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5월의 소녀.
설은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가슴에 손 올리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설은겸이라고 합니다.”
“설은겸. 와 이름도 예···.”
민혁아, 말하다 보니 싸하지?
눈치는 있네 그래도.
“예 뭐?”
“······어.”
설은겸은 날 보며 말했다.
“저 알 거 같아요. 이 아저씨.”
그러고는 반쯤 눈을 치켜뜨며 설민혁을 팔짱 끼고 노려본다.
굳어 버린 설민혁에게 힌트 한 마디는 더 줬다.
“어, 같은 설씨네?”
설민혁 눈 돌아가는 게 보인다.
설은겸 한 번 봤다가 날 보면서 무언으로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 안 했다.
어디까지 생쇼 하나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이것도 약점 잡으면 잡히는 사안이다.
설 회장한테 조카 꼬시려고 했대요~ 한 마디면 이번에야말로 아버지한테 맞을 거 같다.
끝내 설민혁은 박수를 짝! 치면서 다급하게 속사포로 말했다.
“이야, 야하하하, 선생 내 조카 남친이었구나. 아이고 조만간 결혼도 하겠구나아. 이야, 이거 대박이네에.”
“오바 하지 마.”
“아 그, 그 그래?”
“무슨 일이세요?”
오, 은겸이 목소리 내리깔았어.
“조카님 무섭다. 원래 무서워?”
조카님. 아놔, 빵 터지네.
“네 소문을 듣고 여자애들이 좋아하기 힘들지 않냐?”
“아 조카님, 저 그렇게 여자 좋아하고 무분별한 거 맞는데요. 그래도 조카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아니고.”
첫 조우가 가히 최악일세.
* * *
설민혁과는 따로 다시 만났다.
이태현 자금 때문에 부른 것이라.
“그 돈을 맡으라고?”
“네 돈은 아니야, 큰형이 둘째 형 주라고 남긴 돈이지.”
“아, 나, 이거 건너 건너 주워들은 게 하나 있긴 한데.”
“음?”
“아, 확실한 건 아냐. 근데 좀 무섭네. 차라리 혜영 누나한테 맡기는 건 어떠냐?”
놀라운 대사였다.
“누나라고 부른다?”
“그럼 뭐라 할까, X년?”
“존나 싫어하더만.”
“어···.”
“뭐 갑자기 잘해 주디? 그거 내가 시킨 건데.”
“알지, 본인도 그렇게 말하는데 말야. 그 누나가 날 진짜 최고로 많이 괴롭혔다? 그 고추 잡아당긴 것도 그 누나야.”
“용서 못 하지 않았냐.”
“근데 세 년 중에 유일하게 자기가 내 누나랬어.”
“······.”
참 설민혁도 불쌍한 인간이다.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게 보인다.
긍정적인 관심을 주기 시작하니까 사람이 바뀌는 게 보이는데.
언제고 그 긍정적인 관심을 잃을지 몰라서 지금껏 쓰고 살아온 부정적 관심을 흡수하는 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전화 올 때도 누나 미운데 왜 전화하냐고 하고.”
“인정욕구에 메말랐던 놈 같으니.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이구먼.”
“뭐, 나도 어렸으니까.”
그러니까, 설혜영이 ‘난 네 누나다.’라고 한 한마디가 설민혁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나머진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래서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몰랐어. 말도 못 붙였지. 근데 혜영 누나는 누나라고 하면 화를 내고 때려도 그러지 말란 말은 안 하더라고.”
다른 누이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다면,
막내 누나인 설혜영은 나쁜 누나라서 괴롭힌 것에 가깝다고 느낀 모양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많이 괴롭힘을 당한 듯하고 피해자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으나.
“나이 차 꽤 나는 막내였으니까, 자기가 권위를 내세우고 싶은 아랫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길 누나라고 내세웠던 한마디가 그리 나쁘지 않은 인식을 심어 주고 있었다.
인정욕구라는 게 무섭게 사람을 변모시킨다는 것을 익히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드러나니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손님이 온다면 좀 더 그들을 인정하는 식으로 감평해야겠다.
“그리고 정환이 형은, 진짜로 내 유일한 형이었어. 영감이나··· 울 엄마도 날 그렇게 챙겨 준 적이 없거든. 일단 그러면 나나 혜영 누나 쪽이 해서 한번 맡아는 볼게.”
“너 생각보다 의리 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정환이 형 자식들은 내 조카 맞다. 챙겨 줘야지 삼촌이 용돈 한 번 안 줬는데.”
“흠···.”
괴롭히지도 않고 동생 취급해 준 형에 대해서 설민혁은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동생 대신 아버지에게 회초리 맞는 장남의 사주 같았는데.
이런 동생이어도 해당했나 보군.
하기야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동생도 있는데, 그냥 사고만 치는 동생이면 오히려 양호하다.
고추 떼 버릴 정도로 괴롭힌 누나도 용서할 정도면 그럴 만도 하다.
“어, 일단 8월에 관둘 거니까, 그때 얘기해 볼게. 당장은 정치하는 사람 밑이니까 그런 돈 쥐고 있으면 안 돼.”
“쫄지 마. 너도 전직 정치인 보좌관 겸, 회장 아들이다. 뭔 일 났을 때 사건의 파급력이 커. 정치적 테러일 수도 상속 분쟁 문제일 수도 있는 거다.”
나도 그렇지만 설민혁도 사회적 타이틀을 점차 달아 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영감한테 이르지 말자···.”
“뭘 일러.”
“조카한테 뻘소리 한 것에 대해 공식으로 사죄드립니다.”
놀림거리야 되겠지만, 그걸 뭐 굳이 본인 입으로 말을 하나 싶어 타박했다.
“야, 그런 건 그냥 모른 척해. 그거 괜히 말하니까, 네 의도가 더 불순해 보이잖아.”
“그, 그런가? 결단코 그런 생각 없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너 결혼 준비한다며 미친놈아!?”
오늘도 설민혁을 때린다.
내가 때리지 않으면 국회의원 사위 구타 살인사건으로 큰일 날 거 같다.
* * *
나는 철학관을 찾은 손님 중에 이렇게 웃음이 넘치게 찾아와서는 계속 방긋방긋 미소 짓고 소개팅 리액션 보이는 손님을···.
처음 봤다.
“헤헤, 귀여우시다. 완전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손 뻗어 내 앞머리를 치우고 얼굴 전체를 보기에 좀 놀라긴 했다.
당시 눈을 못 봤는데, 눈빛이 무척 서글서글하다.
웃는 낯은 절로 사람을 미소 짓게 한다.
사주대로의 인간이라면 굳이 속내를 감추지 않는 여자이다.
누구랑 정반대.
사주로도 꽤 다르다.
열정 자체가 있는 건 유전인지 똑같지만.
감춘 열정과 드러난 열정이다.
“이 남자랑 잘될지 궁금해요. 사주만 있거든요.”
“알고 말하시는 거 아녜요?”
“네.”
낀 팔짱으로 가슴을 받치고 책상 너머로 고개를 기울여서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보고 말한다.
무지하게 직설적이구먼.
이 사주는 내 사주고.
상대는 설유겸이다. 사주를 미리 입수해서 알 것 같다.
뭔가 예상하던 대로 일이 이뤄지니, 정말 내가 용해지나 싶기도 하고.
미래가 점차로 예측이 되어 가네.
“일단 여자분은 여름의 햇살이네요.”
“5월생인데요?”
“사주학에서 여름은 햇살의 길이로 판단하거든요, 햇님이 6월 전으로 아주 길 때라서 여름으로 봐요.”
“햇님이요? 말을 귀엽게 하신다. 아, 근데 왜 애 취급해요?”
“말을 귀엽게, 어리게, 예쁘게 하는 걸 좋아할걸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고 인형 좋아하고 핑크 좋아하고.”
“핑크색!”
여성은 애교 많은 사주여도 속내를 잘 감추는 면모가 뛰어나나.
그건 사회적 생존의 차원이다.
‘너 빻았어.’를 아무한테나 난사할 수 없는 그들 사회의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고, 앞날에 먹고살 걱정이 없다면 그렇지 않은 모양새가 종종 나온다.
설유겸이 딱 그러하다.
사람은 동물적 서열 본능이 여전해서 너무 고강한 배경을 가졌으면,
그 배경을 가진 자가 제멋대로 하는 것에 사회적 제약을 걸지 않는다.
즉 귀여운 척을 맘껏 해도 누가 감히 재수 없다, 꼴사납다 등의 견제구가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맑고 싱그러운 한낮의 오후로 빛을 뿜어 대고 있습니다. 맑고 밝은 세상의 활기찬 사람들을 모두 내려다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지요, 그 안에 나무도 바위산도 들판도 이 빛을 기뻐하지요.”
“우와아.”
아이돌 인터뷰 보고 연습한 듯한 리액션이다.
견제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므로, 진심일 거라는 거.
그거 견제 넣을 사람 세상에 딱 둘 정도 있을 것이다.
“단지, 하늘의 빛이 스스로가 어떨까를 궁금해하여 자신을 비춰 줄 물의 잔상을 찾는데 그게 작은 웅덩이라 그 빛과 하늘을 모두 담지 못하는 사주다. 이렇게 봅니다.”
“저를 비춰 주는 물의 반사?”
“그러니까 지금의 내 모습과 능력을 끊임없이 누군가한테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이런 사주의 사람은 뭔가를 보여 주는 쪽으로 운기가 풀립니다. 주로 그림, 스케치 이런 거 잘하고.”
“우와아, 사주 진짜 잘 보신다.”
“레이스 옷 좋아하고, 그림 좋아하다 보면 인터넷에 그림 잘 그린 사람들 일러스트도 좋아하게 되고.”
“헤헤헤.”
사주 보러 온 거냐, 진짜 맞선 보러 온 거냐.
근데 이 만남의 의도가 맞선은 맞다.
다만 나는 이게 꼬시려고 작정하고 온 건지, 원래 이런 건지를 살짝 감을 못 잡고 있었는데.
사주를 보면 원래 이런 사람이다.
표현 많고, 애교 많고, 러블리함 추구하며, 소녀심 충만한 핑크 덕후.
그러면 사주에 무게를 두고 설유겸을 보겠다.
“그래서 예술 쪽 전공을 주로 하고요, 자신의 미모도 모델을 할 정도로 아리땁게 가꾸거나, 아니면 아예 그렇게 태어납니다.”
“어, 좋아하긴 했는데 나중에 해야 할 거 같아요.”
뭘 하다가 재수하게 됐는지 등은 알고 있다.
미술 쪽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미술이 아니다.
영감이 아버지 사후에 손녀 집안 교육에 몇 마디 한 모양인데.
적당히 먹고사는 데야 문제가 없지만.
회장 집안으로 살아오던 집구석이라, 그 전처럼 살기 위해선 결국 많은 돈을 거머쥔 할아버지의 개입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할배는 꼰대라.
소녀심 담긴 어린 그림에 ‘애들 그림이냐.’
미소녀 그림 등에 ‘에잉, 망측해’ 하는 스타일이다.
원래는 ‘미술품 볼 줄 아는 애도 집안에 있어야 하니 대학을 좋은 곳에 보낼까.’였다가.
‘일찍 시집을 보낼까?’로 태세 전환한 것에서 볼 때···.
“그러면 여기 이 스물아홉 살 아조씨는 잘 맞아요?”
아조씨가 되었다.
“잘 맞습니다.”
은겸이 로비 받았지만 거짓말은 안 한다.
“정말요? 와아.”
“열정과 냉정입니다. 유겸 씨는 뜨거운 열정을 타고난 사주예요. 아름다운 것과 어여쁜 것을 좋아하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사주인 겁니다. 이러면 감각적이고 디테일에 능합니다.”
아름다운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없지. 뻔한 말이다.
열정이 있다는 건 표현을 해 줘야 하니.
“열정, 뭔가 멋있어요.”
“대신 작은 것에 치우쳐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위의 남성은 지성이 발달해 상당히 냉정한 편이고 디테일보다 큰 그림을 보는 데 능합니다. 이 때문에 냉철한 사람에게 인생을 맡겨 보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겠죠.”
“재밌다, 그렇구나. 좋은 분 찾아주셨구나. 귀엽고. 나이 그렇게 안 많아 보이고.”
책상에 상체 올리고 양손에 턱 괴고 환하게 웃는데, 아 닮긴 닮았네.
젖살이 조금 덜 빠진···. 연상시키는 다른 모습이라.
“뭐가 재밌어요?”
“할아버지나 막 그런 사람들이 결혼하라고 정해 주고, 그 상황이요.”
“일찍 결혼하고 싶어서?”
“네에!”
“연애 안 해 보셨구나.”
“거짓말이시죠?”
주어 목적어가 없었지만 바로 알아들었다.
“미인 사주라고 한 거요?”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좋다는 애들은 있었어요. 애들이었지만! 근데 잘된 적이 없어요.”
연애에 환상이 깊은 스타일.
그 환상이 채워지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고, 취향은 확고하다.
그리고 환상을 상대에게 자꾸 갈구해서 연애도 어렵고, 연애 지속력도 어렵다.
특히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데, 저 어린 나이에 잘생긴 사람은 아예 등처 먹을 생각 아니고는 배경이 너무 커서 부담스러워한다.
20살에 결혼이야기 도는데, 또래가 맴돌려고 할까?
그런 잘생긴 20살 남자가 있으면 20대 한창 즐기고 결혼할 것이다.
“맑은 하늘의 햇빛이라 세상에 뿌리는 건 많은데, 거울이 작아서 돌려주는 건 적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물웅덩이를 향해 집중적으로 직사광선을 쏘는데 그럼 그 웅덩이는 말라 버려요.”
“으아아?!”
“그래서 바다 정도에는 햇살을 쏴야 돌려받아요. 아마 변태 남자 만나야.”
“변태···라니, 어떤 변태? 야한 거요? 우와.”
양손으로 입 가리는 거 보소.
맞춰 줄 놈이 성욕에 미친놈밖에 없다는 소립니다.
남자가 못 견딘다는 이야기다.
관심을 갈구하기 위해 뭐라도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집착에 대한 확인을 남자들이 좋아하는 그걸로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
가슴 만질래? 이게 되는 끼쟁이인 것.
지금까지는 은겸이와 비슷한 사유인 과보호가 있어, 별일이 없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냥 애초에 외모와 비견하여 남자 복이 적은 것.
오롯이 성욕에 미쳤으나 대안 없는 남자면 이 여자와 해야 되니까, 이 여성의 관심 갈구를 수용할 참을성이 되어 짝이 잘 맞는다.
“변태세요!?”
“누구요.”
“그, 그 이 아조씨요.”
아조씨란 말 슬슬 들을 나이이긴 한데, 들으니까.
그냥 아저씨보단 좀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여기서 몰아가 섹드립을 치게 할 수도 있지만 누구 여동생이니 자제한다.
대화하면서 얼추 파악이 됐으니···.
피니시 기술을 써 볼까.
“근데, 왜 이렇게 아름답게만 봐요?”
“응 뭐가요?”
“감정이 이렇게 매일···. 뭐라고 해야 되나. 하이하지는 않잖아요?”
설유겸에겐 과장된 텐션과 표현이 엿보인다.
이게 진정으로 나온 행위라고 해도 유독 과하다.
원인은 진짜 날 잘 봐서 호들갑을 떤다든가, 사주가 너무 신기하다든가의 원인이 있겠지만.
설유겸이 사주대로의 인간임은 대화를 나눠 보니 알겠다.
그러면···.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사람은요, 그 빈구석이 깊어요.”
사람은 사주로 볼 때 다섯 가지 면이 있다.
다섯 가지를 모두 꼬집어 낼 수 없다면 두 가지 면모가 있다.
겉과 속, 음과 양.
사주로는 그중 가장 잘 맞는 한 개의 포인트를 잡아 그 캐릭터성을 위주로 판별하지만.
도덕적인 사람도 음습한 취향 정도는 있기 마련이고.
악한 사람도 속내에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정도는 있고.
보편적으로 냉정한 사람도 새끼고양이를 보며 귀엽네··· 하는 속내가 있고.
보편적으로 열정적인 사람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도 관심 주고 싶지도 관심받고 싶지도 않은 귀찮은 날이 있다.
“나는 그 빈구석이 듣고 싶네요. 뭔 상처나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활달한 척 즐거운 척 예쁜 척을 해요?”
“뜨아···아, 뭐예요? 척이라고요?”
설유겸은 살짝 실망하는 티를 내는데, 실망시킨 게 미안할 정도다.
그게 미안해서 실망을 못 시키는 게 미인의 위력인데.
의도적으로 실망시킨 거라 상관없다.
“척을 안 해도 예쁜 사람이거든. 솔직히 외모도 몸매도 눈길이 가요. 되게 매력적인 여성이야. 근데 원래 이러면, 세상에 아쉬울 게 없어서 애교를 품지 않거든. 애교는 니들이 해라. 이게 되거든.”
특히 이렇게 외면과 아름다움, 애교에 치중하는 사람은 반드시 속이 비어 있고, 속이 비어 있다고 하면 놀란다.
그리고 그걸 파고드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사연이 반드시 있고.
사연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갖고 있다.
그 사연이 없다면 내면의 음습함이 정당화가 안 되거든.
“애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아쉽고, 자신이 바라거나 지고 있다 인식될 때 하는 겁니다. 유겸 양은 나한테 지고 있나요?”
“어, 어, 아 뭐가 지고 있지?”
당황에도 끼 부리면서 하네.
몰아가서 캐낼 수 있는 내면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그걸 하나 쥐면···?
위 사람은 내게 비밀을 털어놓은 사이가 되고, 그 비밀을 토대로 결속을 다질 수 있다.
* * *
얼마 전 은겸이는 일시키고 싶으니까, 유겸이 함 만나라도 보라고 하던 설 회장이 남긴 전언이 있다.
[걔가 선생 얼굴 보고 귀엽다네요. 나이 말하니까 놀래요.]
노인네 변덕하고는.
설양훈의 권고는 충성심 테스트가 맞다고 봤지만.
속내가 안 묻어 있지는 않았다.
그 속내는 나나 설은겸 둘 다 ‘일 시키고 싶다.’인 것이라.
그 영감이 내심 내어놓은 해답은 나를 다른 쪽에 붙이자 한 것이고.
내가 낸 해답은 내가 더 아깝게, 체급을 키우겠다인 것.
그런데 설양훈이 놓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그 모두를 내 의도로 돌아가게 영향력을 끼치면, 그때부턴···.
영감의 의도대로 휘말려 줄 필요가 없다는 거.
설혜영도 이미 반쯤 통제되고 있는데, 설유겸까지 그렇게 되면?
영감이 가진 패가 죄다 내 손아귀에 떨어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