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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76)

6화

지금도 자신이 왜 집에 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하면서 긴장했다. 손에 들고 있는 커피 한 모금도 못 마시면서 밤에 주는 술은 잘도 마셨다.

“아무도 안 만나요?”

오늘 같은 주말 왜 만나는 사람이 없냐는 타박 같은 질문이었다.

“만나는 사람은 평일에도 차고 넘쳐.”

원하는 대답이 아닌지 입술을 삐죽인다. 표정이 다 보이니 안 보일 때와 다른 부분이 신경이 쓰였다.

표정 하나하나 모른 척하기 힘들다는 것.

자혁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얘기 좀 할까?”

다연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자혁과 나란히 앉았다.

“한국에 왔다고 연락은 했나 싶어서.”

“아…… 아니요.”

자혁은 예상한 얼굴이었다.

“앞으로도 연락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전에도 다연은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다고 했었다. 비록 이 실장을 통해 전해 들은 말이었지만 자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다연은 자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실장을 통해서 들었지만, 전에도 자혁은 지금처럼 말했었다.

다연이 급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을 때 그는 이유를 묻지 않고 해결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을 때 이 실장은 자혁이 전하라던 말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들어도 다연에게 신뢰를 주는 말이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도 다연은 일 년 동안 한국에 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정확히 어떤 거죠?”

“내 아내로서 대외적인 것들.”

지난번 이 실장이 데리고 간 샵에서 치장을 하고 자혁의 옆에서, 혹은 자혁의 아내로 참석해서 예쁘게 웃는 그런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다른 게 또 있나요?”

다연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

“하루에 한 시간씩 나와 대화를 해줘.”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이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계약서에 언급된 아내로서 최소한의 도움을 요청할 시 협조한다. 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두지.”

비밀 유지 조항이 있던 그 계약서에 그 애매한 문구를 그가 이렇게 이용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자혁의 저 말은 마치 놀아달라는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통화하는 미미는 어디에다 두고 자신에게 놀아달라는 건지.

“대화…… 대화라…….”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어. 당신 외국에 지내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아.”

정말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한 건가?

“그거 알아요? 같이 놀 사람 없어서 놀아달라고 부른 거 같아요.”

자혁이 피식 웃었다.

훈련 파트너라는 단어를 쓸 수 없어서 돌려서 말했더니 졸지에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이 취급이었다.

이렇게 불시에 사람을 웃게 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자혁이 다시 한번 오른손을 내밀었다.

“같이. 잘. 놀아보자고.”

* * *

낯선 남편과 한집에 사는 건 걱정했던 것보다 별일 아니었다.

자혁은 주5일을 회사에 출근하는 직급이 높은 직장인이었다.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는 다연과는 생활 패턴부터가 달랐다.

숫자와 그래프가 난무한 재무제표와 결재 서류에 파묻혀 사는 자혁은 다연이 보기에도 사는 재미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짙은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보이는 이유는 깊은 눈매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인의 사인 하나에 기업 수익이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막상 그의 시선을 마주할 때면 다연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개인적인 질문을 해올 때는 더 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린 거지?”

“……음.”

다연은 무엇 하나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없었다. 숨기려 했고 애매한 단어로 피해 가려 했다.

자혁은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닌 고민을 하는 다연을 보며 자신이 한 질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생각했다.

“어려운 질문인가?”

“그것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질문으로 피해 가려 했다.

“나한테 날아온 사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다연은 그의 사무실에서 보았던 사진을 떠올려 보았다.

돌아가신 구 회장에게는 말했었지만, 굳이 자혁에게도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연은 적당한 말을 찾아서 대답했다.

“시작은 먹고 살려고요.”

자혁으로선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충분한 생활비가 입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알고 있어요.”

다연의 표정, 움직임 하나하나 뜯어보는 자혁의 시선을 피하며 다연이 말했다.

“언제까지 구자혁 씨한테 의지한 채 살 수는 없잖아요.”

다연은 일 년 뒤에 예정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 저 내일은 저녁 약속 있어요.”

다연이 한국에 온 지 열흘만의 외출이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이 실장한테 말해두지.”

다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자혁은 자신이 느낌을 믿어 보기로 했다.

“말해 봐.”

“무엇을…요?”

“마음에 안 드는 거.”

다연은 내리뜬 눈을 들어 자혁과 눈을 맞추었다.

뭐든 말해보라는 듯. 자혁은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하면 참고해줄 건가요?”

자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나 어린아이 아니에요. 혼자 자유롭게 다니던 사람이고요.”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

“혼자 충분히 다닐 수 있다고요. 나를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자혁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순간 표정이 굳는 자혁을 보며 다연은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 실장 대신 택시 보내줄게.”

“…….”

“그리고 감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보호라면 모를까.”

어렵게 꺼낸 것이 무색하게 자혁은 쉽게 정리해주었다.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짙은 눈이 다연을 뚫어져다 응시하고 있었다.

솜털이 이는 것 같은 김장감이 다시 다연을 휩쌌다.

먼저 시선을 피한 자혁이 무심하게 툭 말했다.

“이 정도로 뭘. 태안반도에 있는 식당에 가는 것보다는 쉬운 일 아닌가.”

팽팽했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날은 미안했어요.”

다연이 웃음을 참으며 겨우 말했다.

“새로운 음식을 접할 기회를 줘서 고맙게 생각해.”

다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푹 찌르면 터질 것 같았다.

자혁은 이번에도 자신이 느낌 그대로를 믿어 보기로 했다.

“편히 웃지.”

다연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웃을수록 자혁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오늘은 이만하지.”

자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다연의 웃음도 뚝 멈췄다. 자혁의 굳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화난 거처럼 보이지?”

그가 먼저 편하게 웃으라고 해놓고선. 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다연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는 자혁의 트레이닝 파트너였다. 하루에 한 시간씩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자혁은 표정을 읽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야 했다.

정신은 안락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혁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훈련법이 매우 힘들었는지 자혁은 평소보다 더 피곤한 모습이었다.

“대화하는 게 힘들었어?”

자혁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 고개만 옆으로 슬쩍 돌렸다.

대화가 힘들지 않았다면 회사 쪽이 힘들게 한 것이 분명했다.

자혁이 작은 약점을 보이면 이때다 하고 물어뜯는 작은아버지가 아직 회사에 있었다.

구 회장이 돌아가신 후 아직 회장 자리가 공석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로 자혁의 약점을 잡으려 했을지 걱정되었다.

정신은 인내심 있게 자혁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자혁이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자기감정을 숨기려고 해?”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부분 약점을 보이지 않고 싶어서 감추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

자혁은 어제 다연과 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림을 언제부터 그렸는지 대답해 주는 게 다연의 약점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던 자혁이라 수긍이 되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소리 내 웃던 다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보일 일인가 싶었다.

“사람이 웃으면 어때 보여?”

“웃으면…… 이라…….”

뜬금없는 질문에 정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좋아 보이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같이 웃고 싶어지기도 해?”

“당연하지. 괜히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거나 볼을 한번 만져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예뻐 보이지.”

“그렇구나…… 그렇단 말이지.”

자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다연이 예뻐 보이는 건 웃는 사람을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 *

다연은 여행 일러스트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와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 작업한 것을 직접 가지고 나가겠다고 하니 전화기 너머로 괴성이 흘러나왔었다.

담당자이자 학교 선배인 지혜가 드디어 한국에 온 것이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막상 얼굴을 본 지혜는 지난 2년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사람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내년쯤에 한 번 들어왔다 갈 거라더니.”

“어쩌다 일 년 빨리 오게 됐어요. 이번에 작업한 거예요.”

다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림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오! 매번 국제 우편으로 받다가 이렇게 직접 받으니 느낌이 또 다른데?”

지혜는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 든 것을 꺼내서 한 장씩 넘겨 보았다.

다섯 번째인데도 다연은 어떤 평가가 나올지 조금 두려웠다.

지혜는 날카롭게 마지막 그림까지 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다연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좋은데.”

그제야 다연은 안도의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전 것보다 더 좋아. 유명 도시는 사진으로도 많이 보잖아. 친근한 곳을 일러스트로 보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자칫 식상할 수 있거든. 외곽지역은 아무리 여행이라 해도 쉽게 가 볼 수 없는 곳이 많으니까.”

“다행이다.”

이번 컨셉을 미리 지혜와 상의를 해두긴 했어도 작업한 그림은 오늘 처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미 보증된 작가가 떨긴.”

“매번 떨리는걸요.”

지혜는 다시 한번 그림들 넘겨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컬러링북도 같이 내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아마 두 가지 버전으로 출간될 거야.”

“그것도 좋겠네요.”

“반응 좋으면 예전 출간한 것 중에 선별해서 컬러링북으로 내 볼 생각이야. 수채화로 채색할 수 있도록. 비싼 종이 쓰겠지만.”

지혜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다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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