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탐색하듯 다연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예민해졌다.
“아주 온 건 아닐 테고, 얼마나 있다가 가는 거야? 짐은 어디에 풀었어? 그 인간들, 너 온 거 아니?”
원하는 걸 얻고 난 뒤 지혜는 개인적인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배…….”
다연이 주변을 살펴보자 지혜가 아차 싶은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비어 있는 미팅룸이 없어서 휴게실에 있다는 걸 잠시 깜박한 거 같았다.
“잠깐, 기다려. 우리 나가자.”
“아직 퇴근 시간 전인데요?”
“누가 퇴근이래? 이경주 작가님이랑 미팅 중인 거야, 나.”
너스레를 떠는 지혜를 보며 다연이 피식 웃었다.
지혜는 단골 포장마차로 다연을 데리고 갔다.
“먹고 싶은 게 여기 꼼장어라니.”
“선배도 외국 갔다 오면 여기 꼼장어가 가장 생각난다면서요.”
“어. 그래, 인정.”
지혜는 싱긋 웃었다.
다연은 꼼장어를 하나 입에 넣고 양손을 흔들었다.
“음! 이 맛이야.”
“이게 들어가야 완벽하지.”
지혜는 유리잔에 소주를 채워 다연에게 건네주었다.
“무사 귀환 환영한다.”
“고마워요, 선배.”
다연의 잔과 지혜의 잔이 쨍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원샷을 하고 빈 잔을 내려놓은 다연은 꼼장어 하나를 입에 넣고 다시 한번 행복해했다.
“왜 갑자기 오게 된 거야? 혹시 그 인간들이랑 연관 있니?”
“아니에요. 그쪽이랑은 완전히 연락 끊어졌어요.”
다연의 말에도 지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쉽게 포기할 인간들이 아니었으니 그러지.”
다연이 출국하기 전 지혜의 집에 며칠 신세를 졌었다. 다연의 행방을 쫓던 새엄마와 주연에게 시달린 지혜는 그들의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남편 집이요.”
“그 어마무시한 남편?”
다연의 남편 이야기에 지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연이 출국해야겠다고 한 지 하루 만에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해준 엄청난 능력자였다.
다연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결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 어마무시한 남편이 한강 기업 구자혁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함하는 줄 알았었다.
“이번에 귀국한 게 혹시 남편이 불러들인 거니?”
다연이 우동 면을 호로록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어마무시한 남편이었어.”
다연이 피식 웃었다.
“나름 귀여운 면도 있기도 해요.”
“누가? 구자혁 사장이?”
지혜가 올해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믿기 힘든 말이었다.
“은근 승부욕을 자극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있어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다.”
“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주 잠깐이요. 대부분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일 수도 있을 거 같은 얼굴이고요.”
“알 만하다.”
지혜는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왜 오라고 한 거래?”
다연은 잠시 생각했다. 자혁이 왜 자신에게 귀국을 종용했는지.
“그 사람 아내로 해야 할 일 하라고 불렀겠죠.”
“아, 알겠다. 대외적인 자리에 나가 남편 옆에 서서 웃는 일 같은 거?”
다연인 피식 웃었다.
“인형 놀이에 끌려다니려면 당분간 피곤하겠다. 그런데…… 그것만 하면 돼? 설마 2세를 낳으라던가, 그런 건 없어?”
지혜도 다연의 병을 알고 있었다. 반가워 한번 안아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지혜는 꾹 참았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2세를 강요하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 건 없었어요. 다만…….”
지혜의 눈이 슬쩍 커졌다.
“놀아 달래요.”
지혜의 기가 막힌 웃음소리가 포장마차 안에 크게 울렸다.
“무슨 애도 아니고, 놀아 줄 사람 하나 없어서 불렀을까.”
“진짠데…….”
다연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실없는 소리는 됐고. 그동안 너 외국에 있어서 제안을 못 했었는데…… 온라인 클래스 한번 해 볼래?”
“온라인 클래스요?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는 다연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말 그대로 온라인으로 강의하는 거야. 테마를 잡아서 10회기 정도로 하는 짧은 수업이야.”
“실시간이에요?”
“아니, 사전 녹화야. 편집해서 10분 이상 넘지 않도록.”
다연은 고민되었다. 아무리 온라인이라 해도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부담스러웠다.
다연의 마음을 아는지 지혜가 말했다.
“얼굴 노출되는 게 부담스러우면 손과 그림 그리는 화면만 나와도 돼.”
“그렇게도 가능해요?”
“그럼.”
지혜는 휴대폰을 켜서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집에서 취미로 할 만한 것들을 기간을 정해서 수강하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야. 여기 댕이 작가님 캐릭터 그리기 강의 이번에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이 수업도 손이랑 그림 그리는 화면만 나와.”
지혜는 고객이 제안하는 메일 중 하나를 열어서 다연에게 보여 주었다.
[이경주 작가님 강의 계획은 없나요? 작가님 그림이 넘 예뻐서 전시리즈 소장 중. 일러 책도 좋지만, 작가님 강의도 듣고 싶어요. 소통하고 싶은 팬심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젭알.]
애교 섞인 말 뒤에는 이모티콘도 여러 개 있었다.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연은 선뜻 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예전에 미술학원 강사 경력도 있잖아.”
“그게 언제 적인데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잠깐 한 거고요. 전문 강사도 아니었어요.”
“네가 그리는 대로 설명하면 돼. 사전 녹화하고 편집하면 되니까, 부담스럽진 않을 거야.”
다연은 결국 생각해 보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연이 한국에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던 지혜는 제주도 여행 일러스트집을 내자는 것부터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다연은 그 무엇도 선뜻 하겠다고 말할 수 없어서 웃으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 * *
다연이 한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집에 혼자 있게 되었다. 익숙해야 할 집이 뭔가 어색했다.
자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아무도 없는 빈집이 정상이었다. 고작 며칠 다연이 마중 나왔다고 그 작은 소란에 적응되었는가 보다.
그녀가 집에 있을 때는 사분사분 걷는 작은 소음조차 신경 쓰이더니. 지금은 집에 흐르는 정적이 어색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자혁은 거실 한쪽에 있는 미니 바로 향했다.
지난번 다연에게 주었던 술병을 들었다.
가벼워진 중량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것도 조금씩 술이 줄어든 것이 보였다.
문득 막걸리 사발을 양손에 받쳐 들고 혀로 입술을 축이던 다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 게 예뻐 보이는 건 당연한 거라고 했으니…….”
지금 떠오른 다연의 모습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도 당연한 거다.
자혁이 컵을 흔들 때마다 얼음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 * *
일하는 장소가 회사에서 집으로 바뀐 것일 뿐 주말에도 구자혁이 일에 파묻혀 사는 건 똑같아 보였다.
매일 아침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을 보는 자혁은 다연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를 닮아 스모크한 맛이 짙은 커피도 제법 익숙해졌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자혁이 통화하는 미미의 존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동사만 툭 던지는 말도 아니었고, 정확한 문장으로 된 말이었다.
‘미미랑 데이트는 언제 해?’
‘회사에 있을 때 만나는 사람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혁은 출근할 때 혹은 귀가 후에 미미에게 꼭 보고했었다.
‘외국에 있나?’
어느새 다연에게는 자혁보다 미미가 가장 의문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말해 봐.”
본인은 알까?
주어 또는 목적어 빼고 저렇게 말하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다연의 눈썹에 날이 섰다.
“아까는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더니, 지금은… 왜 짜증 내는 거 같지?”
자혁은 몸을 돌려 다연과 눈을 맞추었다.
저 오만한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갑자기 툭, 말해 봐. 이러면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라디오처럼 혼자 떠들며 놀아줘야 하는 건지. 속으로 생각한 걸 필터링 없이 말해야 하는 건지 말이에요.”
자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필터링 빼고 해봐.”
“주어를 넣고는 말 못 하는 사람인가 봐.”
“짜증 나는 게 그거였나?”
“네.”
대답을 듣고서도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정도라 다연은 김이 좀 새긴 했다.
말하라고 해서 한 것뿐인데.
자혁은 아직 들어야 할 대답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다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짙고 깊은 눈매에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직 말 안 했어.”
말하면 뭐 해 참고해 줄 것도 아니면서.
“당신이 궁금해하던 거 필터링 없이 말해 보라고.”
태생이 오만한 사람이고 메뉴 선정하는 센스는 없지만, 구자혁은 제법 쓸 만한 추진력과 융통성이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겠다.
다연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려 했다.
약간의 필터링을 하고서.
“회사 일 외에 만나는 사람은 없어요?”
자혁의 이마가 심하게 구겨졌다.
“정확하게 어떤 사람을 얘기하는 거지?”
“사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요……. 연애…… 같은 거요.”
자혁은 급기야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잡고 있었다.
괜히 물어봤나?
곤란한 질문을 한 거 같아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아, 한다연.”
골치 아픈 듯 자혁은 여전히 미간을 잡은 채 서늘한 목소리로 다연을 불렀다.
“……네?”
“우리가 서로를 모르긴 해도 엄연히 결혼한 사람한테 연애하냐고 물어보는 건 실례 아닌가?”
계약서가 오간 사이에서 물어볼 말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필터링 없이 말하라는 자혁의 말을 믿은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나마 조금 걸러서 미미는 언제 만나는지 물어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미안해요.”
“하아.”
자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고 자혁이 무심하게 말했다.
“식사는 나가서 하지.”
“…….”자혁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뒤에 내려올게.”
“…….”
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자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해… 아니. 어떤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다.
특히, 너. 너. 너!
이번에야말로 다연은 거르지 않은 날것 그대로 말하고 싶었다.
“매번 일방적인 통보. 별로예요.”
“그리고?”
“시간이 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잖아요.”
자혁이 왼손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시간 돼?”
“아니요. 시간 안 돼요.”
자혁이 피식 웃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다연과 훈련을 위한 대화를 할 때와는 달랐다. 더 생생하면서도 다양한 감정이 오가고 있었다.
단순히 화가 났다는 것으로 말하기에는 지금 다연은 뭔가 달랐다.
골을 낸다는 게 지금과 같은 모습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