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아가씨의 비밀 친구
놀리기 대사를 하나 더 꽂았다.
“전 아직 철부지라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살겠다. 그게 없으니까요. 그러니, 설은겸 님을 위한 삶을 원한다면야. 내 복이 되면 됩니다.”
“아…아, 아. 후 말씀이 너무 좋아서 헷갈렸는데요. 이거, 음. 그러니까. 그 고백이라는 거죠?”
그건 너무 가셨는데.
나도 못 오를 나무 정도는 알아보지.
“이게 고백으로 들려요? 고백 안 받아 봤어요?”
“어, 여학교 다녀서요….”
“대학교는요?”
“저 같은 얼굴은 널렸어요….”
“그래도 번호 같은 건.”
“주로 차로 다녀서….”
과보호 집안에다가 연예인에 일찍 뜻을 둬서 관리를 좀 했나?
미인인데 집 잘 살고 남자운 없어서 ‘설마 애인이 지금까지 없었나요?’ 한 적이 있는데 진짜라고 말하던 사람 한 명 보긴 봤다.
뭐 남자의 칭찬과 유혹에 자신을 투영해야 남자는 잘 만나는데.
배경이 너무 대단하고 자부심으로 가득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남한테 투영해 줄 이유가 없으니.
‘와 1도 안 맞춰 준다.’ 싶은 느낌일 것이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공감대만으로 뭉쳐야 하는 친구와 동료에 비해 남녀는 뭉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몇 더 있다는 겁니다.”
“우씨, 이상한 소린 줄 알았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이상한 소리인데.
“자연스러운 건데요. 그냥 진짜 평생 내 편으로 둬야겠다. 싶은 사람이면 시도해 보시죠. 괜히 혼인 동맹이라는 게 있는 게 아녜요. 좋은 혼처야 널려 있을걸요.”
“그러면 선사님하고 친해지려면 뭘 해야 하나…. 자식 말고.”
잘 빠져나가네.
“날 부하로 쓰든 친구로 쓰든, 동료로 쓰든 필요한 건 설은겸 씨가 줄 대의명분이죠. 와, 남의 꿈이지만 이건 같은 꿈을 꾸고 싶다. 싶은 명분 말이죠. 돕고 싶으면 친구나 동료가, 따르고 싶다면 부하가 될 겁니다.”
“그치만 진심으로 남을 돕는 건 아니다 이거죠? 철부지니까.”
역질문을 받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 그래도 내가 우선입니다.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남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그’ 남이 자식인 정도만 좀 눈에 띌 뿐.
그리고 그걸 보편적으로 남이라고는 안 하지.
그러니까 그걸 한 관우 같은 양반들이 사람들 뇌리에 남는 거다.
“그게 자식을 가지면 좀 풀릴까 싶으신 거고?”
“예, 궁금하긴 합니다. 진심으로 남을 위해 산다는 게 상상이 안 되어서 말이죠.”
“철부지다. 이 말 진짜 맘에 와닿네요. 그러면 저도 철부지일까요? 저는, 저는 나름 아빠와 엄마를 위해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일반론으로는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으니.
좌우지간 자식을 낳아야만 부모를 이해하고 그렇게 세대가 이어진다고는 보는 편.
물론 지밖에 모르는 부모도 널린 편이라 보지만.
“부모를 생각한다. 좋은 말씀이죠, 그치만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살지 않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은겸 양은 남을 위해 산다는 게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절 위해서 뭔가를 한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건데요. 저는 동새….”
“복수도 자기만족이죠.”
동생 핑계 못 대게 막았다.
그럼 아마 돈을 안 빼앗아 왔을 거다.
모아 왔더라고 남동생 지분, 여동생 지분, 엄마 지분.
그러니까 저 집안은 설은겸이 저 돈을 다 날리면 빈털터리다.
여배우를 꿈꾸던 여대생이, 건설 회사를 노리는 사연?
“복수라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반응이 격하네.
주어는 넣지 않고 대답했다.
“스스로 생을 저버리셨다. 밖에는 생각이 안 들던데요.”
“네에? 무슨…. 그 설마.”
“부고에서 보듯 죽음은 알려 망자를 추모하는 게 예의인데, 그걸 사인을 감췄다면 그거 말고는 마땅한 게 없어요.”
다른 게 굳이 없다곤 못 하겠는데 망자니까.
그 외의 불명예스러움은 가능성이나마 언급은 안 하련다.
특히 살해를 당했다면, 그걸 묻어 버리는 건 좀….
그 정도 위치의 사회 명망가가 살해되면 이건 기업이 아무리 힘이 세도 묻으려야 묻을 수가 없다.
오롯이 자살만이 좀 사인을 쉬쉬하며 감추는 경향이 있다.
자살은 보험사도 평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사인 적어도 보험금 수령 신청만 안 하면 조용히 있었다고.
자살 관련 사주 이야기하다 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표정 관리가 안 되시는데요.
좀 쉽게 보이는 타입이네.
피부가 얇다고 해야 하나, 맑다고 해야 하나.
상기됨이 잘 보이는 얼굴이다.
“정말 아니에요?”
감옥 갈 일 있었거나, 정말 우울했거나 정도로 본다.
건설사 그거 인력 단가 뻥튀기에 자재 빼돌리기 등등.
남겨 먹기가 얼마나 좋은가.
법 지키면서는 못 하는 대표적인 사업이라 알고 있다.
어디서 증거만 잡히면 집어넣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방에 보내려고 한 주체는?
“…그건 말씀 못 드려요.”
“솔직히 저한테 말씀하신 제안은 이 도시락만 못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제가 매니저 사칭하는 변태한테 속고 있는 여학생을 미리 파악해 도와줬다는 보답과 그 고마움이 들어 있습니다. 이건 제가 배가 터져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죠.”
“잘하셨네요.”
그런 감상으로 넘어가지 말고.
“내가 힘이 되어야, 나도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진짜 어려운 이유를 말해 주질 않는데 내가 뭘 해야 합니까?”
“제가 먼저 도와드리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냥 재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도와 달라고 내미는 보상이 너무 크다.
그럼 당연히 일은 더 살벌한 것일 가능성을 봐야 한다.
“내가 어떤 일에 쓰여질 줄 알고 선금부터 받고 공감도 되지 않는 어린 손녀의 치기에 같이 장단 맞춰야 합니까?”
“그만큼 저는 선사님의 가치…를.”
“거짓말 그만하고 그러니 고민부터 말씀하세요.”
“스카이피아에서 일하고 싶은 것뿐이 없어요.”
이걸 아직까지 거짓말을.
“그 제가 어딘가에서 들은 말인데요. 일은 목적이 아니랍디다.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지. 그리고 생계에 아주 치열한 고민할 필요 없던 당신의 삶의 궤적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시사하고요.”
출판사 피드백이었던 것 같다.
주인공 캐릭터가 목표가 없다고 원고 반려 때렸을 때.
그러니까, 사람에게 몰입할 수 있는 사연이 있어야 한다며 복수 같은 거, 회귀해서 하는 거 써 오라고.
나는 현대인이 무슨 철천지원수가 있어서 그 새끼 조져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살아가라는 게 이해가 안 돼서 다퉜는데.
몰입하려니 그게 낫겠다 싶다.
설은겸의 행동을 ‘한이 있다.’ 그 이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거짓말이라 일갈하니 설은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 당신이 대체 뭘 도와줄 수 있는데요?”
그런 자가당착스러운 소리는 하지 마.
안 그러면 돈 싸 들고 가게 해 보겠냐고.
빈 건물 권리 하나 받아 볼 생각 있냐고 한 게 이상해지니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당황했다는 건 알겠다.
“비밀을 들어 줄 수 있죠.”
“겨우?”
“비밀을 같이 들어 줄 수 있죠.”
“같이 들어서 뭘 하죠.”
“비밀이 절 당신 편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그게 어떻게 되는데요?”
설은겸은 점차 목소리가 메이고 있었다. 왜인진 모르겠다.
“비밀이 목숨과도 같이 중하다면, 그건 목숨을 내게 준 것이고 명예라면 그건 명예를 나한테 주는 거고, 신뢰를 말한다면 신뢰를 주는 거죠.”
“왜 그렇게 하시는데요? 뭐 때문에?”
여기 철학관인데 너무 당연한 걸 묻는구먼.
“비밀을 듣는 직업이잖아요. 남들에게 말 못 할 인생, 숨겨진 취향. 전 그걸 맞추고 당신은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직업입니다.”
역술인을 찾아오면서 ‘복채는 이만큼 드릴게요.’만 말하고 있었다.
누굴 속이고 이목을 가려 달라면서.
그건 매수일 뿐이지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미루어 짐작하는 일을 자꾸 감추려고 한다.
비밀을 반쯤 들켰으면 속 편히 털어놓으면 된다.
못 맞췄으면 날 그냥 비웃으면 되고.
근데 그걸 끝까지 쥐고 있으려는 게…. 안쓰럽다.
이건 어쩌면, 내가 신뢰를 못 주는 건가?
“그러니까, 전 고객님께 신뢰받고 싶고요. 어…. 주신 신뢰 믿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 손님이 처음 들어올 때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면, 제가 사주로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읍….”
설은겸은 급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있다 가세요.”
“…….”
설은겸은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모아 올린 채 말 없이 한참을 떨고 있다.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네에.”
“정말, 말씀드리면 돼요? 그러면 절 믿을 수 있어요? 믿음이 가세요?”
“아뇨.”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는 설은겸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그냥도 믿을게요.”
그 말에 설은겸은 흐느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러면요. 선사님. 아, 그게, 흑.”
“예, 말씀하세요.”
“왜, 왜 아빠가, 아빠가요.”
“네, 아버지가.”
“왜, 왜 나 버리고 흑, 으흐흐흑.”
그러고 보면 반대로 내가 신뢰를 줘서 끌어낼 수도 있는 거였다.
* * *
설정환은 짐작대로의 사인이었다.
오롯이 큰딸과, 부인 그리고 신뢰하던 정신과 주치의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긴 유지는 스스로 죽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
특히 아버지에게 알리지 말 것을 강조하고 죽었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진단은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그 외엔 체기와 가슴이 답답함을 호소한 게 있어 대외적으로 사인을 급성 심근경색이라 둘러댔다.
그가 목숨을 저버린 이유는 딸에게 남긴 장문의 메시지에도 없었다.
단지 확실한 건 사정 기관의 칼날이 목 밑까지 들어오긴 했다는 것이며 그 수사가 설정환의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행으로 우겨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이미 대법 판례도 유리한 해석이 있었고.
경제인의 특성상 그저 집유일 가능성이 높았다고.
“추태를 부렸네요. 진짜 죄송합니다.”
경기 일으킬 정도로 울던데 구급차 불러야 하나 싶었다.
감정에 좀 솔직해지면 사람은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하다.
“눈물을 많이 품고 있었네요.”
“저 잘 안 울어요.”
“그…. 더 이상은 짐작 가는 게 없고요?”
“그래서 미칠 거 같아요.”
“그게 회사를 가지면 알 수 있는 거라 생각합니까?”
“누가 봐도 아빠의 자리를 갖고 싶은 자들의 짓일 테니까요.”
“하긴 그걸 차지하면 티가 나겠죠.”
왜 승산도 없는데 끼어들려는지는 알 것 같다.
“잘 말했습니다. 어차피 제가 눈치챈 비밀이면 다 털어놓고 조력을 구하는 게 맞지. 감춰서 상황이 좋아지진 않았어요. 그걸 꾹 품었는데 내가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하거나 약점을 쥐려 했다면 어쩌려고 했어요?”
“그냥, 울 것 같아서 말 못 했어요.”
“아.”
“그렇게 됐잖아요.”
그 말을 듣고 기어이 울린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해 머쓱하고.
음식이 식어 가는 것 같아 먹던 도시락을 마저 먹으려는데.
설은겸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저기 혹시 밥이라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어 그러실래요? 솔직히 손님 앞에 두고 밥 혼자 먹는 거 치사하죠. 배고플 텐데.”
도시락 주시는 건 감사한데, 양이 너무 듬뿍이라 좀 난감하게 먹고 있다.
버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고.
젓가락은 이미 예의상 내밀어서 설은겸의 손에 있었다.
가만, 좀 깨끗이 먹긴 했지만 내가 먹던 반찬인데 얘한테 먹여도 되나…?
이미지가 왠지 떡튀순 모를 거 같은 그건데.
“근데 남긴 밥 같….”
“괜찮네요.”
뭔가 내가 판단하는 설은겸과는 다른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늘은 좀 편하네.”
그래도 여학생발 손님 러시는 점차 잠잠해졌다.
확 한번 유행을 타기도 했고, 아마 구매력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애들이 1만 5천 원씩 내고 여러 번 사주 보긴 용돈이 많지가 않지.
섣불리 확장을 시도하지 않은 판단이 옳았다.
구청 강연 나가는 날은 영업이 없거나 영업 시간이 짧아서 그런지.
사주라는 게 정말 촌각을 다투어 뭔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므로 영업 시간이 짧아서인지 손님이 적은 편이다.
그리고 그 예상과 달리 철학관에 손님이 왔다.
“실례합니다.”
남자? 4~50대로 보이는 남자. 돋보기 안경에 나름 중후하고 오래된 시계….
적당한 재력의 남자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3PM에.
이 시간에 철학관 오는 중년 남성이면 개인 사업자, 특히 요식업 관련자가 많은데.
이 분은 컴퓨터 앞에 오래 앉은 이의 전유물, 거북목이 있다.
출장 사무직, 혹은 재택 사무직으로 보이는데.
구두지만 구두가 유독 닳고 흙먼지가 많다.
발품 뛰며 컴퓨터 앞에 앉는 직종이라….
“비정규 사무직, 집에서 글 같은 걸 쓰시는 거 같네요. 신발이 닳아 있는 걸 보면 움직이는….”
“오, 안녕하세요. 관상도 보시네요. 저는 한밭일보 기자 현재현이라고 합니다.”
뭐 시험해 보러 온 건 아니었나 보구나. 괜히 예민했나.
이런 기자들 있다는 에피소드를 꼭 한두 번은 들어 본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아닌 척하고 찾아오는 관계자들.
행여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아 근데 기자가 오는 것도 범상치는 않은 일인데.
“어 기자님이 웬일로 여길 다 오시죠?”
“신년 특집 기사로 유명한 역술인 분들에게 충청 대망론을 이을 차기 잠룡들의 사주를 여쭙고 있습니다.”
“…예?”
충청 대망론을 전주 와서 왜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