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사이다 할머니
이건 내가 할 말이 없다. 한 대 맞은 기분.
어느샌가 내가 잊고 지내고 있던 본질을 끌어낸다.
“글을 쓴 것 하나로 경력이 될까요?”
“출판 사업을 해 볼까 하며 선임했다고 하면 됩니다.”
“어린데요?”
“청년들의 의견을 들어 기업에서 수렴하고자 했다고 하면 됩니다.”
“만화스러운데….”
“무슨 말을 하실지 아실겁니다.”
거미줄이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회장이 말을 잇는다.
“옛날에 경학과 사장이라고 있었습니다.”
“사장, 그러니 문장이 좋으면 감투를 쓰는 것이다를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죠?”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역사 관련 서적을 좀 읽는 편인데.
유교 관련 역사인 한국사, 주로 조선사 심지어 고려에서도 매번.
- 문장을 잘 쓰는 놈을 과거에 뽑자.
- 아니다. 유교 원칙에 충실한 참된 선비를 뽑자. 문장이 좋은 건 기교에 불과하다.
이러고 싸웠더라.
그러니까 이건 문장이 좋으면 과거에 붙을 법도 하다는.
작가와 논술 시험을 띄워주는 예시와 화법이다.
“예, 이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들으시는 젊은이가 몇이나 있을까요?”
설양훈도 몰아가기의 고수였다.
나도 타인을 사주로 이러저러한 캐릭터를 만들고 거기다 속성을 붙여서 몰아가서.
사람들이 ‘그런가 보다’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편이라.
이런 화술의 기교를 눈치를 채고 방어가 가능한데.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한 설양훈이 이미 내 가드를 풀어놨다.
솔직히 말하면 날로 먹는데 명예는 오르는 직종이라 끌린다.
그러니 가드를 진심으로 칠 수가 없다.
“여간한 학력 높은 친구들이면 알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내가 그런 신입들을 한두 명 봤을까요?”
“아이고 진짜 너무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한데, 기업의 운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너 일가 리스크 전담 상임 고문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진짜 빈틈을 안 주고 봉쇄하네.
명분을 설양훈이 쥐고 있었다.
자리 챙겨 주기용이라, 진짜 오너 마음대로다.
헛된 명성이 퍼질까 봐 조심스럽지만 무슨 기업 상임 고문이 누구다.
이런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솔직히 스카이피아도 50위권인데 잘 몰랐다.
몇몇 로비 냄새가 나는 전직 정치인들이나 문제 되지.
회사에서 오래 일하고 비밀을 쥔 게 많은 핵심 임원들 노후도 챙기고 어디 발설시키지 말라고 챙겨주는 경우가 많다.
내가 비밀을 쥔 게 없다고도 못한다.
설은겸 아버지의 죽음은 그 소재가 폭발력이 너무 강렬하니까.
“섣불리 대답을 드리기가 어렵긴 합니다. 너무 과분해서요.”
“아시리라 생각을 합니다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돈이 없는 자가 사랑을 빌미 삼지도 않고 여자의 마음을 되돌려 놓기란 어렵기 그지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은겸이 녀석이 그렇게까지 해서 두 가지 일을 모두 해 보겠다 할 거라곤 나는 전혀 예상을 못 했습니다. 자, 이쁜 짓 아이구 그게 안 되던 아이였으니까요.”
샤샤샤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저 방법이 그뿐이었을 뿐입니다. 욕심과 책임, 두 가지를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오.”
“선생이라면, 나는 책무를 중시하여 그 아이를 이끌어 줄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둘 중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면 물러서서 둘 다 가질 힘을 기르거나, 돌파해서 둘 다 쟁취하는 것이라 평소부터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냥 아무리 봐도 시험이라서 힙하게 ‘누구 맘대로 날 테스트해?’인 거였다.
“난 그게 맘에 듭니다.”
“그러십니까?”
“그치만….”
이 영감 내가 쓰는 절단신공까지 쓰네.
반전 대사를 치겠지?
“은겸이를 할아버지한테 애교를 부리게 만든 게 더 맘에 듭니다.”
종교운 님 그동안 무시하고 내다 판 무지를 용서하십시오.
사람을 무슨 구미호마냥 홀리네요.
로마, 예루살렘, 비텐베르크, 바라나시, 메카 갑니다.
“이게 단순히 사주나 말솜씨로 되는 것이었을까요?”
내 스승의 비술인 사주강화술 때문이라고 말하면 게임을 너무 많이 했군요? 하겠지.
“어 저는 뭐 그렇게까지 얼음공주이다. 느낀 적이 없긴 합니다. 전형적인 가까운 사람에게만 냉정한 사주니까요. 뭐 미소가 술을 마셨을 때만 나오긴 했던 것 같지마는.”
설은겸은 웃는 모습을 세 번 정도 봤다.
내가 바를 처음 가서 헛소리를 몇 번 했을 때와 남동생 보여 줄 때.
그러고 보니 정말 그 이상으로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네.
“아 술을 같이 드셨다?”
이 영감 눈꼬리 휘말린 거 보니까, 건수 하나 더 잡았구만?
물론 연애 몰이를 당하면 나는 가만히 안 있는다.
“품에 안겨…. 펑펑 울기까지 했습니다.”
“아 울었나요? 저도 그 녀석 우는 건 몇 번 봤는데.”
“20년 전쯤에 말이시죠?”
그런데 이런 도발을 당했음에도 설양훈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손녀 덕후인 척도 위장한 건 아니겠지.
그건 진심이라고 믿겠다, 아주 즐거워 보였으니까.
아니면….
손녀를 너무 믿어서 이런 놈한테 그런 빌미를 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것도 하나 생각은 드는데 그건 너무 갔다.
“그러면 정말 사랑이 빌미였을까요?”
대사가 영감답지 않게 과장된 제스쳐가 있다.
이번에도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저희 집에 사주 단자 보내시면 부모님은 집 안 해 가도 될 집안이라 아주 좋아하실 건데, 진행하실까요?”
이 양반이 설은겸을 움직여 시집 보낼 능력이 있고 하라면 해야지, 감사합니다.
“요즘 세상에요? 뭐 아무래도 제가 그 녀석 시집갈 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비 대신 손을 잡고 들어가긴 해야겠지마는.”
설양훈은 실실 웃으면서 날 지긋이 쳐다본다.
“손녀한텐 도가 지나치죠, 안 그래도 장남은 그냥 원하는 결혼하게 뒀습니다. 제가 해 준 게 없는데 앞길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손녀도 마찬가지이신 거군요, 자신감이 느껴지십니다?”
“들은 바가 있습니다. 처가가 강하면 여자가 기가 세고, 그 기를 억누르지 못하면 남자가 구실을 못한다. 는 사주의 격언 같은 게 있지 않나요?”
“재다신약격을 말씀하시는군요.”
“선생이 그걸 극복 가능하다면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는 젊은이들 눈 맞는 건 반대 안 합니다?”
쉽게 넘어가겠냐, 그 뜻이다.
그걸 할 수 있는 놈이면 상관없다는 투이기도 하고.
“각설하고, 말씀대로 역술인이라고 높이 쓰기엔 세상의 저항이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지요. 다행히 선생은 정체성이 하나 더 있어 이리 말씀을 드린 겁니다.”
“두 길을 파는 사주라….”
“은겸이한테 계룡선사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봅니다.”
이 양반은 이제 내가 하지 않은 일도 나 때문이라며 칭찬하는 경지에 이르렀네.
굳이 말을 안 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었으므로 부인하진 않았다.
“민혁 씨 쪽으로 기우신 것 같아서, 말을 아끼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사주로 두 길을 파는 자들은 보통 우유부단하다던데, 선생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고작 차가 아니라 두 길을 모두 그림자로 덮는 비행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핫핫, 그런 표현이 기지가 넘치네요.”
칭찬에 안 익숙하다 보니 슬슬 민망하다.
“거기다 민혁이 놈도 훌륭하게 데뷔시켜 주셨고.”
“그건 가짜 유언장으로 길을 인도하신 회장님이 기략이.”
“그 녀석이 나보단 선생의 말을 더 잘 따릅니다.”
설씨가 3대가 다 집착하는 게 나로서도 신통할 노릇이다.
“이런데도 내가 선생을 재야에 둬야겠습니까?”
듣자니 생각보다 내가 공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빈약한 논리로 맞서고 있었는데 설득 당하게 된다.
“자.”
“예.”
“들어 드릴 겸손은 다 들었습니다. 이 노인네 몇 번 더 찾아오게 하지 말고, 비정규직이니까 경력 큰 곳에서 쌓는다 생각하고 오세요.”
확언을 하고 장유유서까지 들먹이며 설득을 하는데 이건 재간이 없었다.
“좋습니다. 다만.”
“말씀하세요.”
“제가 명예와 학위를 조금만 더 드높이고 가겠습니다.”
“명예와 학위라….”
명예 5레벨, 학위 6레벨.
배움, 학위운은 공부로 올릴 수 있지만 다른 기타 활동.
뭐 고소라거나 여행, 갑옷 입고 뜀뛰기 등으로 올릴 경우.
배우고 싶은 학문의 고등교육급 지식을 체득하게 넣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6레벨부터는 학사급 지식을 하나씩 부여한다.
키도 키우는 사주강화술이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다마는.
도움되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지금 같아서는 어학 능력을 하나 갖췄으면 싶다.
“학위야 배움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높이 칩니다만, 명예는 말이지요. 이 늙은이가 선택했다는 것 하나로 생각 그 이상으로 오를 겁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예운 올린다고 구르고 뒹굴고 관성운 찾아 헤매느니.
설양훈이 신임하는 젊은이가 되는 게 명예운엔 직관적인 보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문득 뭔가 떠오른 게 있었는데.
그렇다면 내 위치에 맞지 않는 감당 어려운 직위를 받는 게 스스로에게 충분히 납득이 된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떤 생각이신지?”
“22살, 30살, 새파란 젊은이들을 끌어올리려면 상징이 하나 필요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상징이라?”
“28살 젊은이를 이런 높은 자리에 세우고 그런 이의 의견도 들을 수 있는 기업이다. 라고 사전에 포석을 깔면, 그 다음 수를 두는 데 반발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22, 30살 이 사람들을 기업 어딘가에는 꽂아야 실무를 배우게 할 텐데.
그러면, 이 노인네라면 그걸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었다.
“허어?”
“그런 거면 조바심 낼 필요 없이 받아도 될 것 같네요. 망치들을 감출 모루로 활용된다는 건데 하는 일 없이 연봉 받는 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설양훈은 다시 웃더니 말한다.
“하하하 이야, 정말 저도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만.”
“아, 정말로 그런 생각 없이 권하신 겁니까?”
“하지만, 선생의 머릿속의 포석이 제게도 그려지는 듯합니다.”
알았는데 모른 척했다면 여우가 따로 없고.
정말 내 말로 깨닫고 그걸 바로 전략으로 전환한다면 그 또한, 괴물같다.
* * *
구민강의에서 우리 반 나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자판기 앞에서 쩔쩔매고 계시길래 말을 붙였다.
“어 뭐가 문제세요?”
“지폐를 안 먹어.”
스마트 행정 뭐 3.0? 이런 걸 한다고 현수막은 붙여 놓고 카드 대는 자판기는 없는 구청이다.
근데 카드 대는 자판기여도 쓰기 힘들어하실 것 같긴 하다.
“자판기 이놈 건방지게 돈을 준다고 해도 자꾸 뱉네요. 제가 해 볼게요.”
뱉고 있던 이황 선생을 방향 바꾸고 좌측 투입구에 붙여서 넣으니 들어간다.
“내가 할 때는 안 되던데.”
“뭐 그런 거 있어요. 내가 할 때는 안 되는데 남이 하면 되는 거, 드시고 싶으신 게 뭔데요?”
“사이다 하나 눌러 줘.”
직업병이 있는지 사이다 소리 들으면 괜히 뜨끔한다.
꽤 집착하는 단어다.
“여기요, 아 그리고 어머니 잔돈.”
“가져.”
쿨하시네.
구청 자판기의 장점이 그나마 좀 단가가 싸다.
1000원은 할 줄 알았는데 200원 팁 받았네.
그리고 강의 중 하루는 그 어머님 사주를 풀면서 말씀드리고 있었다.
“흙은 토지, 즉 모든 것이 발 붙이게 하는 포용하는 것이잖아요. 나무가 뿌리 뻗게 도와주고, 물이 스며들고, 불이 재로 돌아가고, 쇠를 키워 내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 주는 기관 즉 소화기관을 말하거든요.”
한 분 사주를 받아 풀면서 풀이하는 방법 위주로 수업한다.
“어머님은 흙의 기운이,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는 사주라서 소화나 이런 게 좀 본질적으로 안 되세요. 특히 위 건강 조심하셔야 돼요.”
사주를 좀 보다 보니 느낀 건데.
윗병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발발하는 경우도 많아 흙이 깨졌다고 위가 아프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만.
사주의 일반론으로 그러하니까 그런 식으로 강의하고 있다.
정말 사주에 흙의 기운이 깨진 사람들은 그냥 소화 자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위가 약해.”
“그러니까 막 사이다 드시죠?”
이 어머님 같은 경우는 사이다를 드시는 걸 종종 봤다.
맨날 안 들어간다고 해서 도와드리거든.
한번 도와드렸다가, 자판기를 지배하는 자 취급을 받아 여러 번 뽑아 드렸다.
그리고 1200원 벌었다.
“그걸 먹어야 소화가 되는 기분이라니까.”
“위 내시경을 좀 자주 받으세요. 나이도 있으시니까.”
“비위가 약해서 안 돼.”
“수면 있잖아요.”
“무서워서 못 해.”
그냥 흙의 기운이 공격받으므로 위가 안 좋을 수 있다 정도는 사주로 얻은 정보지만.
이 어머님은 소화 안 되어 사이다를 먹는다는 사이다 매니아로.
어느 정도 사주의 정보가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어서 좀 세게 말했다.
“그래도 꼭 받으셔야 돼요. 아셨죠? 약속하시고.”
“괜찮다니까.”
“하고 오시면 제가 사이다 60캔들이로 배송 보내 드릴게요.”
“에이 없어서 그리 먹겠어?”
그렇게 말씀드렸던 어머님이 한 달 넘게 강의를 안 나왔다.
“어, 연락 되시는 분 없나요?”
“그 언니가 연락이 안 돼, 뭔 일이 있는지.”
굳이 출석을 따지지는 않지마는 안 나오시는 분들이 좀 있다.
나를 보면 몸이 이상해서 좀 나오기 그렇다는 애도 있고.
강의 마치고 출석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한 번 찾다가 내가 찾고 있던 친구의 명대사를 곱씹으며 강의실을 나왔다.
“몸이 이상하다…. 아 뭐지.”
마음이 이상하다고 하면 설득을 하고 몸이 아프다고 하면 걱정을 할 텐데.
날 보면 몸이 이상하다고 하니까.
어디? 라고 물어보며 파고드는 순간 변태밖에 안 되어서 말을 차마 못 붙이고 있다.
이미 변태이긴 한데, 개변태가 될 수는 없잖아.
“선생님.”
송희영 씨가 강의실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예, 안녕하세요.”
“아이 선생님. 어후, 그 여기 이분이요.”
관리자인 송희영 씨가 한 중장년 남성분을 소개해 줬다.
“안녕하세요.”
“네, 누구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예? 뭐가?”
“선생님 강의 받으시던 이희자 어머님, 아드님이세요.”
“아 진짜…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가….”
그러니까 그냥 사이다 많이 먹고 위 안 좋은 사주라서.
건강운으로 좀 잔소리했던 그 어머님, 위암 초기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