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6)
  • 4화

    꿈을 꾸었다.

    유난히 긴장을 많이 한 날이면 다연은 어김없이 꿈에 시달렸다.

    앙칼진 목소리가 다연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집안 망신시킬 뻔했어. 알아?’

    ‘너 얼굴을 봐. 그 불치병 가지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되겠니?’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부친의 목소리도 들렸다.

    ‘남의 집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 흠 있는 놈이나 어디로 치울지 걱정해.’

    괴로움에 몸을 뒤척이다 다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눈을 몇 번 껌벅여 보아도 낯선 곳이었다.

    12시가 지났으니 어제라고 해야 하나. 어제 처음 보았던 남편의 집이라는 걸 다연은 자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사람이 손목을 잡았었던 거 같은데.

    짧게 잡았다 놓았지만, 악수도 했었다. 맨살과 맨살이 닿았었다.

    다연은 자혁에게 잡았던 왼쪽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발진이 없었다.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운 쪽에 더 가까웠다.

    십 년이 넘도록 다연을 괴롭혀 오던 병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고 고칠 방법도 없었다. 발진이 올라올 때마다 약을 먹는 것 외에는.

    그가 내민 손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돌아가는 길에 약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었다. 발진도 가려움증도 없었으니까.

    목이 말랐다.

    다연은 몸에 밴 소리 없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자혁이 2층 계단을 내려오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연을 보았음에도 그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하지.”

    그에게 있을 거라 상상조차 못 한 다정한 말투였다.

    아, 숨겨둔 여자가 있다고 했었던가.

    다연은 남편에 관해 들었던 소문 중 하나를 떠올리며 물을 마셨다.

    연인에게 다정하게 인사하는 자혁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굿 나잇.”

    귀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꾹 찔러넣고 자혁은 그대로 남은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 같았다. 자연스러웠고 선이 굵었다.

    자혁이 스치고 지나가며 일으킨 미세한 바람에 짙은 우드 향이 스며 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 때문이었을까.

    다연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혹시…… 술 있어요?”

    물을 마시던 자혁이 정지 화면처럼 멈춰서 다연을 바라보았다.

    달라졌다.

    사무실에서 떨던 모습은 완벽히 사라졌고 오랜 친구에게 술 한잔하자고 말하듯 다연은 편안해 보였다.

    대낮이었고 문밖에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에서는 자신이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도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긴장하더니.

    늦은 밤, 서류상 남편이라곤 하지만 낯선 남자와 단둘이 한집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경계하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겁도 없이 술이라…….

    “이리로 와.”

    자혁은 거실 반대편 쪽으로 앞서 걸었다.

    정원이 잘 보이는 곳에 미니바가 있었다. 다연이 아는 술도 보였고 처음 보는 술도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얼음을 꺼내어 유리잔에 넣었다.

    깊은 밤은 얼음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청명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렸다.

    그리고 자혁의 말문도 열게 했다.

    “술이 필요한 이유.”

    “네?”

    “잠이 안 와서인가 아니면 잊고 싶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추억하고 싶은 일?”

    어느 유명한 소믈리에가 음식이 아닌 고객의 기분에 따라 와인을 권한다고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소믈리에나 바텐더 일을 해봤을 리는 없을 테고, 집 안 한쪽에 미니바를 둘 정도로 여러 종류의 술을 즐기는 것은 알겠다.

    유리잔에 얼음을 넣은 것이면 위스키를 줄 게 아니었나?

    “대답에 따라 술이 달라지나요?”

    “아니.”

    그는 다연이 알지 못하는 술병을 꺼내 들었다.

    “내가 마시고 싶은 걸 주거나 손에 잡히는 걸 주겠지.”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예요?”

    자혁은 호박색 액체를 유리잔에 따르며 희미하게 웃었다.

    분명, 그가 웃었다.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다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거 같아서.”

    자혁은 다연이 앉은 쪽으로 술을 밀어주고 술잔을 들어 보였다.

    짙은 눈이 다연을 응시했다.

    “정답이길 바라며.”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작은 솜털까지 그에게 반응했다. 겨우 일정한 속도로 뛰던 심장이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정정해야겠다. 구자혁은 절대 편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밀어준 술잔을 든 다연의 하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답이 아니에요.”

    다연이 웃었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시차 때문이었어요.”

    다연은 술잔을 꼭 잡고 자신이 머물기로 한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뒤, 자혁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렸다.

    * * *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던 다연의 표정이었다.

    드디어 자신을 골탕 먹였다는 통쾌함이 얼굴에 보였다.

    술을 주면서 정답이길 바란다는 말밖에 한 게 없는데 편안해 보이던 한다연이 다시 떨고 있었다.

    자신이 뭐 했다고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술 있냐고 물어서 직접 잔에 얼음 채워 부어주기까지 했는데. 숙취가 없는 것으로 심사숙고해서 골랐건만.

    그녀가 다시 떨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당신의 모든 표정이 보인다는 거야. 미숙하게 숨기려고 하는 것도 말이야.’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의 새끼손가락은 떨고 있었으면서.

    “떨지나 말던가.”

    자혁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안녕, 미미. 잘 잤어?”

    * * *

    드레스룸에 걸려있는 옷들이 모두 구자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런 옷을 입고 물이라도 마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하나같이 불편해 보였다.

    구자혁스러운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며 다연은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전체에 은은한 우드 향이 배 있었다. 구자혁이 지나갈 때 코끝을 스치던 향과 같은 것이었다.

    집 안 곳곳 그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다연은 조금 불편하게 샤워를 했다.

    다연은 캐리어를 열어 자신을 닮은 무채색의 옷을 꺼내 입었다.

    주방으로 가니 자혁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을 들고 아침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있었다.

    아깝다, 신문이었다면 진짜 그림이었을 텐데.

    “잘 잤나 봐.”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하는 말은 혼잣말인지 아니면 대답을 바라는 말인지 헷갈리는 어조였다.

    다연이 아랫입술을 습관처럼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들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넘어가긴 싫었다.

    “덕분에요.”

    “다행이군.”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의자에서 일어나 다연이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왔다. 욕실, 아니 집 안 가득 베어져 있는 은은한 우드 향이 갑자기 짙게 느껴졌다.

    다연에게로 손을 뻗는가 싶어서 몸이 긴장했다. 하지만 자혁은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컵을 하나 꺼내 들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혁은 컵을 커피머신 위에 올려두고 무심하게 버튼 하나를 꾹 눌렀다.

    “커피 필요했던 거 아닌가?”

    “……맞아요.”

    조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피가 추출될 동안 자혁은 다시 자신이 있던 자리로 가서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우드 향이 은은하게 옅어지더니 대신 커피 향이 진해졌다.

    무심하게 툭.

    “내 취향이야.”

    어떤 게?

    다연이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드레스룸에 가득 있던 옷 말고 자신이 꺼내 입은 옷이? 아니면 욕실 가득 차 있던,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우드 향이?

    다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꾸 그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대화법이 짜증이 밀려왔다.

    “원두가.”

    “아…….”

    작은 탄성과 함께 민망함이 몰려왔다.

    “괜찮아요. 커피 원두 따져가며 마시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괜찮다 한마디만 할걸.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말이 길어졌다.

    “다행이군.”

    그는 여전히 눈썹에 슬쩍 힘을 주고 태블릿 기사를 보고 있었다. 다연은 커피가 담긴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태블릿을 내려놓은 자혁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 컵을 개수대에 내려놓았다. 아직 컵을 든 채 서 있는 다연을 보며 이번에도 그는 툭 던졌다.

    “숨 쉬어.”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다연은 자신이 숨을 참고 있는 것을 인지했다.

    다연이 낮게 숨을 쉬는 것을 보며 자혁은 왼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넣으며 뒤돌아섰다.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그는 어젯밤 들었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

    “……!”

    “미미야.”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다연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게 저렇게 인사를 할 리가 없는 사람인데 다정한 목소리에 착각할 뻔했다.

    다연이 아니라 미미에게 하는 인사라는 것을 그는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니 작은 착각도 하지 말라는 듯.

    애인에게 일과를 보고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인간적이었다. 그도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스모키한 향이 입 안 가득 넘어 온몸에 퍼지는 거 같았다.

    커피마저 구자혁을 닮았다.

    * * *

    이 실장이 다연을 데리러 집에 온 것은 점심이 한참 지나서였다.

    “저녁 식사요?”

    “네.”

    서재에 있던 책 한 권을 꺼내어 반쯤 읽던 중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책을 더 읽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다연은 자신이 왜 한국에 왔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연은 책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가죠.”

    대답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실장은 구자혁을 꼭 닮은 옷을 꺼내 들고 다연을 샵으로 안내했다.

    밥 한번 먹는 데 유난 떨기는.

    어차피 협조하기로 한 거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다연은 자꾸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인형 놀이는 미미 데리고 하지 왜 자신과 하려는지.

    미용실을 찾아가는 것이 힘들어 그냥 길게 기른 머리가 허리에 닿았다.

    전문가가 손을 대니 자연스러운 컬의 웨이브 진 머리가 탐스럽게 변했다.

    거울에 비친 다연의 모습은 완벽히 구자혁의 사람이었다. 치장된 모든 것이 그랬다.

    이제 인형 놀이할 시간이었다.

    어디에서든 사람의 시선이 따르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구자혁의 비서와 다니는 것만으로 다연은 평소보다 많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완전히 그의 사람으로 치장을 한 지금은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한강 호텔 라운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가장 힘든 시선을 견뎌야 했다.

    잡아먹을 듯한 구자혁의 짙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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