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정신은 최선을 다해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
“아니면 최근 이야기를 해볼까요?”
다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최근이요.”
여전히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정신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여전히 다른 사람과 피부가 닿으면 발진이 올라오나요?”
“네.”
2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다면 심리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없다는 뜻이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시발점이 되었을 텐데 과거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니. 정신은 상담을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되었다.
“이상한 게…….”
그녀가 상담실에 들어와서 정신의 질문에 대답 외에 스스로 말을 꺼낸 것이었다. 펜을 잡은 정신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 사람은…… 괜찮았어요.”
“특정인 한 명과 피부 접촉을 해도 발진이 없었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굉장한 변화였다.
“악수해도 손목을 잠깐 잡았다 놓아도 발진이 없거나 아주 약한 정도의 발진이었어요.”
청아한 목소리에 반해 굉장히 무심한 말투였다. 놀라거나 기뻐하는 반응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남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다연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남편이요.”
정신은 다시 상담일지를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환자가 결혼했다는 내용이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 중이이거나 이성에 관한 고민조차 없었다.
2년 동안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치료도 가능했다.
“남편과 결혼은 언제 했나요.?”
“2년 전이요.”
2년 동안 병원에 오지 않은 이유가 결혼이었나?
그렇다면 남편과는 2년 전부터 괜찮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최근이라고 했지?
정신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하나씩 풀어가기로 했다.
“남편이 야기를 해볼까요? 어떤 사람인가요?”
금방 대답이 나올 거 같았는데 다연은 큰 눈을 굴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음.”
급기야 한숨까지 내쉬었다.
“말하기 곤란한가요?”
“이상해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자기 마음대로 구는 사람이에요. 자기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오만한 목소리로 맨날 명령만 해요.”
“아…….”
2년 만에 병원 방문 이유가 혹시 부부 싸움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다.
“싸우기도 합니까?”
“아니요.”
질문을 할수록 점점 수수께끼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잠든 남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방을 따로 써서 모르겠어요.”
“언제부터요?”
“처음부터요.”
안 되겠다.
이대로는 도저히 상담을 진행할 수 없었다. 정신은 검사 몇 가지를 제안했다.
“앞으로 상담에 필요한 심리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밖에 간호사가 안내해줄 겁니다. 혹시, 더 궁금하시거나 이야기 더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아니요.”
“그럼, 다음 상담에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던 다연이 뒤돌아보았다.
“저기…… 선생님.”
“네.”
“남자 손은 원래 그렇게 다 커요?”
“네?”
“아, 아니에요.”
뒤돌아 나가는 다연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상담일지를 내려다본 정신은 자신이 그린 많은 물음표를 보곤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 * *
보름에 한 번 자혁이 한강 병원에 방문하는 것은 공식적인 일정이었다.
한강 병원 이사장이라는 자혁이 가진 공식적인 위치를 이용해 다른 구설을 만들지 않고 편히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정신의 상담실을 다른 곳과 멀리 떨어트려 놓은 이유 중 하나도 자혁을 위해서였다.
상담실 안락의자에 앉아 자혁은 한쪽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며칠 동안 괴롭힌 그를 괴롭히는 잔상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아.”
제법 큰 덩치의 개는 자혁도 몇 번 본 적 있는 동네 개였다. 사람 좋아하는 녀석이라 낯선 사람에게도 꼬리를 흔들고 달려드는 것을 여기 올 때마다 봤었다. 문제는 그 녀석이 아니었다.
‘꺅, 어떡해.’
자신의 허리를 잡고 방패 삼은 다연이 너무 가까웠다. 서로의 몸이 아주 가깝게 붙었다.
‘하아, 하아.’
겁에 질려 거칠어진 그녀의 호흡이 코끝에 달콤하게 닿았다.
자혁은 처음으로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다.
미친놈처럼. 한쪽 팔 안에 다 들어올 거 같은 가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싶었다.
자혁의 시선에 그녀의 하얀 살결에 대비되어 나비 모양 점이 더 붉게 보였다. 다연이 움직일 때마다 그 점이 정말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 착각이 일어 그걸 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살 내음이 점점 짙어졌다.
한다연의 냄새, 맞닿은 몸, 놀라서 붉어진 얼굴. 모든 감각에 한다연이 선명하게 박혀 들었고 온몸의 세포가 한다연을 인식했다.
자혁은 속이 울렁거렸다.
“하아.”
자혁은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같이 지내는 게 힘들었어? 얼굴이 별로 같아.”
“응, 별로야.”
오늘 상담은 줄줄이 힘들구나. 정신은 늘 그렇듯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어떤 점이 별로인지 말해볼래?”
정확한 단어를 찾기 어려울 때 자혁은 의자 깊숙이 기대어 한쪽 팔로 눈을 가렸다.
정신은 인내심 있게 자혁이 어떤 말을 꺼낼지 집중했다.
“표정이 너무 잘 보여서 불편해.”
반가운 소식이었다.
“전에는 다 똑같이 보였으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자혁은 눈을 가렸던 팔을 내려놓고 정신을 바라보았다.
“말과 표정이 다르면 신경이 쓰여.”
“좋은 징조야.”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한 번씩 속이 울렁거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정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 어떤 사람이야?”
콕 집어서 아내라고 지목을 하는 순간부터 자혁의 표정이 굳었다.
“이상해.”
정신은 자혁이 오기 전 상담했던 환자가 떠올랐다. 남편에 대해 말해보니 지금 자혁과 똑같이 대답했었다.
‘이상해요.’
그리고 지금 자혁과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은 자혁에게 집중하려고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어떤 점이 이상해?”
자혁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와 상담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긴 시간을 그냥 보내고 나온 대답은 더 심란했다.
“모르겠어.”
분석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거침없는 구자혁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
지금 혼란스러워하는 자혁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정말 모르겠으니 상담을 와서도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이었다. 정신은 편안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자혁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형.”
요즘 형 소리 자주 하네.
편안하게 웃는 정신과 달리 자혁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다. 정신과 전문의도 긴장하게 할 정도로.
“사람이 웃으면 예뻐 보인다고 했지?”
“그랬지. 어떤 웃음이냐 따라 다르지만. 비웃음이 아니면 다 좋아 보이지.”
알겠다는 듯 자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손은 원래 다 작아?”
전혀 예상 못 했던 말에 정신은 자신의 이름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자혁의 귀가 점점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시 불러세우려 했지만,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쿵 소리와 함께 상담실 문이 닫혔다.
정신은 자혁이 오기 전 상담했던 환자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남자 손은 원래 그렇게 다 커요?’
라고 묻고선 얼굴을 붉히던 다연이.
* * *
직접 만든 집밥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의 집 미니바에 가득 차 있는 위스키가 아닌 한국 맥주가 마시고 싶었고 한국식 라면이 먹고 싶어 병원을 나서자마자 다연은 마트로 향했다.
목에 두른 스카프가 풀어지지 않게 다시 단단히 묶고 다연은 쇼핑 카트를 밀었다.
이것저것 담다 보니 어느새 카트 안이 가득 차 있었다.
“음, 너무 많은가.”
그의 집에서 먹는 거라고는 커피, 물, 위스키가 유일했다. 원래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지 식사는 모두 배달되었다.
다연이 온 이후부터였는지, 아니면 계속 그랬는지 물어보진 않았다.
진짜 안주인처럼 살림을 살피지 않는 점은 편하긴 했지만 한 번씩 직접 만든 음식이 먹고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파전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먹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의 집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지만, 불편한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참기에는 일 년은 긴 시간이었다.
그때, 메시지지 알람음이 울렸다. 음식 사진과 함께 자혁의 짧은 메시지였다.
[둘 중 어느 것이 좋겠어?]
불고기 정식과 생선구이 정식이라… 두 가지 모두 오늘 다연이 먹고 싶은 메뉴는 아니었다.
다연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해.]
오만한 목소리의 그가 심각한 얼굴로 메뉴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다연은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할 말 있어서 전화한 게 아닌가?]
“네, 맞아요.”
늦어지는 대답에 자혁이 되물었다.
“꼭 배달 음식 먹어야 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메뉴가 별로던가? 나름 센스 있는 직원이 고른 건데.]
지난번 메뉴 선정 센스가 없다고 말한 것을 두고두고 꼬집을 줄이야. 은근히 뒤끝 있었다.
“네. 별로예요.”
고분고분 대답해 주기 싫어 다연이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대답했다.
[직원한테 전해주지.]
너무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당황한 쪽은 다연이었다.
농담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인 거야?
“저기, 농담이었어요.”
[알아.]
아, 낚였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지시해둘 테니까.]
그녀가 말만 하면 뭐든 들어 줄 거 같은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내 식사는 알아서 할게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다연이 말을 덧붙였다.
“혼자 식사도 못 챙겨 먹는 아이는 아니니까요.”
[그렇군. 집에서 봐.]
그는 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연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았다.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자혁은 분명 웃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오만한 목소리와 어울리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웃지를 말던가.”
다연은 카트를 계산대로 밀었다.
* * *
주연은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고 있었다. 실내임에도 조금 전 매장에서 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저게 누구야?”
주연의 시선은 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누군가에게 고정되었다.
주연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해서 선글라스를 벗어서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다연?”
주연은 남은 에스컬레이터를 뛰다시피 내려와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가 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여자는 다연이 맞았다.
스카프가 풀어진 목에 분명히 있었다. 붉은색 나비 모양 점이.
주연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 나 한다연 본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