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6)
  • 5화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다연은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만 간신히 앞으로 걸을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다연은 자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긴 다리를 꼬아 앉아서 비스듬히 다연을 바라보던 그는 다연이 앉자마자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봐.”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개떡같이 물어도 다들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하는 사람만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매번 주어는 물론 목적어조차 빼먹는지 모르겠다.

    명령도 뭘 알아들어야 소용 있는 게 아닌가?

    “무엇을요?”

    “마음에 안 드는 거 말해보라고.”

    “그런 거 없어요.”

    그걸 믿으라고?

    “믿음이 안 가.”

    다연은 앞에 채워진 물을 마셨다. 그의 앞에서는 물도 편하게 넘길 수 없었다.

    “취향이 아닌가?”

    진짜 거슬리는 화법이다.

    “식당, 옷, 헤어스타일 등등 어떤 게 마음에 안 드느냐고.”

    다.

    특히, 당신.

    “말하면 참고해줄 건가요?”

    뭐든 말해보라는 듯. 네가 어떤 것을 말해도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라는 걸 과시하듯 자혁이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무엇을 얘기해야 저 남자 얼굴이 좀 일그러질까.

    “한 가지 말하자면.”

    붉게 빛나는 입술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되었다.

    “메뉴 선정에 굉장히 센스가 없으시네요.”

    별 다섯 개 받은 스테이크가?

    자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는?”

    “외국에 오래 있다가 귀국한 사람이 먹고 싶은 음식이 고작 스테이크일까요? 참고로 전 오리지널 한국 사람이고요.”

    자혁이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웃어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자혁이 웃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의 웃음에 가장 놀란 사람은 홀 매니저였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다들 굳어 있었다.

    자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지.”

    “어디를요?”

    “한국 오면 먹고 싶었던 거 먹으러 가자고.”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더 물어보지 않고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사진 찍히려고 여기 고른 거 아니었어요?”

    “그 사람 사정까지 우리가 고려할 필요는 없어.”

    대기하고 있던 이 실장을 보내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자혁은 다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디든 찍어 봐.”

    “정말 괜찮겠어요?”

    따라 나오긴 했어도 막상 그와 함께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한 번씩 먹고 싶었던 음식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에서 먹던 맛은 아니어도 비슷한 맛을 내는 재료를 구해 그때그때 해 먹었던 음식이 아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다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식당 이름을 꾹꾹 눌러 검색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자혁에게 건네주었다.

    본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시죠? 구자혁 씨.

    휴대폰을 건네받고 상호를 보았을 때 세상에 저런 이름을 가진 식당이 있겠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없는 곳이라면 검색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주소가 서울 혹은 가까운 경기도가 아니었다. 충청남도로 시작하는 주소를 보며 자혁은 다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거였어?

    자혁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짓궂은 장난을 하면서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숙녀가 원하니 응해 주는 수밖에.

    자혁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 * *

    두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가게의 간판을 보고 자혁은 실소를 터트렸다.

    샛노란 색 바탕에 빨간색 고딕체로 쓰인 간판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상호였다.

    [게 먹으러 왔는가]

    차가 멈추자마자 서둘러 내린 다연은 아직 차 안에 있는 자혁을 향해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신났네.”

    그래, 분명히 신난 게 맞아.

    자혁은 선명하게 보이는 다연의 표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식당에는 주재료인 ‘게’를 넣은 요리가 여러 가지 있었다.

    다연은 그 많은 것 중 자혁이 한 번도 먹어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음식을 주문했다.

    “게국지 주세요. 막걸리도요.”

    반주로 곁일 술까지 빼먹지 않고 주문한 다연은 양손을 비비며 신나 있었다.

    “술 참 좋아해.”

    고작 두 번뿐이라고 말하려다 그를 직접 만난 이틀 내내 다연이 술을 마시려 한다는 것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내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려고 하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다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맞아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고 광명 찾는 편이 소화가 잘될 거 같았다.

    “지금은 다른가?”

    “지금은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정말 먹고 싶은 거였나 보네.”

    “네. 그리고 엄청나게 배고파요.”

    이렇게 끌려 나올 줄 모르고 점심을 아주 간단히 먹었다.

    샵과 라운지 레스토랑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연은 먹은 것이 없었다.

    수저를 챙기는 손에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고.”

    어제도 그의 사무실로 갔을 때도 들었던 거 같았다.

    언제 봤다고 성격이 급하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기다리던 음식이 항상 가득 차려지고 있었다.

    휴대용 버너에 냄비가 나온 것으로 주인은 맛있게 먹으라고 말을 하고 주방으로 다시 사라졌다.

    다연은 젓가락을 들고 무엇부터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눈치 보지 말고 편히 들어.”

    다연은 간장게장을 시작으로 정신없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자혁이 막걸리를 들자 다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발을 손에 들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다연의 시선은 주전자 입구에 향해 있었다.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었다.

    “그냥 별 다섯 스테이크 먹었으면 울 뻔했네.”

    “센스는 부족했어도 제법 괜찮은 추진력과 융통성을 가졌다고 첨부할게요.”

    다연은 자혁이 채워준 사발을 한 번 들어 보이고 세 모금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자혁 앞에 놓인 빈 그릇에 잘 끓여진 게국지를 덜어주려고 국자를 든 다연의 손을 주인이 잡았다.

    “멀어서 제가 해드릴게요.”

    친절한 호의에 다연의 얼굴이 굳었다. 다급히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 다연은 뭔가 불편한 듯 손을 문질렀다.

    주인이 게국지를 덜어주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자 다연은 애써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발진이 올라온 손이 자혁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드세요.”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더니 그다음부터는 쉬지 않고 먹고 있는 다연을 보며 자혁도 숟가락을 들었다.

    꽃게탕도 아니고 김치찌개라고 할 수도 없는 요리 같은데 오묘한 맛이 났다.

    깔끔하고 깊은 맛이었다.

    무채색이던 자혁의 세상에 어느 날 툭 알록달록한 빛을 던져 놓은 한다연을 닮은 거 같기도 했다.

    어젯밤 다연에게 준 위스키는 독한 것이었다. 정답이 아니라고 했지만 독한 것이 필요해 보였다. 마시면 아무 생각 없이 푹 잠들 수 있는 것을 마시고도 다연은 괜찮았었다.

    그에 반해 지금 반주로 마신 막걸리 두 사발에 비틀거렸다.

    혼자 걸을 수 있다며 앞서 걷는 다연의 뒤로 자혁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따라 걸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차가 있는 곳까지 잘 간다 싶더니 갑자기 다연이 휙 돌아보았다.

    “우리 저기에 가 보면 안 돼요?”

    자혁은 다연이 가리키는 바다를 슬쩍 보았다.

    발그레해진 다연의 볼이 가로등 불빛에 더 붉게 보였다.

    뭘 또 그렇게 간절하게 보나.

    자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다연이 배시시 웃는다.

    밤바다는 파도 소리조차 고요했다. 바다에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거 같던 다연은 의외로 차 안에 얌전히 앉아서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다.

    “안 나가봐도 괜찮겠어?”

    다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일찍도 물어본다.

    다연이 몸을 완전히 돌려서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 나였어요?”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는 넌.”

    함축적인 물음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서로의 이름보다 가장 궁금했었던 것이었다.

    왜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겠다고 했는지. 그리고 왜 하필 서로였는지.

    자혁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다연의 시선은 바다에 고정되었다. 반쯤 올린 창문으로 자혁의 얼굴이 비쳤다.

    “흠이 있는 남자라서요.”

    자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묘하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내가 먼저 물었는데…….”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다연의 목소리가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다연의 가슴이 일정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흠이 있는 여자라서.”

    자혁의 시선이 발진이 올라와 빨개진 손에 머물렀다.

    * * *

    무거운 눈을 떠서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한참 생각해 보았다. 고작 하루였어도 자혁의 집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바다를 본 거 같은데 그다음 기억이 없었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경계 없이 풀어진 자신이 기가 막혔다.

    처음 입었을 때는 불편하기만 했던 옷을 입고 편안하게 잠을 잔 것도.

    불편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에 한 번씩 어리는 장난기를 보면 이상하게 도전하고 싶어진다. 당황하면서도 반짝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

    깊고 짙은 눈이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주방으로 나오니 어제와 똑같이 자혁은 태블릿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말끔하게 슈트를 입은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니트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도 일요일은 쉬는구나 싶었다.

    “두통은?”

    무심히 툭.

    “없어요.”

    “다행이군.”

    다연은 자혁을 지나쳐 어제 그가 직접 보여 준 대로 컵을 꺼내어 커피머신 위에 올려두고 버튼을 꾹 눌렀다.

    “오늘은 일없어요?”

    “직원들도 쉬어야지.”

    일하고 싶어 죽겠는데 직원들 쉬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회사를 안 가는 오늘 아침저녁으로 다정하게 통화하는 미미를 만나러 가는 날이 아니었나?

    “주말에는 거의 집에 있어. 어제는 급한 일 때문에 나간 거야.”

    그렇다면 미미가 이 집으로 오는 건가?

    다연은 자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자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한 번씩 커피를 마시면서.

    “집에 올 사람 없어.”

    안 물어봤는데요.

    “편히 있으라는 소리야.”

    참 이상한 여자였다. 늦은 밤에는 아무런 경계로 하지 않았다. 게다가 편하게 술까지 달라고 하면서 아침이 되면 긴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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