁은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가장 대답하기 싫었던 질문인데 자신이 지금 다연에게 하고 있었다.

정신이 왜 매번 이렇게 물어보는지 알 거 같았다. 지금 다연의 생각이 어떤지 중요했고 알고 싶으니까.

“내 집이 아니니까요.”

어렵게 물어본 건데 돌아온 대답은 싱거웠다.

“결혼이 끝나면 나는 돌아갈 거니까요.”

마치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깨우친 거 같은 충격이었다.

“그랬군.”

자혁이 식은 숭늉을 마셨다.

“끝날 때까지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게 조용히 있다 갈게요.”

맛있는 밥 잘 먹여 놓고는 소화 안 되는 소리나 하고. 마음에 안 들어. 자혁은 빈 그릇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고맙군.”

자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2층으로 가려다 말고 다연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아, 뭐예요?”

“잘 먹었다는 인사.”

“무슨 인사가 이렇게 무례해요?”

자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며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다 꽂았다.

“미미야, 퇴근했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다연은 2층으로 올라가는 자혁을 째려보았다.

‘밥은 나한테 얻어먹고 인사는 미미한테 하고. 별로야.’

그녀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자혁이 반쯤 올라갔던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다연은 뒤돌아가려다 물이 떨어진 곳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밟았다.

“어어.”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다연은 크게 넘어질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강한 힘으로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다연의 몸은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심장이 등 뒤에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과 배에 놓인 그의 커다란 손도. 가슴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꿀꺽.

그도 당황스러운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다연의 귓가에 너무 크게 들렸다.

넘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예상 못 한 신체 접촉에 서로 당황했다.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손을 떼고 다연에게서 멀어진 그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묻어났다.

혼자 서보려 했는데 다연이 다시 휘청이자 그가 다시 힘을 주어 안았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다시 움찔거렸다. 한 번도 낯선 이의 손길이 닿은 곳이 없었던 곳이라 몸이 굳었다. 꼭 거기를 잡았어야 했는지.

가슴을 감싸 쥔 그의 손이 다시 움찔거렸다. 다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그가 숨을 내쉬며 손을 가슴 아래로 내렸다.

“혼자 다시 서봐.”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의 떨림이 다연의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연은 다시 발에 힘을 주어 혼자 서보려 했다. 살짝 통증이 느껴졌지만, 혼자 설 수 있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허리를 감싸 안았던 그의 팔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따뜻한 온기가 멀어지는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야.”

자혁은 의자 위에 두었던 브리프케이스를 챙겨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굳은 듯 서 있던 다연은 그의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던 생경한 감각이 남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미치겠다. 진짜. 이제 얼굴을 어떻게 봐.”

다연은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 온 자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에 가득 잡히던 말랑한 살덩이는 분명 가슴이었다.

“하아, 도와주려다 치한이 되어버렸어.”

손에 남은 감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안은 순간 자신의 시선에 놓인 그녀의 하얀 목이었다.

도대체 어떤 향수를 쓰길래 그녀에게는 매일 그렇게 달큰한 향이 나는지 사람을 점점 미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한 번 만져보았던 것으로 다시 만져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돌겠군.”

그녀의 표정이 어땠을지 보는 게 두려워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온 것도 한심스러웠다. 자혁은 털썩 의자에 앉으며 마른세수했다.

* * *

심리 검사지를 보더니, 의사는 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왜 하필 구자혁이 손을 잡으면 괜찮은 건지 궁금했다.

그 이유를 알면 지긋지긋한 이 병이 완쾌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였다.

“괜찮은 사람이 남편이라면 다행 아닌가요?”

다연은 입술을 말아서 깨물었다.

‘남편이… 그 남편이 아니랍니다. 선생님아…….’

언제부터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는지도 말 못 했는데 위장 결혼으로 남편이 생겼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요.

“전에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가족에게도 거부 반응이 심했던 걸로 적혀 있네요.”

“네.”

그들과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을 가족이 아니니까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