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역술인이 되었다-193화 (193/211)

#193. 기업과 손녀딸을 주겠다니까.

설민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설양훈은 감이 온 모양이다.

“됐다. 가 봐라. 나중에 얘기하자.”

“예.”

“그리고.”

“예?”

“어디 가서 빌고 무릎 꿇고 다니고 그러지 마라.”

“아…… 예.”

반대로 설민혁은 살짝 놀란 기색이 표정에서 읽힌다.

저 부자가 어떻게 대화하는지는 자세히는 모른다.

통화하는 거나 몇 번 들어 봤는데, 아들은 틱틱대고 아버지는 한숨 쉬고 하던 게 보통이다.

그냥 딱 취직 안 된 아들하고 엄한 아버지 있는 집 같은 느낌.

그리고 어느 세상에서나 아버지는 그다지 세심하고 상냥하지 않다.

애들이 어릴 때는 익살스러운데, 어쩌다가 자식들이 크면 죄다 무뚝뚝해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애들이 리액션이 나빠져서 아빠들이 저리 되나? 싶기도 한데.

설양훈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 앞으로 나한테도 크게 잘못한 거 없으면 이러지 마라. 뭘 잘못을 했다고……. 가 봐.”

슬쩍 빠져나가고 부자 상봉(?)의 현장을 마련해 줄 셈이었는데.

그렇게는 안 되는군.

설민혁이 나간 뒤, 설양훈이 물었다.

“시키신 것이지요?”

부정하지 않았다.

“예.”

“시킨 대로 합니까? 예상도 못 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군요.”

“어릴 적 아버지가 보호해 주지 않았던, 태어나지 말았으면 싶을 아이 억지로 떠맡은 거 같은 아버지의 냉정함에 상처가 컸습니다.”

“……사내놈이.”

노인네들은 근성론에 마초이즘에 물든 사람들이 많단 말야.

남자도 슬프면 울고 아쉬운 소리 해야지.

물론 보편적으로 남자는 남성성이 있는 편이 좋다.

서열 동물이고, 세상은 결국 그 서열화대로 돌아가므로 약해 보이면 먹잇감이 된다.

그냥 학창 시절 남자아이들만 봐도 빤히 보이는 형국이다.

“피해자를 굴복시키는 건 뭐 별로 좋아하는 수단은 아니고 정당하지도 않지만.”

“피해자라 생각합니까?”

여기서 화합이 안 된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원망이 가득한데.

아버지는 그래도 못난 놈 거둬 먹이고 돈 주고 하면서 베풀 만큼 베풀었다고 여기고 있다.

여기서 가해자, 피해자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걸 넘어 가족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내가 가족이라고 사정을 봐주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면 그냥 설윤환이 그놈이 출소해서 무릎 꿇으면 봐줬겠지요. 내가 아흔까지 살면 그 모양새 보기는 볼 것이고.”

“패륜은 못 참지요. 자식이고 뭐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자식에겐 사정을 좀 봐주시는 쪽으로 특혜를 주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랬어야 했나요?”

“예, 그랬어야 합니다. 자식에게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타인과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리더로서 자식에게도 무관용한 원칙을 세우면 좋게 보이겠지.

그들을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말이다.

“흐으음.”

“그런 면에서 보통 무뚝뚝한 아들들이 우리도 좀 사랑해 주시죠. 하면서 덤비는 건 오히려 대단한 결심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먼저 손을 내밀 생각을 했다는 것에 가산점을 주십시오.”

“그저 시켜서 그런 건 아닐는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저놈한테 뭘 아예 안 시키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지요. 난 그래서 지금 놀라워요. 선생이 저놈을 말을 듣게 하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저놈도 사고가 이차원 정도에서 멈춰서 사춘기 중학생마냥 부모나 선생의 영향력보다 또래 집단의 영향력을 받습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철없는 놈 같으니.”

“그리고 그 또래 집단에서는 기어 본 적이 없어 기어오른 것입니다. 그 기어오르는 끼를 잡지 못하면 세상 분간을 못 하니, 제가 혼을 좀 내봤습니다. 잘 따르네요.”

“혼을 냈다?”

“예.”

설양훈 미친 듯이 웃어 젖힌다.

개복수술해서 꿰맸으면 다시 실려 갈 정도로.

“하하하,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내 아들을 혼을 낼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처음 보는데요?”

새삼, 딸들을 혼내는 걸 봤을 텐데.

이 양반은 내가 했던 일 거의 다 기억하면서 처음 봤다는 양.

칭찬을 계속한다.

인식에 강하게 남는 걸 계속 칭찬하는 것이겠다만.

“딸들도 혼냅니다. 아버지로서 딸들 혼내는 사람이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종종 혼냅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아, 그래요. 병용이가 두들겨 패도 안 되던 걸 선생이 했었지요. 지 어미도 만나고 혜영이도 만나고 정치인 보좌관도 하고. 멀쩡한 짝도 구해 오고. 지금은 아니지만. 선생 만나고 사람이 많이 됐어요.”

“혈통으로 또래 집단에서 쓴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놈이었는데, 그 또래 집단 중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기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죠.”

“이건 선생이 저놈을 간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대답했다.

“제일 만만하고 약점이 많으니까요.”

“약점이 많아서요?”

“저점인 겁니다. 매수할 때이죠.”

“저점이라, 그 밑바닥이 있다는 격언은 들어 봤나요?”

“다른 건 모르겠으나 그 민혁이 놈 밑바닥을 메울 정도의 감량은 제가 됩니다.”

“으하하하하하, 이게 모든 게 6이 나온다는 친구라 그러한지. 원. 자신감이 하하하하.”

“배 찢어지시겠습니다.”

“으허, 야 이런 아들이 있었어야 했는데. 김병용이가 하고 다니는 짓이 이해가 가는군요.”

“거긴 그냥 딸부잣집이라.”

설양훈은 한참 껄껄대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후계군으로 윤영이, 은겸이 그리고 정 안 되겠다면 민혁이 생각을 했어요.”

“3순위였다 이거군요.”

“그런데 선생이 저놈을 내게 빌게 만들 정도로 미는 이유가 있습니까?”

“둘째 따님은 못 밉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친구가 고급 한우를 저녁에 실컷 쏜다는데 엄마가 밥 먹고 가라면서 아침에 먹다 남은 두 번 데워 짜디짜진 김치찌개 차려 놓은 격입니다.”

“그런 직원이 있기는 있었어요. 회장이 쏘는 회식이라 아낌없이 준비시켰는데 깨작대서 물어봤지요. 자네는 입맛이 안 맞나? 그러더니 어머니가 회식에 빈속으로 가지 말라고 저녁상을…….”

미담 같긴 한데, 마마보이로다.

그거 엄마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어야지.

이 대담에서는 ‘엄마가 차려줬다’가 중요하다.

먹어야 할 거 같지만 무시해도 될 법한 그런 입장에서 대할 수 있는 기업이 스카이피아 라는 뜻이다.

아무리 후계자가 중해도 평생 다져 온 기업이 그런 취급 받으면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은겸이는 맡은 책임을 회피할 아이는 아닙니다만 스카이피아에서 일을 시켜보니, 벽에 막힌 듯 힘들어하더군요.”

“그랬지요. 이 녀석이 처음엔 신성처럼 밝게 빛났었는데, 옆에 더 큰 초신성이 있었어요.”

아, 무슨 소리 할지 알겠다.

“……전 아닙니다.”

“선생인데요.”

“저 뭐 그냥 장인 되실 분 한이나 풀어드리려고 한 일인데.”

“그 두 빛이 분간이 안 가는 거 같지만 나는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빛이 같이 빛날 때 더 쨍하고 강렬했어요.”

“빛이 섞이는 것이 분간이 가십니까?”

“가지요. 무지개가 괜히 있는 것이겠어요? 대형 창 옆으로 들어오는 유럽 성당의 하늘빛 스테인드글라스를 덮는, 예수상 뒤편의 승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보필한다면 분명 빛으로 그리는 웅장한 볼거리가 되겠지요.”

언제나 느끼지만 영감도 말빨이 제법이다.

노인네는 이래서 만만하지 않다.

“저는 훈수만 둘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자리를 선호합니다. 거기서 가장 활약할 수 있고요.”

“이건 노승환이에게 들었습니다. 선생이 직원들을 다 틀어쥐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느 직원 어머니가 언제 아플지, 결혼할 여자와 해로할지를 다 안다고.”

설양훈에겐 이게 이제야 귀에 들어간 모양이네.

권위를 내세우며 회장이 있던 것처럼 회사 돌아가게 자리 지키는 거 외엔 할 거 없어서 스카이피아 사원들 불러서 사주 겸 상담이나 싹 해 봤는데.

그 덕에 이제 본사 직원들은 사주 다 알고.

협력사, 시공사 직원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긴요히 털어놓는 사람들도 많아서 반 이상은 통제가 불가능하지 않다.

이 건을 물고 들어오면 내 능력론을 부정하던 걸 철회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게 사주 보는 것뿐이니까요.”

“이런 인사를 틀어쥔 사람을 내가 그냥 놔둘 거 같습니까? 그 힘들다는 은겸이를 충분히 보좌할 만 한데요.”

“나이 어린 여주의 뒷배가 역술인이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하물며 볼 장을 다 본 사이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자면 회사의 권위가 서질 않고, 무엇보다 권위가 중요한 회사입니다.”

세게 표현은 안 했지만 소위 ‘X대가리로 회사를 먹었다.’ 이미지 주기 딱 좋다.

설은겸은 거기에 놀아난 게 될 것이고.

그거 사양하고 싶다.

“허허.”

“큰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인데, 입헌군주국의 꿔다 놓은 여왕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이 싫어 고사하고자 합니다. 이건 민혁이한테도 마찬가집니다. 제 영향력이 너무 큽니다.”

“그 영향력이 커야 오히려 내가 불안하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건, 한 15년 뒤 이야기일 거 같습니다.”

“음?”

“아니 어르신이 계신데 왜 제가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까? 긴급한 상황도 아니고.”

“어…… 쉬어야 하니까?”

노인네 드디어 말문 막힌다.

“지금 후계 구도를 생각하면 눈 감아서도 쉬지 못하실 거 같습니다만.”

“이런, 너무 정곡을 찌르는군요.”

“민혁이한테 생의 롤모델을 아버지로 잡으라고 갈궈서 이렇게 만든 겁니다. 그 뒤에도 제 영향력이 있어 보이신다면 마땅히 보좌로 삼으시고, 지금은 아버지로서 이끌어 주십시오.”

“그래서 갈궜다?”

“돈의 가치가 아닌 이 기업의 가치를 알아줄 후예가 없음에 불안하신 마음이 저는 느껴집니다.”

그래도 은은히 미소짓고 있던 설양훈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럼에도 눈빛은 빛난다.

“아……. 하, 그렇지요.”

“저도 사실 이 기업의 가치보단 돈이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가르쳐 줄 수도 없는 사람이고요.”

“그래 주실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들을 키우는 건 아버지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건 스승일 수도 있어요.”

오늘 영감 삘 받았네, 잘 안 굽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써넣는 장래 희망이 뭔지 아십니까?”

“뭔가요?”

“선생님입니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어른의 표본이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또 포석을 까는 겁니까.”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멋진 직업을 동경합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돈을 잘 벌거나.”

“예.”

“그리고 아버지가 멋진 직업을 갖고 있다면 아버지를 동경하기 마련이고, 그 꿈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직장이 됩니다.”

“회장님입니까. 그 녀석이 그리할까요?”

“모자란 놈이지만, 그저 몸만 큰 어린놈의 기질이 그대로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바른 꿈을 키워 줄 아버지에 대한 의식만 제대로 싹트면 늦었지만 올바른 목표로 클 수도 있는 놈이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놈한테 하는 칭찬이 참 선생도 어색하군요.”

안 듣는 뒷자리에선 뒷담화보단 칭찬이 더 낫지만.

칭찬이 말 그대로 어색하긴 한 놈이다.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선 가르쳐 줄 아버지의 맘도 풀리는 게 먼저라 그리 한 것입니다.”

“내 맘이 그리 편협하진 않아요.”

“그래도, 아득바득 대드는 놈보다 납작 엎드리는 놈에게 사람은 마음이 더 갑니다.”

설양훈은 씩 웃으며 눈을 질끈 감고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대답했다.

“정리가 됩니다. 좋습니다. 내 여생에 저놈을 한 번 믿고,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 말씀은 민혁이한테 직접, 아니면 제가 휴대폰 등으로 대신 메시지로라도 날리겠습니다.”

“그리고 민혁이 어미, 대전 저택으로 들어오라고 선생이 좀 대신 전해 주겠습니까?”

“그런 건 직접 하셔야지요.”

“우리 세대엔 그런 거 없습니다. 선생이나 많이 하세요.”

이 고집은 뭐 꺾을 방도가 없지.

“알겠습니다. 사랑의 뻐꾸기 잘 날리고 오겠습니다.”

“사랑 같은 소릴……. 그 녀석한테 힘을 실어 줄 방법에 지나지 않아요. 이제 뭐, 아무리 봐도 손자들 아니면 그놈뿐이니.”

“예, 그것도 아버지로서의 아량을 보여 주시는 방법이 될 겁니다.”

“아버지로서의 아량이라. 선생이 아주 오래전에 잃은 줄 알았던 내 새끼들을 보던 기분을 되살려 주는군요.”

“그 느낌이 오셨다면 제가 오늘 말씀 잘 드렸습니다.”

매번 가족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선생은 말이지요.”

“예, 말씀하십시오.”

“참 고마운데, 내가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오늘은, 내 잃어버린 아들 하나를 되찾아 줬어요.”

“과찬이십니다.”

“봄에 식 올립시다. 그리고, 지참금이 될 만한 건물을 내가 하나 건네줄 터이니 맡아 관리해 봐요.”

“아부 탈리브 센터 부산물이면 부족하지 않습니다만.”

“은겸이를 밀었으면 회사를 건네줬을 건데 뭐가 대수라고.”

통 하나는 크단 말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굳이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은퇴시켜 주십시오.”

“그건 안 돼요. 선생은 나 대신 이놈들 다시 이끌어 갈 보험입니다. 늙은이는 보험 재가입도 안 되는 것을 왜 자꾸 떠나려는 겁니까?”

“큰 도둑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생이 멋대로 도둑질을 하게끔 관리 못 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무슨 소린지.”

돈으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돈이면 뒤졌지. 사실 돈 해 먹는 구조는 잘 모른다.

이걸 말을 해? 말어?

여자운 11레벨, 친구운 8레벨이라 영감이 수긍할 수도 있고.

수조 원대를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존재에게 허가를 받아 놨다는 명분이 장벽을 더 쉽게 허물 수도 있다.

* * *

설 회장이 회생하고, 출근을 다시 대전 명승철학관으로 바꾸었다.

음력 신년인 설날을 사람들은 사주가 바뀌는 시기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성수기이다.

사주강화술 12,000명까지 채워서 얻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이제 다시 일해야지.

일도 길지 않다 바로 며칠 뒤에 설이라 집에도 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다시 여시길 기다렸습니다.”

“어, 와? 어서 오십시오. 저도 모실 날만 기다렸는데요.”

명승 선생님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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