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괴편지
이하영과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구청에서 남자 화장실까지 들어가면서 밀담을 하고자 했다.
솔직히 당시 그건 너무 오버 아닌가 했다.
황혜민 부모의 시위도 떠오른다.
그냥 자식 잃은 부모의 흔한 음모론적 시각일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그때 언급되던 의원 및 뭐 경찰, 모 구청장.
이번에 다른 건이지만 실형을 먹었고.
그 사람의 대형 비리를 수습할 사람으로 각광을 받으며 캠프에서 여러 사람이 달라붙던 게 김정석이다.
거기다 혹시 몰라 이하영이나 황혜민 등이 있었던 종교적 복지 시설의 인허가 시기를 찾아보는데….
복지국장으로 역임하던 시절이랑 딱 들어맞는다.
좀 소름 돋는다.
나는 증거가 3개 정도 맞물리면 거기부터는 의심한다.
그러던 찰나 토론회가 끝났다.
“후보님.”
“어, 야 너 좋았다. 말문이 턱 막혀가 우찌해야 되나 그러고 있었드마는.”
“그 경선 통과하시면 말이죠.”
“왜 이리 진지하나? 뭐 있나.”
“김정석 후보…. 혹시나 캠프에 들이지 마세요.”
“으이?”
한 당에서 같이 경쟁한 후보이자 패장은 선거 캠프로 들이는 게 관례였다.
당연하겠지만 같은 동지들끼리 경쟁을 한 것인데,
그 동지마저 못 감싼다면 그 사람의 지도력에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게 안 되어서 망한 사람들 정치판에 몇 다스다.
고로 이 제안은 김병용이 듣기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본선에서 만날 양반이 한물갔다고는 해도, 그래도 저 김정석 씨 세를 못 봤나? 안 받아 주면 그 지지자들이.”
“흐음, 당장은 큰 이득이 될 겁니다. 그런데 나중엔 곤욕을 치르실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사주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젠 사주라고 우기면 누군가는 믿을 수도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보통은 안 믿으니까, 이건 사주가 아니라 현실의 일이다.
이미 일어난 현상이다, 등등으로 설득한다.
근데, 내가 안 되겠네.
‘응 다 사주고 다 맞아, 사주는 신기해.’
이건 내 입으로 잘 안 나온다.
그렇진 않으니까.
“다른 근거가 몇 개 존재합니다. 개인적 체험이라 이걸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어떤 일이 있었는데?”
“정황 세 개가 저 사람을 믿지… 아이쿠.”
그 얘기 한참 하고 있는데 김정석이 다가온다.
뒷담화나 마찬가지인데 다 들켰겠네.
“좋은 토론이었습니다.”
“아, 예 재밌었습니다.”
“아까 봤습니다. 알려 주시는 거 부정행위 아닙니까, 그거.”
김정석이 살짝 웃으며 볼멘소리를 한다.
그냥 피식 웃어 주었다.
볼멘소리는 나한테 했지만 김병용 앞에서는 후보님 후보님 하면서 친근하게 굴고.
악수 한 번 더 나누더니 먼저 사라진다.
김병용은 그 모습이 사내답다라고 보는 모양이다.
“이렇게 뭐 맞상대는 하고 있지만, 사람 괜찮은 거 같다. 끝나면 술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흔쾌히 도와줄 것도 같고.”
“뭐 뜻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그냥 불안에 불과하거든요.”
“그러냐?”
세상에는 묻히는 비리나 커넥션이 훨씬 많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의 일을 사정 기관이 다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음주운전에 걸린 사람들이 딱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듯.
수많은 비리와 커넥션이 있었겠지만, 드러나는 건 어쩌다 나오는 것 정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사립학교에서 대놓고 수천만 원에서 억에 달하는 공납금, 재단 기부금으로 선생 뽑는 건 사대생들이면 다 알고 있고.
몇 곳의 학교에서 실제로 하는 것을 봤지만.
청문회에서나 의혹으로 한두 번 언급되고 말더라고.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내 일은 아니라서.”
“자슥이 정 없게 그런 말을 하나, 알겠다. 믿으마, 네가 모아 온 사람들이 한둘이가, 여기서 한 번 더 하려면 저 아저씨가 아니라 네가 있어야 쓰겄다.”
솔직히 말해서 사주로 의심하는 것도 이상하고 저 사실만 가지고 몰아가기도 어렵다.
상식적으로 저 정도 공직자로 퇴임한 사람이면 그런 무리수를 두거나 엄한 종교를 믿었을까?
자선 단체, 복지 단체 이끈다는 사람들이 일단 있으면 정치인들은 그 사람들 옆에 가서 얼굴 사진부터 박기 바쁜 것이 기본이고.
그들이 그 높으신 분들과의 사진을 엄한 데 활용하기 시작하면 의혹이 불똥이 튀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물론 저 아저씨는 우연이 세 겹이라 많이 의심스럽지만.
“거 그놈의 용화미륵교인가는 기어이 또 살아나서 그 지랄인 모양이다?”
“뭐, 제대로 운영하려면 이름 바꾸고 다른 지부로 기어 들어가야 할걸요?”
2대 교주가 세워졌다 이 정도로는 뭐 센세이션은 없을 것 같다.
느낌이 황혜민 같기는 한데….
그 양반이 거기서 행복하다면 나야 굳이 개입할 이유 없다.
사주강화술 남은 포인트 박박 긁어모으려 그래야 하나?
천용화가 남긴 용화미륵의 자산을 먹으면 아마 그 나이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걸.
* * *
여론조사 경선 바로 다음날, 주민 투표 경선 당일이다.
경선 투표장은 도당에서 섭외한 모 체육관이다.
투표장 근처에서 선거 운동 등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쪽은 나왔단다.”
“그럼 가야죠.”
“그래도 되나?”
“니가 하면 나도 한다, 물을 타라가 정치판 기본 생리 아닙니까. 적당히 고급지게 하면 상관없어요. 후보님은 계세요.”
김정석 쪽은 투표장과는 몇 미터 길목에서 기호 같은 거 안 달고 투표 독려 및 인사하고 있었다.
딱히 이름을 안 알려도 휴일도 없는 선거 날에 시간 내어 투표하러 온 시민 경선 참여자들은 이미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 알 것인데.
정말 관심도 없이 있다가 가라니까, 불려 온 사람들의 경우는 헷갈릴 가능성도 있다.
하필 성도 둘 다 김씨라.
저쪽은 진짜로 김정석이 직접 나와 인사하고 있다.
선거법은 잘 모르지만 저건 해괴해 보여서 일단 줌 카메라로 찍어서 채증은 해 놨다.
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선거법은 무서우니, 명승철학관 광고 피켓을 화이트보드 하나 사다가 마카로 적어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연히’ 이 근방에서 내 사업장 ‘명승철학관’을 홍보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인데.
김병용이 동원할 수 있었던 열성 당원들이나 재향군인회, 예비역들은 날 몰라보겠지만.
“아이 자네가 여깄는가.”
“어 어르신, 또 뵈죠? 것 봐 자주 본다니까.”
“어머 선생님이 여기 계세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이야, 하하하 선생님, 곧 둘째 봅니다.”
“오늘 쉬세요?”
나를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인사하고 지나친다.
은유로 김병용 돕는 느낌은 다 냈으니 알겠지.
그리고….
내가 부른 사람들이 소녀보살을 제외하고 전부 왔다.
“여기서 이런 걸 해도 돼요?”
전화를 돌릴 당시에는 안 받았지만, 그 후에 개인적으로 부른 사람들이 있는데.
“어 부끄러우니까, 언능 들어가라.”
“전주 이렇게 올 거였으면서….”
저 녀석까지 와 줄 줄은 몰랐네.
서로 보기 쑥스러운 사람까지 와 줄 정도라니….
이어 오후가 되자, 김병용도 투표 및 개표장에 도착한다.
당 내부 경선이라 사무실에서 지켜보지 않고 모여서 개표하는 모양.
뒤이어서는 당 선거 협의회에서 내려와 두 후보와 인사하고 경선 종료와 함께 개표 선언을 한다.
총 투표인 수가 1,000표 조금 넘는 수준이라, 개표가 빠르지만.
먼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로는 가히 압승이다.
이러면 주민 투표 경선에서 한 표도 안 나오는 결과가 아니고선 승리다.
여론조사만 따도 유력이 떠 버릴 정도다.
박수만 나오길래 방송에서 본 그대로 한번 내가 먼저 손을 들고 선창했다.
“김병용, 김병용.”
그러자 모인 지지자들과 가족들 우리 캠프에서 마찬가지로 환호가 터져 나온다.
“김병용, 김병용!”
경선 결과.
김병용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지역민 경선 투표에서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과반을 달성해 승리했다.
여론조사는 뉴전북신문에 의뢰해 하루마다 뽑은 조사가 있었는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전 굴지의 기업’ 스카이피아의 투자설이 돈 것이다.
그때부터 앞서던 수준에서 압승으로 변했다.
설혜영과 현 사장인 노승환의 부인이 나와 준 게 유효했다.
‘기업 투자 유치가 그냥 와따구만.’
용화미륵교고 지역 내 현안이고 뭐고 별반 판세를 흔들지 못했다.
충남 세종 대형 건설사 임원진과 그 집 금지옥엽이 선거 도우려고 내려왔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마자 그냥 여론조사가 치솟았다.
결국 정치도 돈이고, 백이다.
“당선, 김병용.”
마지막으로 중앙당 선거협의회장인 당직자가 선포하면서 김병용의 경선은 마무리됐다.
꽃가루 팍 터지고 꽃다발들이 몰려들었다.
지역 기자들 뿐 이나라 중앙지에서도 몇이 와서 인터뷰를 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정석 쪽을 보았다.
승자의 기쁨을 즐기는 자보다 패배의 쓴 잔을 마시는 쪽이 더 궁금하다.
김정석 후보는 박수만 조금 치다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는데.
날 슬쩍 흘깃한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그를 웃으면서 허리를 아주 90도로 굽혀 인사했는데,
받지도 않고 휙 돌아가서 가 버린다.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했는데, 먹이는 진심이 느껴졌을까?
나는 진심으로 ‘퇴직금깨나 날렸을 건데 가정의 평화가 있길.’하고 기원했다.
이어 김병용은 머리에 꽃가루와 당선 띠를 차고 와서 나한테 악수를 청한다.
“고생 많았다.”
“기업인들이 와서 그렇게 된 건데요 뭐.”
“그래도 시민 경선에서는 질 수도 있었어. 저쪽이 실투표로 부정 선거다 재경선 주장하려고 했었잖나.”
그래도 주민 투표 경선에서는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교회와 문화예술회관, 신시가지파, 그리고 정체불명의 복지관 시민 단체를 동원한 김정석의 동원력도 여간하지는 않았던 것.
여론조사상 우세였어도 실투표에 가산이 조금 더 있어, 밀렸다면 골치 아플 뻔했다.
여론조사 열세를 안 김정석 측은 실투표로 역전한 뒤, 여론조사 참여한 사람들의 실투표 중복 참여를 주장해 경선판을 엎을 계산도 있었던 모양이나.
실투표도 김병용이 과반을 넘어 승리했다.
저쪽이 주장할 그 어떤 무기조차 봉쇄하는 깔끔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니 덕이다, 그 구민 강좌 양반들이 그리 줄줄이 나와주실 줄은 나도 몰랐다.”
비밀투표라서 알 수야 없지만, 김병용 쪽에서 동원한 사람들은 몰라도 김병용을 찍었을 것이고 김정석이 동원한 사람들은 김정석을 몰라도 김정석을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맞았다.
그런 면에서 김병용 쪽에 있으며 손님과 제자들을 끌어모은 내가 공이 분명 있었다.
부른 사람들이 다 오는 기적이 벌어졌으니까.
<지지자운 LV8>
병력으론 50~200명, 인력으로는 1,000명의 시위자까지 동원 가능.
기초표심 1,000~5,000명 보장.
이 동원력이 그대로 작용해서 나조차도 소름 돋는다.
“이제 막 경선 통과하신 건데요. 뭐 본선 남았습니다.”
물론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다.
김병용이 아예 기대가 안 가는 신인도 아니고 외부의 무소속 대항마는 명망이 있는 다선 의원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미 수명이 다했다.
“니 계속 더 도와줄 기지?”
“아니오.”
“으이?”
그리고 나는 열흘 남짓의 경선 일정 수행을 마치고 물러섰다.
“오늘로 마치겠습니다.”
“그래도 좀 더 도와주면 안 되겠나.”
본선은 애초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내부 경선에서나 역술인 낀 청년 선거팀이 활약하지.
이제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10석이나 걸려 있는 대형 재보선이다.
당에서 전문 보좌팀이 내려올 것이며 그들과 캠프에서 일할 사람들로는 설민혁이나 송지훈이면 족하다.
여기야 결과가 거의 정해졌다고 봐도 무관해서 관심도가 낮겠지만.
혹시나 언론 등에 꼬투리 잡혀서 퍼지면 곤란하다.
“역술인으로 할 수 있는 건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뭔가 세상에 통달하고, 미래를 볼 것 같은 이미지는 이제 없어요.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나 본다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그들을 등 처먹는 사기꾼에, 심지어 반인반신의 딸마저 타락시킨 존재로 여겨지죠.”
“야 사위야, 야 좀 말리 봐라.”
관둔다고 하니까, 며칠간 함께 움직였던 송지훈과 설민혁까지 동원해서 붙든다.
“아 진짜 잘하셨는데.”
“그러게, 있어라.”
“얘들도 니 덕에 재밌었다는데 있지 그러나.”
큰 사건 이후로 수요가 늘었지만, 인식은 더 안 좋아졌다.
사주명리학과 기독교 교리가 섞인 영세교 같은 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용화미륵교에서 보듯이 써먹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다.
그러니 더 큰 판에서는 물러날 때다.
“다른 IP를 제대로 찾아올게요. 작가든, 기업인이든.”
“그런 게 있으면 니가 정치를 해야겠더라.”
“아 그런가.”
지지자운과 종교운이 검증이 됐다.
실제, 인력 동원력이 늘어난 것이다.
논외 규격인 소녀보살을 빼고는 다 와 줄 줄은 나도 몰랐다.
“뭐 얼마나 언론이 조명을 하고 그러겠나, 너무 쫄지 말고 본선 때도 와 주라.”
“점술학의 근간은 물러설 때를 알려 주는 겁니다, 제가 그 시기를 아는데 나아갈 수는 없죠.”
“지가 진짜로 도산줄 아나.”
김병용이 비꼬며 놀렸지만 그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아니어도 그 느낌은 내야 장사가 잘됩니다.”
* * *
“엥!?”
주로 명승철학관을 찾아오시던 할머니들이 어딜 갔냐고 묻는 편지들 중에는 두 편의 괴편지가 있었다.
그중 한 편은….
교도소에서 온 편지다.
영업하며 사람을 크게 가리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집유 이상의 형을 받은 흉악범은 멀리하고 싶었는데.
그런 흉악범의 편지였다.
“설…윤환!?”
이 양반이 편지를, 그것도 전주 명승철학관으로 보냈다고?
발송 시기는 지난 4월 말.
그쯤에 내 존재를 인지했고….
편지를 대전 쪽으로 보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왜 나한테 편지를 보내?
이 편지도 황당했는데 더 놀라운 편지가 있었다.
이건 발신인도 우표도 없는 편지로 그냥 사실상 봉투였다.
“뭔데 이건…어, 엥?!”
이 서신은 보자마자 명승철학관으로 달렸다.
이건 명승 선생의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