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여우 눈.
충남 논산에 설씨가 선산이 있다.
선산 아래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위령비 옆에 딱 한 사람이 묻혀 있다.
그 공원 묘역에는 고 설정환 회장이 안장되어 있다.
선산에 묻힌 설양훈 선친들보다 아들이 더 큰 묘역을 쓰는 것이다.
나는 뭐, 이 집 사람이 아니니까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인데, 한 마디로 잘해 놨다.
작년 봄에 설은겸이 여기서 2주기 주관하는 영상은 봤다.
“잘하셨네. 공 있는 사람이 더 우대받아야지.”
이 결정에 의문을 품는 일가친지나 회사 사람들이 있기야 했으리라.
돈이 꽤 많이 들어갔을 테니까.
다만 일단 설양훈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고.
정확히는 설정환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었다.
세종시에 제대로 올라타서 회사를 몇 배로 키워 냈으니.
조상들보다 낮은 항렬의 손자 증손자가 더 웅장하게 있는 것에 대해 조상들이 발끈해서 후손에게 화를 입히면 그게 조상이겠나.
쌀쌀한 날씨에 추워서 인근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안경을 쓰고 웃고 있는 고 설정환 님이 환하게 웃는 사진이 인쇄되었고 회사 연혁이나 이런 것까지 있다.
왕조가 종묘를 세운 것과 흡사하다고 본다.
“조성을 잘해 놨네요.”
기념관 안에는 오돌오돌 떨고 있는 두 여인네들이 있었다.
“그래요? 우린 너무 그냥, 그냥 너무 크게 한 거 같아서 좀 오면 기분이 그래요.”
“안인데도 좀 춥다.”
“난방을 해 두기는 좀 그런데.”
“근데 아빠 2월에 돌아가셨으니까, 여기서 기일 지내고 그러면 해 둬야 하지 않을까?”
은겸이나 유겸이나, 난방이나 건축구조를 나름 아는 편이다.
난 스카이피아 사무실 나가기 전까지는 누수가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만.
역시 건설 회사 회장님 딸들일세.
기념관 내부에는 난방장치를 안 했다고 한다.
선산 아래 별장이 한 채 있는데, 스카이피아 정사원인 분이 기거하면서 같이 관리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설정환 회장 참배를 하거나 기념관을 들를 사람은 없다시피 하니.
난방에선 아꼈던 모양.
이게 후손이 했으면 극성이다. 욕을 먹었겠으나.
그 아버지가 한 일이라서 납득이 간다.
그래도 한 마디는 돌려줄 수 있다. 있을 때 잘하지.
“진짜 전설이시네. 듣긴 들었는데, 회사가 열 배 가까이, 우와.”
“아빠가 잘할 때마다 우리 집이 바뀌었다?”
“응, 아파트 살다가 그 아주 큰 집, 저택? 뭐 그런데 들어가 있다가 할아버지 집 바로 옆 저택으로 이사 세 번 했었다.”
은유 자매의 고향 집은 설 회장의 회장 승격, 아버지 인정, 이어 사망 등의 원인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다.
“돈 많이 물려받아야겠다. 둘이.”
“그런가?”
“그래요?”
은겸이 유겸이 둘이 붙어서 나란히 치켜뜨고 날 보는데 눈매가 묘하다.
고인을 기리는 기념관이라 착한 생각 중이기는 한데, 착한 생각이 잘 안 드네.
기념관에는 설정환 회장 체제에서 회사가 엄청 커졌다고 업적을 적어 두고 있었다.
이러면 돈 많이 받아야지.
“여기 할아버지가 그 서울서 내려와서 지키고 살 사람한테 땅 준다고 하셨다.”
“시골 맹지에 산 같은데? 안 비싸지 않나?”
“아녜요. 그, 그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기차가 그 전주로 가는 길이 이상하다고. 여기 예전부터 사람들이랑 정치하는 사람들이 사 뒀던 땅이랬어요. 그거 우리가 대금 치르고 사들였고요.”
“아, 진짜요? 아, 개태사 근처에 있는 거 보니까.”
“음?”
뭔 땅인지 궁금해하는 둘에게 간략히 설명해 줬다.
자택과 자취방을 오가면서 자주 이용하던 기찻길이라서.
“개태사 드리프트라고 철로가 이렇게 반듯해야 기차가 빠르잖아요? 근데 기찻길이 꼬불꼬불하게 지어져서 기차가 속도를 못 내요. 호남권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렇게 일직선인데 아마 그 땅인 모양이네.”
“잘 아시네.”
“어, 큰 차, 배, 비행기 등에 적성이 있으니까요.”
허율환이만큼은 아니지만 적성이 있는 편이다.
인간을 뛰어넘은 속도의 퍼포먼스를 내지만, 안전하게 보호 받는 듯한 대형 철마에 의탁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인생.
그러니 주거운 좋아했겠지.
“근데 어머니 안 오시네.”
“좀 늦으신대요.”
“엄마까지 불렀어요?”
“가족들 모아 놓고 보여 줄 것도, 선언할 것도 있으니까?”
“음?”
“스읍.”
유겸이가 째려본다.
응, 그거로 낚이라고 말한 건 맞지만, 그거 아냐.
그걸 여기서 하면 제대로 미친놈 아닌가.
적당히 미친놈이고 싶다.
“엄마 오면 도망가야지.”
“여기서 어디로?”
“몰라, 아저씨한테 나 팔았어. 미워.”
유겸이는 어머니 전언을 들려주니 이런 반응이다.
은겸이가 바로 엄마 실드를 친다.
“그런 거 아니구, 음.”
“뭐래? 저 변태 아저씨랑 잘해 보라는 그 심리 여전히 있을걸? 언니는 아깝고 나는 그래도 되고.”
“아, 그렇긴 했네.”
설 회장이 쓰러지기 전에 신부 교체 시도가 분명 있기는 있었다.
사실 그 어른들 생각이 괘씸하다 싶었는지 유겸이가 더 밀고 들어온 것도 있고 그게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고.
은겸이가 유겸이 얼굴을 못 쳐다보다가 날 바라보고 그냥 고개 푹 숙인다.
왜 이러누, 갑자기.
그사이, 차량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차 한 대가 산길을 지나쳐 올라왔다.
어머니인가? 아니면.
차는 설정환 기념관 앞에서 멈췄다. 투명 유리라서 차가 보인다.
그곳에서 내리는 건 설재영이었다.
“아…….”
“어.”
설정환 두 딸의 반응을 뒤로하고 내가 일어서서 문 열었다.
휠체어랑 병원복은 어디 가고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 입고 왔네.
“후우.”
“어, 안녕하세요.”
“오셨습니까. 그런데요.”
다짜고짜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다시 오십시오.”
“예?”
“내가 기사님 데리고 편하게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 운전도 하실 줄 알잖아요?”
“……아, 어.”
“기사님 두고 다시 차 몰고 가십시오. 주행거리 블박 확인할 거니까 속이지 말고 대전까지 갔다가 다시 몰고 오세요.”
불러 놓고 다시 내쫓았다.
나는 직접 차 몰고 오라고 디테일을 말했는데 이 정도는 무시하네.
사실 밉지만 무시해도 된다. 관건은 묘역에 무릎을 꿇리는 거니까.
그치만 나는 이 사죄도 이벤트로 활용할 생각이 있고.
단순히 사과를 받는 것으로 끝내면 의미가 없다.
치욕을 줘야지.
“사과와 사죄엔 의식이란 예의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려면 잘못한 사람이 그만한 태도를 갖췄음을 먼저 보는 것인데.”
“후우…… 예.”
“그 태도가 돼먹지 못했네요. 가세요.”
X 같은지 나보고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뒤에서 화를 낼 건지 울 건지 모를 표정의 피해자 딸들을 보고 접기는 접는다.
“여기 보니까, 오빠가 벌어다 준 돈이 참 많더라고요? 아빠가 물려줬다면 백만장자였는데, 오빠가 번 덕에, 그리고 적당히 원하는 대로 돌아가신 덕에 억만장자가 되셨더만.”
“…….”
“다녀오십쇼. 아, 기사님, 여기 아래에 그 별장 하나 있거든요. 스카이피아 설재영 사모님 모시는 기사님이라고 하면 있게 해 줄 겁니다.”
기사를 분리시키고 설재영 다시 차 태워 보냈다.
이건 강짜다.
사과받는 입장에서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냐를 보는 것이기도 하고.
아직 어머니도 안 오셨으니까.
“뭐죠……?”
“큰고모가 오빠한테 사과드리고 싶답니다. 사과를 받아 주는 건, 뭐, 아버지 잃은 자식들과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이니까. 불렀어요.”
“아.”
“저, 저 여자가요? 절대 안 그럴 거 같았는데.”
“은겸이, 이제 알죠?”
“아? 아…….”
뼈 회복으로 다 수복하긴 했는데, 피부 강화는 안 했다.
그래서 차 사고로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온 부분이 흉터로 남아 있다.
“사고 유도로 약점 잡았습니다. 사주로 보아하니 자기가 꽂힌 것에서 앞길이 막히는 걸 참을 수 없던 사주더군요.”
“사고 유도……?”
“아, 말 안 했어요? 아, 몰랐나 보네.”
“무슨 말이에요?”
은겸이는 이슈가 잠잠해진 다음에 와서 잘 모른다.
커뮤 같은 걸 안 하기도 하고.
“그, 그, 그, 그 언니 그게 말야.”
“응?”
그와 관련해서는 유겸이가 친절히 설명해 준다.
나 사고 한 번 당했었다고.
“뼈가 튀어나왔었거든? 그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데, 와.”
그리고 묘사력이 쓸데없이 좋다.
그건 내가 들어도 좀 무서운데?
“왜 그걸 이제 얘기해요?”
대답 안 했다.
그런 건 남의 입을 통해 듣게 하는 게 좋다.
이게 더 효과가 좋으니까.
사람을 만나고 사주를 볼수록 사람을 대하는데 능해진다.
해야 할 말을 언제 해야 하나, 어떤 말은 언제 감춰야 하나.
“걱정 안 끼치고 싶었대에. 눈꼴시려.”
“그래서, 이렇게 부른 거예요?”
은겸이 눈물 살짝 어린 눈망울이 예쁘다.
부른 목적을 상세히 말해 줬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짚어줬다.
“어, 확실히 말해 둘게요. 이거, 내가 합의해 주는 조건이지 너희들이 용서해 주는 조건이 아니야.”
“응?”
“아버지 설정환 회장님에 대한 모해위증무고 사건으로 걸 수 있을 겁니다. 그 이후 법적 처분은 둘에게 맡길게요.”
나는 봐준다고 했지만 은유자매나 구예련님이 봐준다고 한 적은 없고.
솔직히 고작 빈다고 봐줄 수 있나, 그냥 경감이지.
콩밥 함 먹어 봐야지, 잠깐 유치장 국밥 맛 보더니 다신 안 갈 맛집인지 발광을 하더만.
그래서 자백을 시키고, 그 자백을 통해 은겸이네에 설재영 약점을 또 쥐여 줄 셈이다.
뭣보다 얘들도 내 복수해 줘야지? 크게 다쳤는데.
그사이 다른 차가 도착한다.
“왔어요?”
“유겸이 너, 엄마가 왔는데도 코빼기도 안 비치고. 그렇게 미워?”
“안 미웠는데 이 아저씨랑 같이 살라고 해서 삐졌어.”
“왜? 너 선생님 좋아하잖아.”
“아닌데요…….”
그냥 부끄러워서 그리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내 눈치 보네.
“그런데 애들 아빠 제사 아직 남았는데,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저기 오네요.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아, 이 안쪽으로 더 들어가 계시겠어요?”
말하는 거 좋아하니까, 일일이 설명해 드려도 되겠지만 마침 가해자도 다시 도착했다.
진짜 블박 확인까지 할 셈은 아니었지만 좀 밟았을 때나 나올 법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행여 미쳐서 급발진으로 건물 덮쳐 다칠까, 식솔들을 건물 내부에 벽이 있는 곳 안쪽으로 미리 옮겨뒀다.
직접 할 또라이는 아닌데, 또라이는 또라이니까.
“아.”
구예련도 설재영이 운전석에서 내리자, 표정이 나빠진다.
예상은 했지만 설양훈도 안 시키던 시집살이를 유일하게 시키던 시누이라고 한다.
시어머니가 조금 시키긴 했지만 엄할 뿐이지, 서럽게 굴진 않았는데.
설재영은 사람 자체를 무시했다고.
아무튼 차가 멈추자 다시 나가서 맞이했다.
“외투 벗어서 차에다 놓으세요.”
“예?”
“누군 차가운 땅속에 있는데, 본인은 행여 감기라도 들까 중무장을 하고 오셨네. 장례식 복장으로 오랬잖아요.”
“그건…… 허, 예, 알겠어요.”
한숨을 쉬려다가 틀어막네.
뭐,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한숨 쉬지 마시고, 진정성 있게 사과하라는 말 못 들었어요?”
“아니 그냥, 요즘 내 신세 알지 않아요?”
사정 알지, 잡혀가게 생기고 출소하면 빚더미에 나앉게 생긴 거.
근데 그 사정 봐줄 일이 없다.
“말대꾸 안 듣고 행동을 보고 싶은데요.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마세요. 한숨 쉬던 선생님 불러다가 따박따박 갈구던 거 기억나는데. 왜 그러시나.”
학교 때 일까지 트집 잡을 게 많다.
“…….”
“진짜 진정성을 보이려면 본인이 말없이 왔다 가고,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전화 한 통이라도 하고 그랬어야 하는 겁니다.”
그 뒤로 경계하던 가족들이 나오자 그들에게만 말했다.
“올라가시죠.”
“기어이 안 올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하.”
구예련은 자기 가슴을 몇 차례 내리친다.
그래도 조카들인 둘은 얌전한 편이다. 울려고 하는 거 말고는.
묘역으로 갔다.
내가 내민 합의 조건은 ‘설정환과 그 식솔들에게 직접 사죄하고 그에 맞는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돈으로 합의? 공식적 자산으로만 따지면 은겸이가 더 많다.
서로 쳐다도 안 보는 상황에서 일단 끌고 올라갔다.
다른 식구들은 몇 차례 왔다는데 감옥 간 설윤환은 차지하고서라도 설재영은 단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양훈도 그것만은 괘씸해하고 있었다.
위령탑 아래 비석이 있는 설정환 묘역에 도달했다.
그래도 설재영이 국화 한 송이는 준비해 왔는데 그걸 놓으려 하는 걸 내가 제지했다.
“허리만 숙이지 말고 무릎 꿇으세요.”
“골다공증이 있어서.”
“그럼 집에 가세요. 필요 없습니다.”
꺼지라고 한 소리 하자 바로 무릎 꿇는다.
잘 꿇는구먼.
“꺼지라니까?”
“미안합니다.”
사실 장소 만들고 이 아줌마 면상 보는 게 나도 기분 좋진 않아서 보낼 생각은 없었다.
한 번 보고 때워야지.
본인도 여기까지 제 나름 굴욕 참고 왔는데, 또 오긴 싫을 것이고.
“절은 할 필요 없고 그냥 고인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유겸이?”
“에, 왜?”
“촬영용 가져왔죠? 찍어요.”
그 말을 하자 설재영이 후방과 좌측에 서서 노려보고 있는 나와 가족들을 쳐다보는데.
괘씸하네, 뒤에서 발로 한 번 밟아서 억지로 비석 앞에 머리 찧게 만들까.
그래도 영상으로 증거 남기는데 폭력을 가하는 광경을 남기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
“뭐, 할 말 있어요? 뻔히 신세 나아지면 말 바꿀 건데, 기록으로 남겨야지.”
“…….”
돈 없고 자기 편 하나도 안 남아서 항복하러 왔으면, 자존심을 굽혀야지.
“아, 그리고 기도는 육성으로, 말로 하세요.”
“예?”
“평소 고인한테 잘못했던 거, 털어놓으시고 고인한테 빌든 하나님한테 빌든, 빌라고요.”
그래도 준비는 했는지 설정환에게 건네는 기도문은 나온다.
그러나 말 끊었다.
“잠깐, 저기요 아줌마.”
“예?”
“왜 그렇게 되셨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사과부터 하셔야죠. 내 잘못은 안 밝히고 애석하다 그러면 되나요? 다시 해요.”
사과문이 4과로 들린다.
이거 내가 듣는 사과가 아니라서 사주강화술이 판단해 주지 않는 게 안타깝네.
사과하는 말과 명복을 기원하는 말 자체에는 거슬리는 거 없는 잘 쓴 사과문을 낭독하는 것 같다만.
호칭이 문제였다.
“아, 잠깐.”
“……예?”
“우리 오빠라고 하세요. 누가 오빠한테 설정환 씨 이럽니까?”
“…….”
“표정 안 좋네요. 아, 우선 여기 올케한테 올케라고 해 봐요.”
무릎 꿇은 설재영이 고개를 돌려 구예련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처연하거나 봐달라기보다는 원망 섞여 보였지만.
구예련의 눈빛이 돌멩이라도 굴러다니면 주워 들고 내리찍을 기백이었다.
돌 하나 없이 관리되는 묘역이라 다행.
직접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죄송합니다.”
“올케라고, 오빠라고 똑바로 호칭 붙이라고.”
“미안해요, 올케.”
“하.”
구예련은 어이가 없다는 양 크게 기가 차 했다.
진짜 뭐 있으면 깔 거 같은 분노가 보여서 내가 먼저 더 갈궜다.
원래 이렇게 더 분노해 주는 윗사람이 있어야 중간으로서 갈구기 좋다.
“내 말 따라 하세요. 죄송해요,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
“…….”
“그놈의 긴 기도문 말고, 오빠 잘못했어요. 하라고.”
말은 그리하지만 독한 아줌마로 눈물 한 방울 안 나온다.
오히려 울 준비 다 마친 건 두 딸이다.
“당신한테도 오빠이고 가족인데, 딸들보다 위하는 마음이 없네요? 눈물 좀 보이지 그래요? 대답 안 해요?”
폭력 마렵네, 진짜 머리채 잡고 비석에 갖다 박을까.
그래도 우선은 평화적으로, 여기까지 판을 짜 놓은 걸 이용했다.
“자식 뺏기기 싫으면 감방 안 가야죠, 아줌마?”
“……아.”
이성민은 이미 이혼소송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일단 아내를 실드를 치는 방식과 내치는 쪽 두 가지 모두를 계산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단지 그런 상황의 아내를 버리는 게 명분이 맞나? 하고 고민을 한 모양인데.
내 이야길 듣자마자 곧장 이혼소송을 청구하고 변호사비 지원 및 부인에 대한 지원을 모조리 끊었다.
맏이는 망나니로 컸지만 어른인 데 반해, 이제 중학생인 딸들이 있다. 쌍둥이다.
결정타는 이성민을 돌려놓은 것에서 끝이 났다.
이성민이 돌아서는 거야 짐작했겠으나, 이성민과 함께 자식들마저 돌아서는 것에서 결정적으로 설재영이 무너졌다.
아버지, 남편, 돈까지 외면하고 자식도 안 큰 아줌마가 세상에서 가장 무시 받는다.
하물며 자식이 버린 아줌마?
그건 신이 굳건히 있어도 못 견딘다.
애 낳은 여인이 비구니나 수녀가 되는 경우? 매우 드물다.
인성이 말하는 신념 따위는, 내가 낳은 새끼를 보통은 못 누른다.
“사춘기 딸들이 엄마가 범죄자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은 해 봤겠죠?”
“…….”
그래서인지 자식을 들먹이자 그제야 좀 감정이 돋는 모양이다.
마침, 피해자의 자식들도 있고 설정환 님의 심정을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히려 자식으로 취급을 못 받아서, 더 아이들에 애착이 강했을 사람의 심정을 사주로 이입해서 한마디 더 했다.
“여기 당신 오빠도 그랬거든. 우리 애들 보고 싶다. 아빠가 미안해.”
울음은 은겸이한테 먼저 터졌다. 울보니까.
이어 울음은 본디 한 명 울면 연쇄가 터진다.
나는 유가족 울음이 줄줄이 터지고 나서야 여전히 내심 수긍은 못 할 이 악독한 아줌마도 동요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은겸이만 울었음에도 본인도 질질 처 울고 비석 앞에 안 하던 절을 하기 시작한다.
“…….”
아마 오빠와 최초로 공감했을지도 모를 사연이겠다.
둘 다 사정기관에 압력을 받아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를 처지에 놓인 것일 테니.
여기서 판단은 유가족들이 할 일이고, 한 가지 준비해 놓은 것을 기원했다.
“어.”
겨울이지만 쨍하고 맑은 하늘에 여우 비마냥 눈송이가 날린다.
것도 이 근방 선산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