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역술인이 되었다-192화 (192/211)

#192. 최초의 부하는 자식.

병원에 일찍 도착해서 설양훈 등장 리허설을 했다.

“그 삽관이랑 링거 같은 거 하시고 아픈 척하면서 오세요. 그 침대에 실려 오시는 것도 괜찮을 거 같네요.”

“음? 왜 그래야 합니까?”

설양훈은 내 제안이 탐탁지 않아 보였다.

설윤환의 난에 의해 검찰에 불려 다닐 때, 당당한 두 발걸음으로 출두하는 모양새가 사진 찍혀서.

휠체어에 신세를 진 다른 총수들에 비견되는 걸 자랑삼는 영감이긴 한데.

“이번엔 명분을 모자라고 자식들에게 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비난과 원망의 시선을 피하시려면 아픈 척을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놈들이 내가 번 돈에 숟가락을 올리고 싶다면 감수를 해야지요.”

갑으로서의 의식이 확고하구먼.

사람은 타인을 보며 내가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어야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으며.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을수록 그 강한 자아에 인생을 맞춰 살아, 인생에 트집이 잡힐 일을 잘 안 한다.

이어 타인을 가엽고 딱하게 보므로 상냥하고 자비로운 호인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을 만만하게 봐야 사람이 다가가기 쉽고, 타인이 만만한 이유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니까.

설양훈이 그와 같고, 최근에는 나도 높은 자아운과 종교운으로 인해 성취하고 있다.

“세상에 참, 좋은 분들이 계십니다. 많이 배우셨고 그로 인해 업적도 대단하며 아량 있고, 남의 말을 경청해 주시고, 재산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은.”

“또 꿀 바른말을 하려는 모양이군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선생이…….”

아이고, 또 지뢰복 주문부터 말씀하시겠네.

5개월 가까이 누워 있던 여든한 살 노인네의 이례적인 회복 속도에 의사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단다.

……내가 보기엔 그냥 노인네치고 영양 상태가 좋아서 있을 법도 한 일인 데다가.

팁깨나 뿌리는 양반이라 의사 선생들이 듣기 좋으시라고 건강 상태 칭찬을 한 거 같은데.

아무튼 의사들 앞에서 팔불출스럽게 내 자랑을 한 모양이다.

그게 병동 담당인 내 주치의 양반의 귀에도 들어갔다.

‘선생이 이런 주문으로 효험을 본 겁니까?’

그리고 내가 부러진 뼛조각이 알아서 조립되는 기적이 있었던 환자였다.

그 소리를 듣더니 영감은 아예 나무관세음보살 수준으로 주역의 괘상을 읊고 있었다.

설양훈 본인도 반신반의하던 모양인데, 의사 양반이 ‘신기한 친구네요.’라고 한마디 하니.

그 기이한 일에 미루어 하던 짐작에 확신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아주 지겹게 칭찬을 듣고 있고, 또 그 칭찬할 거 같아서 말 뚝 끊었다.

“아뇨, 반전을 드리려고 한 말씀입니다. 저런 분들이 자식한테 못하십니다. 그 케이스에 정확히 해당하시고요.”

건방진 거 같지만 저놈의 주문 덕에 건방져도 괜찮았다.

이젠 뭐 다른 주문 없냐 그러더라고.

수화기제나, 택산함이라도 알려 줄까.

아래의 산이 고인 못을 찌르는 괘상, 아래의 뜨거운 것이 물을 자아내는 형상의 괘상.

정력 주문 만들어서 외워 효험 보게 하면 떼돈 벌기는 하겠네.

기적이 생각보다 쓸 만하나?

“자식운 이야기로군요.”

단, 저런 좋은 사람들이 자식들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자식운 안 좋다는 말은 계룡선사부터 이형탁 교수, 저까지 하지 않았을까요?”

“뭐, 에둘러 말하고 언급들을 잘은 안 하지요. 사주하는 사람들이 아니어도 알 겁니다. 저 영감 자식 농사 망쳤다고요.”

그건 그렇겠다.

사주 교본을 쓰면 ‘자식운만 망한 케이스.’로 쓰기에 딱이다.

“사주로도 그렇겠습니다만 그 근원은 어르신의 강력한 자아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완고해서 그렇다는 거군요.”

“예. 자존감과 자아의식이 강하면 자기보다 못한 것들에게 대단히 관대한 편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못한 것들이나 관대할 수 없는 관계의 인물상이 있습니다.”

“자식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상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기준치가 있는데, 그것을 충족한 마음에 드는 인물들은 찍어 놓고 데려가고,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은 웃으면서 잘 보내줄 수 있지만 그거 둘 다 안 되는 관계의 인물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뭐, 왜 그럴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청산할 수 없는 관계에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인 겁니다.”

“사주로 퉁치지 않고 그걸 이렇게 말해 주니, 이해가 빠르군요. 그래서 아픈 척을 하라?”

“예, 죄짓는 것입니다. 떳떳하게 보이지 마세요. 가엽게 보이십시오.”

“일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싫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죽었을 것인데, 이상한 주문 하나 외우니 몸이 나아지는 게 느껴지고 그걸 또 자랑하고 싶은 기력이 있어요.”

노인네 고집 꺾기가 본디 제일 어렵다.

인생 부정을 통한 굴복시키가 안 통하고 내가 그걸 자제하니까.

또 개똥철학 팔아야지 어쩌겠나.

“어르신, 자식은 인생의 첫 부하입니다.”

“호오, 날 설득하려는 겁니까?”

문제는 이럴 때마다 영감이 대단히 재미있어한다.

일평생 말씨름을 거는 놈이 없어서 그런가.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30년, 길게는 60여 년까지 보여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보통 부하를 이렇게 엄하게만 다루면 남는 부하가 없습니다. 아마 충분히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최초의 부하라.”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부하 다루듯이만 했어도 자식들이 이 모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르신이야 돈과 권리가 자식이라 여겨져 그러실 수 있지만 세상의 많은 자식들은 지금도 노부모가 아프면 보호자 동의서를 써야 하고 응급실에서 전전긍긍하며 60살 아들이 80대 어머니를 업고 가는 세상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런 부쩍 커버린 자식의 등을 어르신은 느껴 보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것의 완성을 비단 건축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허.”

“인정하는 부하에게 간혹 속을 터놓을 수 있으시듯이, 그 등을 맡고 신임하며 때로는 너희가 없으면 나도 힘들다. 그것을 조금은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 주십시오. 연세가 그걸 해도 세상에서 아무런 눈치를 주지 않을 때입니다.”

“참, 말을 잘한단 말예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받아들여 주시니 기쁩니다.”

아무튼 그 의견대로 설양훈은 아픈 티를 가득 내면서 들어왔다.

눈빛은 전혀 안 아파 보인다만.

그나저나 이 집 가족들 다 모인 자리는 처음일세.

“뭣들 그리 놀라냐.”

“어떻게 된 거죠?”

설윤영이 묻는데, 내가 대신 대답했다.

“오진이었답니다. 나이가 같으신 분이 병동에 계셨는데 그분하고 바뀌었대요.”

“아, 이게 어…….”

“제가 진행한다고 했지만, 어르신이 그래도 수행의 정도를 보고 말씀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괜찮으셔요, 할아버지? 이렇게 불러 뫼셔도 되나요?”

아휴 남의 집 자식인 며느리와 손녀가 먼저 괜찮냐고 걱정하고 묻는 건 대체 뭐야.

이건 나머지 자식들 속내가 아버지 안 봤으면 싶어서 드러나는 진심이다.

한 마디 할랬는데, 지금은 내 턴이 아니다.

정리는 이 판을 벌인 설양훈이 해야지.

“너희들 꼴이 그게 뭐냐.”

설양훈이 자식들을 상대로 일갈한다.

영감 누워는 있어도 기백은 있구먼.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눈도 못 마주친다.

그냥 이 자리에 있는 손녀 하나만 양손 모으고 떳떳이 있고, 설윤영만 조금 딴청이다.

우선 설양훈은 설재영을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재영이 넌, 갔다 와라.”

“네? 아, 아버지?”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나도 너 탄원이라도 해 줄 수 있다. 지금이 나랏일 두고 다툴 때가 아니었으면 네가 회사를 말아먹었을 거다.”

“자식을, 자식을 둘이나 보내 버리셔야 속이 편하시겠어요?”

설재영은 당연히 맹렬하게 반항했다.

영감이 버리면, 말 그대로 끝이다. 아무도 그편이 없으니까.

설양훈이 그 말을 뚝 끊고 대답했다.

“한마디 더 할까?”

“무슨 말씀을요.”

“감히 누가 내 아들을 모함을 해. 윤환이 놈 꼴 나기 싫으면 입 다물어. 네 녀석 하는 짓 듣고 다시 쓰러질 뻔했다. 당장 나가.”

“아버지이이!”

“나가란 말 안 들리냐. 너 내가 민혁이 괴롭힐 때부터 네 오빠한테 한 폭언들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거 같아?”

“너무하시는 거 아녜요. 예?”

“부탁해요.”

침대를 끌고 온 의사 양반과 간호사 두 분이 난동 부리는 설재영을 끌어낸다.

사전 조율이 된 모양.

설양훈이 자식들에게는 일갈하다가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상냥하게 부탁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크다.

설재영부터 내쫓아 버린 설양훈은 이어 설혜영을 보며 혀를 쯧쯧 찬다.

그래도 좀 많이 누그러진 투다.

“그리고 혜영이 넌 잘하는 짓이다. 내가 막아는 줄 건데, 회사 일은 꿈도 꾸지 마라. 애비도 네 오빠도 천안 호텔 짓느라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기는 아니.”

“……죄송합니다.”

“재결합하든지, 호텔 찾아올 거 아니면 공부라도 더 해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마.”

설재영한테 화내는 건 좋았는데 자식들한테 무척 강압적이긴 하구나.

찍소리도 못한다.

“윤영이.”

“네.”

“회사 먹고 싶으면 양발 걸치지 말고 너라도 들어와라. 내가 누구랑 회사 이야기하겠냐.”

“됐어요, 아버지. 애들 달라는 말씀 안 하셨으면, 그랬을 건데 전 싫네요.”

‘여성이 자식을 통해 발언권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여성의 ‘식상운.’이.

저렇게 발동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설윤영을 보면서 느낀다.

미래를 쥐고 있는 것이니 과거의 노물에게 당차다.

“넌 그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가자, 혜영아. 아무리 봐도 아버지 미리 일어나 계셨어. 사주 선생님 데리고 장난친 거야. 아후 정말. 민혁이랑 화해하는 걸로 잴 때는 또 언제고, 갈게요.”

“저 녀석이.”

“퇴원할 때나 연락 주세요. 자식들 못 믿는 거 누가 그대로 닮았는지 모르겠어.”

저 양반은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하고 가시네.

자식 못 믿으니, 자식도 오빠 못 믿고 그 염병을 떤 거라 비약해도 영감은 비난을 감수해야 옳다.

그래도 저건 내가 나중에 설 회장 진짜 아팠다고 변명해 줘야겠다.

설윤영에게는 명분을 틀어잡힌 설양훈은 혀만 찬 뒤 이어 며느리들을 보며 말했다.

“첫째는, 그래 고생들이 많았다. 은겸이도 내가 일어나자마자 비보를 들었지 뭐냐.”

“예, 아버님.”

“그리고 둘째는……. 너는 그렇게 안 봤다만 실망이구나. 그놈이랑 이혼하고, 애들은 유학 보내라. 유학비 정도는 내가 대 줄 테니.”

“아, 아버님.”

“그리고 너희 둘이 여기서 손이라도 잡아라.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어…….”

며느리끼리는 그래도 막 적대의식이 샘솟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어색함은 있다.

“어서.”

김나경을 그래도 설양훈은 괜찮게 보는 모양이다.

나중에 듣자니 나름 존중하던 사돈댁 생각한 안배가 있었다고.

설양훈은 그렇게 며느리들 어색하게 손잡게 해서 내보냈다.

남은 건 설민혁 혼자였다.

“민혁이 너.”

“그…… 예.”

으름장을 놓으려고 한 거 같은데, 예라고 대답하자 설양훈이 살짝 당황한다.

원래는 반존대한다. 왜요, 뭐요. 니예니예 이런 식의 대사로.

“네 녀석한테 뭘 바랐겠냐. 너 같은 녀석한테…….”

그리고 설민혁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무릎을 팍 꿇는다.

그 모습을 본 설양훈이 혼낼 서사를 깔다가 말문이 막혀 한다.

내가 비켜 줄 때가 됐군.

사실은 설민혁에게 귀띔을 줬었다.

이 물건도 마땅치는 않은데 대안이 없는 현실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하니까.

내 말 따르라고 해 놓으니까, 정말 뇌를 위임한 듯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거 물어보길래.

통화로 사전에 말해 줬다.

“네 아버지한테 빌어라.”

[엥? 뭘? 그 너처럼 해? 그 반송장 양반 귀에다 대고?]

“네 문제의 근원은, 잃어버린 남성성에 있다.”

[잘 선다. 그러지 마라.]

“아마 정력도 딸리겠지만 인정은 안 할 테니 넘어가고.”

반박하려고 속사포로 하는 말이 있었지만 무시했다.

남성의 그 힘을 칭찬했을 때, 아니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여자한테 채우려 드는 거다. 여자는 몸이 다른 존재고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므로 교접하고 있는 동안은 네가 수컷임을 자각하게 만들거든.”

[말을 참 야하게 해 재밌어.]

사람은 원래 그럴 때 집중력이 높은데, 넌 더 그렇지.

“남자가, 사람이 뭘 할 때 가장 우월감을 갖는다고 생각하냐?”

[섹스?]

“비슷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뭔데?]

“타인을 완벽히 찍어 눌러 굴종시키는 것, 즉 네 서열을 확인 받는 지점에서 보통 남자의 최고의 열락과 희열이 온다.”

[캬, 야 그거 공감된다.]

“그게 수컷의 근본이다. 최고의 서열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다음이 여성을 상대로 자존감을 충족 받는 것이고 거기까지만 해도 나름 긍정적이다.”

[그래?]

그 이하가 이제 아는 동생, 후임, 나이 어린 상대, 어리숙한 친구 등 기본적으로 사회가 마련한 아랫사람에게 하는 사회적 서열 확인.

이어 가족에게만 해대는 서열 확인.

그 이하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허공에 주먹질하는 가상 세계 불특정 집단에 대한 비하가 있으며 그 밑의 지하가 자기혐오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를 이기는 방법이라는 게 반드시 말로 누르고, 힘으로 누르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뭐가 있는데.]

“내가 사주 하니까 이야기한다. 사주에는 관운이라는 게 있다. 이게 강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른다. 왕 된 자,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자들에게 이게 많아.”

[그건 좀 들어 본 거 같다. 계룡 선사 그 양반도 하던 말이거든.]

“그런데 그 관운은 널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는 운이 아니라 사회성을 말한다. 널 눈치 보게 만들고, 행동 전에 생각하게 만들고, 찍어 눌러서 말 못 하게 만드는 운이지.”

[너냐.]

나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서포터 흉내를 내고 있어서 긍정하지는 않았다.

“사회란 건 근본적으로 세상의 공론을 말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주는 눈치와 눈총, 그걸 총체적으로 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공론과 규칙을 눈치 보며 따르고 겸양하는 이에게 세상이 기회를 준다. 그들이 가진 돈과 인심을 얻을 기회를.”

[정치 이야기 같네]

“그 관운에, 즉 사회에 굽혀라.”

[이미 굽히고 있지 않냐. 네가 돈 주는 통로잖아. 통제도 하고. 뭔 말인지 알겠다. 세상의 규칙 가장 잘 지킬 거 같아 보이고, 사람들 눈밖에 안 나게 눈치 잘 보는 사람들이 정치하잖아. 거기에 어긋나는 사람들 잘 패서 그 틀에 맞게 만들고 그치?]

보좌관 좀 해 보더니 여의도 문법은 아네.

“그렇지. 잘 얘기했네.”

[나 스카이피아에 있으면서 그거 그대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너한텐 그 사회가 네 아버지다.”

[어, 아, 그, 그냐?]

“넌 혈통 상, 오롯이 한 사람의 돈과 인심만 얻는다면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과 규칙을 고스란히 받을 위치에 잘 타고난 거야.”

[너한테 잘 보이라는 얘길 이렇게 하냐. 영감은 굽힐래도 그 모양인데 어떡하냐.]

“오진이다. 곧 깨어나실 거야.”

[뭐?]

“그러니, 꿇고 용서 빌어라.”

휴대폰 넘어 설민혁은 한참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야, 시키니까 하겠다만……. 내가 그렇게 잘못했을까?]

“너는 네 초년을 해치고 망친 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못 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럼에도 네가 먼저 굽히는 것으로 표현해 봐라.”

[엄마랑 떼어놓고, 누나년들한테 왕따로 지낸 아들내미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준 적 없는 노인네야. 차라리 모르고 애비 없는 자식으로 엄마 밑에서 자라게 하다가 지금 나타나 돈 몇 푼 주면서 사실 내가 네 애비다.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해.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감동 먹었을 거라고.]

거, 뭔가 와닿는 게 있는 이야길세.

“그래, 그거 억울한 거 알겠는데 사회는 네 사연 같은 거 신경 안 쓴다. 사연에 맞게 외쳐 봤자, 규칙과 공론에 어긋나게 특혜를 달라는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아. 사회에 개인을 들이미는 자들은 관운이, 즉 쓸 수 있는 감투가 높지 않아.”

[……냉정한 새끼.]

“나는 점 보는 사람이니까 들어준다. 그치만 시키니까 하겠다고 한다면 내 말대로 해 봐.”

[아, 되게 확신 있게 말한다 너?]

“내가 틀리질 않을 테니까.”

* * *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세요.”

설양훈은 놀라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겸연쩍은 듯 한마디를 하는데 목소리가 엄하지 않았다.

“뭔 사고를 쳤길래 그러고 있냐?”

“그냥, 그냥요.”

사실 아버지가 먼저 손 내미는 게 나은데.

노인네가 좋은 소리 못하니까, 아들놈을 박살 내서 무릎 꿇렸다.

설양훈은 당황해하다가 뭔가 감이 잡혔다는 양 묻는다.

“이거 네가 진심으로 우러나서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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