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눈에 힘을 주어서 커진 눈, 조금 빵빵해진 볼.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면 손을 뻗어 부푼 볼을 잡아 보았을지도 모른다.
“시간 좀 내주면 안 되나? 한다연 씨.”
“…….”
“예약을 했어. 나 혼자 2인분을 다 먹을 수는 없잖아.”
다연의 눈에 힘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산채 정식인데.”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자혁을 지나쳐 가며 방으로 가며 다연이 말했다.
“두 시간 뒤요.”
등 뒤로 닫힌 문 너머 자혁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렸다.
두 시간 뒤. 자혁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연은 느긋하게 방에서 나갔다.
피식 웃으며 집을 나서는 자혁을 따라 나갔다.
운전하는 자혁은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힐끔거렸다.
“오늘 메뉴는 어떠신가?”
지난번 센스가 없다고 말한 것이 그의 자존심을 조금 건드려서인지 재차 확인하려 했다.
“단시간에 센스가 좋아졌네요. 따로 비결이라도?”
“센스 있는 직원을 두면 돼.”
어이없을 정도로 구자혁다운 대답이라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벗어난 외곽에 나와서인지 다연은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드문드문 짧은 대화가 오갔고, 자혁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되어 보이는 식당으로 다연을 데리고 갔다.
한옥을 식당으로 개조한 것인지 사각형의 집 중심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그늘막 대신 여러 개의 우산을 펴서 걸어두었다.
유명 화가의 명화가 인쇄된 우산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듯한 이국적인 그림이 그려진 우산도 있었다.
“저 왔어요.”
“어서 와.”
직원의 추천으로 알게 된 거처럼 말하더니 자혁은 식당 주인과 굉장히 친해 보였다.
“진짜 색시 데려왔구먼.”
“처음 뵙겠습니다. 한다연입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손으로 방을 가리켰다.
“저기로 들어가요. 구 사장 지정석이야.”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으로 보이는 창밖으로 초록색 잎사귀가 덮인 담이 보였다.
다연은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은 자혁이 다연을 보며 제법 신중하게 물었다.
“술은 뭐로 시켜 드릴까?”
툭.
무심하게 던지는 한마디에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은 안 마실래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술 안 좋아해요.”
그의 눈썹이 더 올라갔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주 마시는 거 같던데.”
다연이 자혁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내 술이 조금씩 줄어들더라고.”
세심하기는.
“알아. 시차 때문인 거.”
더는 참지 못하고 다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할게요. 유머 센스도 좋아졌다고요.”
“안사람이 좋긴 좋은가 보네. 구 사장 웃는 걸 다 보고 말이야.”
가게에 들어올 때 유난히 친근하게 인사를 하더니 음식을 가져다주던 주인이 한마디 했다.
“진즉 데려오지. 혼자 와서 먹고 갈 때보다 보기 좋네.”
“아주머니께서 데려오라면서요.”
주인의 말에 다연은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단골 가게인 거 같은데 그가 혼자 왔다는 것은 적어도 미미와 오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서류상 아내이긴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여자와 비교 선상에 나란히 있고 싶지는 않았다.
“퇴촌댁 아주머니가 성격은 좀 괴팍하신데. 음식 맛은 좋아.”
정갈한 나물 반찬을 놓아주고 퇴촌댁은 다연의 손을 잡고 한 번 토닥여주었다.
“천천히 많이 들어요.”
다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자혁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다연이 식사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퇴촌댁이 물었다.
“식사 안 해요?”
“잠깐 화장실 좀 가려고요.”
다연은 조금 전 퇴촌댁에게 잡혔던 손을 찬물로 씻어 보았다. 그런데도 한 번 올라 온 발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주치의를 만나봐야 할 거 같았다.
다연은 클러치에서 약을 꺼내 입에 넣고 삼켰다.
화장실을 다녀온 다연은 다시 편안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네. 맛있겠다.”
다연은 지난번 게국지를 먹을 때만큼이나 맛있게 식사했다.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마시며 다연은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차가 필요해요.”
다연이 한국에 온 뒤로 처음 하는 요구였다. 차가 필요하다는 것은 갈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 보내줄게.”
다연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이번도 어린아이 아니라고 할 건가?”
“감시가 아닌 보호라고 해도…… 혼자 다니고 싶어요.”
매번 택시를 이용하기에는 집 앞까지 통과해야 할 보안 문이 불편했다.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등록된 차가 가장 최선이었다.
“운전할 줄 알아?”
“네.”
자혁의 한 마디에 다연은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적당한 거로 준비해주지.”
“고마워요.”
다연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몰래 숨겨둔 남자 만나러 가는 건 아니에요.”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꺼낸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다연은 자신의 입술을 슬쩍 물었다.
“유머 센스는 별로군.”
툭.
다연이 다시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앞서 걷는 자혁의 어깨가 원래 이렇게 든든한 모습이었는가 싶었다.
그의 뒤에 숨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그래서 전신에 하얀색 털이 덮이고 네발 달린 짐승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자혁에게 다가온 개의 꼬리는 기분 좋게 살랑댔다. 그의 뒤에서 걷던 다연을 발견한 개의 꼬리는 모터를 장착한 듯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낯선 사람인데 모른 척 지나가겠지.
하지만 하얀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좋아하기라도 하는지 몸 전체를 흔들며 다연에게 다가왔다.
최대 위기였다.
다연을 숨겨 줄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단단한 어깨를 가진 구자혁밖에 없었다. 다연은 쫓아오는 하얀 개를 피해 자혁의 옷을 잡고 매달았다.
“꺅.”
개는 끈질기게 얼굴을 들이밀고 아는 척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그의 옷깃이 아닌 허리를 잡고 개를 피해 빙빙 돌았다.
그의 몸이 굳어가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은 개를 피하는 것이 먼저였다.
“한다연, 이게 무슨….”
“저 개요. 개 좀 어떻게 해 봐요.”
“안 물어.”
무는지 안 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연은 지금 천진난만하게 예뻐해 달라고 하는 개에게서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의 단단한 허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아도 개는 끈질기게 쫓아왔다.
“아니야. 야아.”
“컹컹.”
다연의 간절한 애원이 들리지 않는지 개는 고리를 더 신나게 흔들었다. 놀자는 게 아닌데.
개가 매달릴수록 다연은 자혁에게 매달렸다.
“하아, 하아.”
먼 거리를 뛴 것도 아니고 자혁의 주변을 빙빙 돈 것뿐인데도 백 미터 달리기를 전력 질주한 것만 같이 다연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자혁의 몸이 더 굳어졌다.
“메리야, 메리야.”
“컹컹.”
개가 짖는 소리에 다연이 더 간절히 매달렸다. 자혁의 몸이 더 굳어졌다.
“메리야, 이리 온. 이쁜 누나 놀란다.”
다연의 비명에 나와 본 퇴촌댁이 개를 불렀다. 개가 멀리 떨어졌는데도 다연은 자혁의 허리를 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갔어요?”
자혁의 목울대가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음.”
다연은 고개를 내밀고 정말 개가 사라졌는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퇴촌댁 앞에 있던 개와 눈이 마주치자 다연은 다시 자혁의 품에 숨었다.
“눈 마주쳤어요.”
“하아, 돌겠군.”
“내 잡고 있을 테니 얼른 색시 데리고 가.”
“네.”
자혁은 아직도 떨고 있는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들었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이었다. 자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차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속도에 맞춰다 보니 다연은 거의 뛰다시피 했다.
차에 타고 조수석 문이 닫히고 나서야 다연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운전석에 앉은 자혁의 얼굴이 너무 무섭게 굳어있어서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벨트 매.”
그 한마디가 그날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정확히는 다연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무서운 얼굴로 운전만 한 자혁은 집에 오자마자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미미야, 나왔어.”
다연에게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거슬렸다.
* * *
집 앞에 세워진 차를 보며 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한 차를 준비해주겠다더니 자혁과 같은 차종에 색상만 다른 차가 떡하니 주차되어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적당히’야……?
다연은 휴대폰을 꺼냈다.
구자혁과 이 실장. 두 개의 연락처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하나를 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해.]
“저예요, 한다연이요.”
[알고 있어.]
“적당한 차가 이거에요?”
자혁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웃음소리에 다연은 그의 표정이 전부 그려졌다.
[이 실장이 그게 적당하다고 했어.]
“진짜예요?”
낮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적당한 차 준비하라고 했고, 그 차를 가져다 놓은 건 이 실장이고. 준비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게 적당한 거겠지.]
저 차를 타고 다니면 어디 가든 눈에 띌 거 같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위장 결혼 취재하는 사람 눈에 이것보다 더 잘 띌 수 없을 거 같았다. 그게 목적이면 100% 성공한 셈이었다.
[어디 나가는 길인가 봐.]
“네.”
[잘 다녀와.]
무심하게 툭.
전화는 끊어졌지만 다연은 귀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 원래 이렇게 안심이 되는 말이었는가 싶었다.
“네, 다녀올게요.”
* * *
정신은 안식년인 은사를 대신해 자신에게 넘어온 환자의 기록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큰 눈을 굴리며 상담실 안을 살펴보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정신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환자를 바라보았다.
“안내받으셨듯이 진 교수님은 이번이 안식년이라 부득이하게 상담을 맡게 된 제정신입니다.”
“……네.”
마지막 상담을 했던 날짜는 2년 전이었다.
타인과 피부 접촉만으로 자가 면역이 과잉 반응하여 발진이 올라오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런 경우 가족 같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한 사람에게는 괜찮았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환자는 자신 외에 모든 사람에게 발진이 올라왔다.
“한다연 씨, 2년 만에 오셨네요.”
면역치료가 아닌 정신과 상담을 꾸준히 했던 것을 보니 심리적인 것이 원인인 듯했다.
발진이 시작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환자의 기록을 보며 정신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포르 형성이 힘든 환자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