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역술인이 되었다-115화 (115/211)
  • #115. 수도 성 안 사람.

    설윤환의 세 번째 편지는 안 낚이기 힘든 문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형을 가만 놔뒀을까요?’

    “안 낚일 수가 없네.”

    수조 원가량 들고 있는 왕 회장 편을 든다는 원칙은 확고하다.

    내가 보기엔 블러핑일 가능성을 높이 본다.

    관심도를 높이기 위한 블러핑.

    하지만 최근에 안 정보 등을 취합해 본 결과로는 안 낚여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보낸 것이다.

    * * *

    서울을 또 왔다.

    서울역에 내리자, 설유겸이 맞이해 준다.

    “또 오셨어요? 자주 본다.”

    “예, 운이 인도했네요.”

    “운이 인도했대, 아하하.”

    말 그대로 운이 인도했다.

    “오늘도 제 셔틀로 어.”

    “왜 그러세요?”

    “오늘은 집 나오는데 꾸밈이 덜하네요? 뭔가 안 차고, 뭔가 안 쓰고.”

    “그래 보이세요?”

    지난번에 차 셔틀로 왔을 때만 해도 팔에는 뭐 차고 그랬다.

    땀띠 날까 싶을 정도로 더운 날에 말이다.

    “그리고 목소리 톤도 좀 낮네요.”

    “어, 많이 더운가 봐요.”

    “자다 깨다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황급히 나온 거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것치고 저랑 메시지를 열심히 하다가 중간에 끊은 거 같고.”

    “어···.”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설유겸은 그냥 빙긋 웃을 뿐이었다.

    “아저씨는 형제 있어요?”

    “네, 있죠.”

    “동생 오빠?”

    “예?”

    “아, 오빠래. 뭐 형? 누나?”

    “여동생 있네요.”

    “와 여동생 있으시구나, 사이 좋으세요?”

    “서울에 있어요.”

    “오, 그럼 온 김에 보러 가시는 거예요?”

    동생은 졸업 후 알바나 몇 번 하고 변변찮은데.

    월 60에 달하는 그래도 좀 안 외지고 보안 잘된 원룸에서 공과금에 용돈까지 한 130만 원가량 부쳐야 하는.

    악성재고라고 엄마가 죽어라 깐다.

    서울권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일거리 찾아 서울 생활한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남원 가서 만두공장에서 얇은 피 만두나 말라고 엄니가 전화로 욕을···.

    까니까 집으로 또 안 오기도 하고.

    “아뇨. 지난번에 3일 정도 서울에 있었는데 연락도 안 했는데요.”

    “왜에?”

    “저는 남의 집 여동생이 더 귀엽네요.”

    은겸이가 내 동생보다 더 어리다.

    “저 말이죠?”

    “예에.”

    “여지를 주시네. 그래도 돼요? 언니랑 사귀는 거 아냐?”

    음, 약간의 칭찬이 그렇게 들릴 수 있는 사이이긴 하다.

    변명하긴 그래서 무시하고 말을 돌렸다.

    “딸딸아들집의 둘째 딸은 뭘 특출 나게 잘해도 중간에 치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끼인 둘째 말이구나. 예리하시다.”

    “그리고 엄마는 언니를 더 좋아하죠.”

    “네···.”

    형제에게 부모가 누굴 더 아끼냐고 묻는다면.

    높은 확률로 다른 형제를 가리킨다.

    이건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거의 8~90퍼의 공식.

    나는 대전에서 월세 25만 원 자취방에 살았고.

    그나마 책으로 돈을 조금 벌어서 등록금도 스스로 몇 차례 냈다.

    반면 내 동생은 한 달 130 정도 뒷바라지를 받고 있다.

    이걸 보면 객관적으로 내가 좀 더 집안 가산에 문제를 끼치지 않은 것 같은데.

    동생은 내가 더 집구석에 예쁨받는다 생각하더라고.

    들어가는 돈이 증명해 줄 건데.

    “너도 언니를 더 좋아하고요.”

    “그러게요. 헤.”

    설유겸의 차에 타고 목적지를 찍어 줬다.

    “성북동이랑 북촌? 어디 먼저 가실래요?”

    “성북동이 그 사장님, 사모님들 많이 사신다고 하니까, 가 보죠. 구경하고 싶네. 거기 살지 않아요?”

    “아니요. 저희는 아파트에서 살아요. 예전에 집은 대전에 있었어요. 언니 대학 가면서 다 이사 왔어요.”

    은겸이가 막내 동생 사진 자랑하면서 몇 차례 보여 준 적이 있는데.

    그건 집 안 내부였지, 바깥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내부도 좋아 보여서 대저택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저택이라고 할 만한 그런 마당 같은 것은 안 보였다.

    막내 동생이 더 어릴 때는 있었던 거 같은데.

    “근데, 성북동은 왜 가세요?”

    “집이 있다는데 누구 준다네요.”

    “에, 누구?”

    “지금 운전하시는 분.”

    “아, 저를요?”

    “아니면 지금 스카이피아 특임고문실에 있는 너네 언니요.”

    “우와아, 언니 거네요. 그리고 결혼하면 준다는 거죠?”

    “예에, 그렇게 됐습니다.”

    “아하, 저는 허락 받았어요. 준비되어 있답니다.”

    “예?”

    “엄마가요, 너는 시집이나 가래요. 빨리. 할아버지가 재산 나눠 주실 건데 그거라도 받아서 먹고살라고요.”

    그건 엄마가 말을 좀 심하게 하셨네.

    잘사는 집도 아이들 교육은 크게 다를 게 없더라.

    “지방에 있는 대학 가느니, 시집이나 빨리 가라?”

    “어, 헤헤 더 말하면 엄마가 이상해지니까 말 안 할게요. 그냥 하는 말이에요. 나중에 뵈면 꽤 잘해 주실 거예요.”

    이건 뭔가의 원인으로 엄마한테 혼난 모양이다.

    원인은 정확히 짐작은 안 가지마는 혼날 때.

    은겸이와 달리 더 호되게 혼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 자매는 사주가 은겸이의 어머니운이 훨씬 높다.

    유겸이의 위를 거스르는 운도 훨씬 높다.

    그 집 사모님도 둘째 딸이 덜 아픈 손가락인 모양이다.

    끼인 둘째들이 참 억울한 경우가 많다.

    맏이는 맏이라고, 막내는 막내라고 아낄 테니.

    그래도 그 혼난 걸 주변인한테 굳이 티를 안 내는 모습은 좋다.

    “애써 밝은 티 내고 있네요.”

    “그래요? 원래 밝은데.”

    “엄마한테 혼나고 밝으면 그거 미친년이라고 하는데요.”

    “미쳤나 봐요, 헤헤헤.”

    “미친 살이 있었나, 어디 보자. 사술 귀문 있었던가.”

    “미친 것도 사주에 나오는구나아.”

    “어머니운이 은겸이가 높은 것도 나오고, 유겸이가 윗사람과 트러블이 있는 것도 나오죠.”

    “언니가 어머니운이 높은 건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에게 붙은 활동과 표현의 운세를 내쫓지요.”

    “어··· 정말요?”

    뭔가 깨달음이 있었는지 설유겸이 놀라 묻는다.

    “네, 엄한 공부 하는 걸 좋아하는 어머니는 별로 없어요. 그런 건 오히려 아버지가 말려 주죠.”

    내 동생이 엄마한테 쌍욕 먹는 것도 써먹지도 못하는 미술과 디자인 배운다고 가산탕진을 많이 해서 그렇다.

    운세도 정규학문인 학위운과, 기술학인 기예운이 다르니.

    “언니···는 공부도 잘했어요.”

    “엄마처럼 되고 싶다면서 적성은 있지만 소질이 없는 곳으로 갔더군요.”

    설은겸은 성적으로는 하향지원한 편이다.

    “저는 아빠처럼 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는 거 같아요. 요즘은 언니가 오히려 진짜 아빠 같아요.”

    “좋은 아버지셔서 더 슬픔이 크시겠어요.”

    “그래요? 오히려 아빠가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었던 거 같아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는요, 아빠가 우시는 걸 봤어요. 어릴 적에.”

    “그 이후부터 아빠처럼 될 거야 이걸 안 하는 딸이 됐다?”

    “어 제 스토리를 그냥 꿰고 계시네요.”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도착했다.

    도심운전 나름 괜찮게 하네.

    “어 여기인 거 같은데 사진상.”

    “아, 여기.”

    “왜 아는 데예요?”

    “그게··· 아, 야!”

    설유겸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다.

    뭔가 하고 쳐다봤는데, 뭔 여학생 한 명이 설유겸이 다가오는 걸 보고 도망친다.

    * * *

    설혜영의 면회 결과가 접수됐다.

    설윤환의 넋두리와 가족을 조금이나마 챙겨 달라는 이야기 그 이상은 없었다.

    “말 안 하는 건 아니고?”

    “정말 극구 우리 도사님이 와야 한다고 하던데요.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직접 오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겠다라.

    음, 이건 안 되겠다.

    설 회장한테 보고해야지.

    당연하지만 이를 들은 설양훈은 몹시 격정적인 분노를 토로했다.

    “허···. 이놈이 끝까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네요.”

    화를 내는 회장을 상대로, 조심스럽게 용무를 꺼냈다.

    여러 썰들과 낚시가 난무하지만 어쨌건 거의 모든 비밀은 설 회장이 쥐고 있다.

    그걸 캐내려고 할 때 근거가 필요할 뿐.

    그런데 그 근거가 사주라 섣불리 확정을 하기가 어렵지만.

    설양훈의 나름의 관대함을 믿고 깝쳐 보겠다.

    “회장님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화가 나신 상태라서 지금 말씀드리기가 조금 그런데.”

    설 회장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이 감정에 휘말리면 괜히 그 분노의 감정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투하된다.

    “아, 아아 아니에요. 원래 이런 놈이라, 말씀하세요.”

    “조금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설양훈이 심력을 다스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어쩌면 역린일지도 모를 것을 파고들었다.

    “저건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은 장남분께 매우 큰 마음의 짐이 있어 보입니다.”

    “그랬나요?”

    설양훈의 설정환에 대한 죄책감에 가까워 보일 정도의 집착을 나는 알고 있다.

    설정환 자서전을 적으려고 설은겸에게 이야기 등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힌트가 있었고 사주와 현상을 통해서, 확실치는 않은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저는 회장님을 거의 1년 가까이 모시고 회장님 자식들의 사주를 모아 왔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근거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소설일까요.”

    “회장님, 왜 설정환 회장을 두고 유학 가신 겁니까?”

    “······.”

    설양훈은 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았었다.

    왜냐면, 두고 갔거든.

    아무리 그 시절이 그런 시절이어도 처음 본 아들을 놔두고 유학을 가는 게 말이 되냐.

    처음 보고 그 말부터 위화감을 느꼈지만, 회장을 지켜본 결과 자식에 대한 애석함은 진짜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 현상을 보고 사주로 파고들어 가다가 여러 증거들이 발견됐다.

    설정환은 능력이 있음에도 승계에서 다소 밀려 있었다.

    설씨가 6남매는 설정환 빼면 죄다 결혼한 집안이 빵빵하다.

    설윤환은 유력 정치가의 딸, 설재영 설윤영은 서울의 재벌가.

    심지어 설민혁도 이제 정치가 딸이다.

    그러나 설정환만 그냥 한미한 가문의 미스코리아 출신과 결혼했다.

    이건 아들의 자율적인 결혼을 말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기대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설정환 회장의 어머니 운은 텅 비어 있더군요.”

    “그래요?”

    “나머지 설재영, 설윤영, 설혜영, 설윤환 모두 어머니 운이 있는데요. 심지어 설민혁조차도.”

    이어, 설씨네 형제들 사주를 모두 입수했는데.

    아버지 운이 공통적으로 강하지만.

    어머니 운이 없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딱 한 명, 설정환 회장만 어머니 운이 박살이 나 있었다.

    “무슨 뜻이냐면, 아비가 회초리를 들 때 감싸 줄 어미가 없어 홀로 매를 맞는 격입니다. 형제 대신 매를 맞는 사주지요.”

    “······.”

    “저는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을 둘째가 다시금 농간을 부리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고선 이런 내용으로 낚을 리가 없습니다.”

    어느 시점인가.

    기존에 설윤환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던 스카이피아의 지분들이 설정환에게로 이동했다.

    노승환 등에게 들은 이야기다.

    저 시기에 기업 뉴스 몇 개를 뒤져 보는데.

    유전자 검식 기술 상용화가 있더라고.

    그쯤에 드라마 몇 개 챙겨 보니까, 그즈음부터 친생자검사 결과지가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전 드라마들도 요약을 찾아봤는데.

    그전까지는 출생의 비밀에 관련한 드라마가 죄다 누군가의 증언 등의 작위적인 뭔가로 얽혀 있고.

    그 증언을 해 줄 사람들이 주요인물로 존재한다.

    아기 바꿔치기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엄마인 척한 이모라거나, 그에 동조하고 뇌물을 챙긴 양심선언하는 산부인과 의사라거나.

    그 시대의 변화와, 설정환 승계작업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맞물린다.

    이어 오해 등등 주변인들의 증언.

    그리고 미신을 나름 믿지만 근거와 이성을 찾는 성향까지.

    ‘오해가 있었고, 그것이 풀렸다.’

    “저는 그쯤에 어르신이 확신을 했다고 봅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여기서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끊을 때가 됐다.

    어디까지 쥐고 있는지는 말하라고 할 때까진 말 안 하는 게 좋고.

    허윤식에게 들었던 내용이나 설정환의 유언대로라면 아버지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병 자체는 아버지의 불신과 매가 불렀을지 모르나.

    그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노인네 건강을 걱정해 죽음을 알리지 않을 것을 당부하며 죽었다.

    “하하, 선생. 너무 깊이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설양훈이 목소리 낮추고 노려보는데 솔직히 무섭다.

    근데 여기서 아이고 무서워하면 안 된다.

    사주쟁이다. 내 미래를 모르고 불안해하는 양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님한테 가장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설 회장이 한참 날 지그시 쳐다봤다. 노려봤다고 하는 게 맞겠다.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설양훈은 이내 피식하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곧장 부르겠습니다.”

    영감의 눈시울이 붉어져서 순순히 물러섰다.

    나가자마자 통곡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진짜 우는지는 모르겠다.

    한참 후에 다시 호출을 받고 들어갔다.

    엥, 진짜 울었나 보네 영감.

    그 이상은 모르겠는데 아마 설정환이 혼외자였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

    그러다 보니 사촌 집에 숨겨 길렀던 것이고, 설정환 친모의 신분을 대단히 불신했기 때문에 의구심을 품어 왔지 않을까.

    그럼에도 체면이 있어 대놓고 박대하진 않았을 것이나, 자식은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설정환이 설민혁에게 유독 잘해 줬다는 말도 어쩌면 힌트였을 수도 있었다.

    “···대단하군요, 이건···. 기어이 파헤쳤던 그 둘째 놈밖에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밝혀져도 상관이 없지요. 30년 넘게 의심하던 내가 부끄러울 뿐이지.”

    “부인은 아셨겠지만, 뭐 부인을 통제하는 힘이 강하시니까요.”

    회장 사모님은 알지 않았나 싶어, 넌지시 물었다.

    “집사람은 조카인 줄 알고 잘해 줬어요. 뭐 그 녀석은 그렇게 느끼지 않은 모양이지만.”

    사촌에게서 힌트가 있었다.

    마치 거두어 기른 양자인 양 행세한 모양이다.

    “아, 그만하셔도 됩니다.”

    “음?”

    “더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로 하겠습니다.”

    설양훈이 몹시 민망해하니 모르쇠 할 생각이다.

    영감이 죽을 때까지 안고 가고 싶을 수도 있는 일.

    “나는 그래도 알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세워 오신 리더십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늙으니 그것도 무상하군요.”

    상마초여도 나이 들면 눈물 많아지고 연약해지는 게 정상이다.

    그래도 체면을 지킬 거라고 생각해서 더 캐지 않으려고 했는데 설양훈은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본디 저는 듣는 것이 직업이죠. 말씀하신다면 듣겠습니다.”

    거의 짐작한 대로였다.

    뭐 다 털어놓는다고 해도 잘못은 교묘하게 감추겠지만, 아버지로서 잘못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나름 진실성이 있다.

    의심해 오다 친자임을 깨달은 이후에도 태도를 바꾸는 게 어색하여 냉랭하게 대했던 것이 몹시 미안한 모양으로.

    손자, 손녀에게 잘하는 것으로 그 부채의식을 풀고자 했다.

    아들한테는 못하던 걸 손녀들에게 베풀던 나쁜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아버지들에겐 흔하다. 엄한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가 되는 인간상.

    이거 거의 고해성사인데.

    “평생의 한이 되신다면 그걸로 된 겁니다.”

    설정환이 가엽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의 손님을 위로했다.

    그 토로와 위로 한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설양훈의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 농담처럼 말했다.

    “아, 근데 오히려 들은 게 부담스럽네요. 오늘 들은 고민은 무게감이.”

    “당장, 식부터 올립시다.”

    “예에?!”

    “은겸이를 옆에 끼고 허구한 날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 꼴 못 봅니다. 결혼을 하고 그러든가, 그게 안 되면 유겸이라도 데리고 살든가 하세요.”

    귀에 신물 나게 하는 영감님 잔소린데, 이번엔 좀 세게 미네.

    “결론이 왜?”

    “모르고 묻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근데 그러시지 않아도 어디다 말하진 않을 겁니다.”

    당황해서 그렇지, 모르고 묻는 건 아니다.

    입막음이겠다.

    사실 이 정도로 알고 있으면 입막음이 당연해질 것이고.

    그 임계점이 넘으면 회유가 아니라 협박으로 이어질 것이라.

    듣지는 않으려 한 것인데, 본인이 털어놨으니.

    거기다 아마,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기어코 봐서.

    꿀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을 불식시키고 싶은 생각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선생을 믿지만, 신뢰는 거래로 구축되는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영감도 은근 명언을 달고 산다.

    “서울에 빈집이 몇 채 있어요. 안 팔려서 세금만 잔뜩 물고 있는데.”

    “예?”

    “두 채 정도 처분을 해야 할 거 같은데, 하나는 유겸이한테 줄까 합니다. 그리고 한 채는···. 선생이 맡아 두어도 괜찮겠지요.”

    수도권 자택.

    명승 선생님의 선물인 주거운 9레벨이 이렇게 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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