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람 낚시에 쓰는 스킬
누가 날 부를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그냥 가는데 한 번 더 부른다.
“저기요! 그 정은씨 작가님?”
불편한 정은씨가 인상 깊었나 보네.
누군가 해서 뒤돌아보니까, 아까 빵 터졌던 여학생이다.
“네? 뭔 일이신데요.”
자기소개는 봤지만 누군지는 정확히 모른다.
지정환 신부와 하와이안 피자 쓴 여자였던가.
“그, 저기 사주 보신다고 하셨죠.”
“예, 봅니다.”
“전 어떤가요?”
뭔 소리여.
“네? 사주 말씀하시는 거죠?”
“어, 네.”
“사주를 말해야 사주를 보죠. 태어난 생년월일시. 그냥 대뜸 그러면 관상 봐 달라는 이야기 같은데, 저는 관상 잘 못 봐요.”
“어, 어어. 그. 막 보면 딱 알고 그러지 않나요?”
보면 딱까진 아니고 어떤 인생이길래 나한테 사주를 묻나?
상상의 나래를 마인드맵으로 펼쳐 가다가.
외양과 나이로 어떤 인생일까를 짐작하면서 소설로 구성해서 말해 주는데.
그게 얼추 반은 맞지.
거기다 사주 패턴 섞으면 반의반까지 추가로 맞고.
“그건 무당이고요.”
스테레오 타입까지는 아니지만 보통 20대 초반 여자들은 뭐랄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면모를 보기 쉽다.
근데 저 누군지 하와이안 피자 작가 양반은 그렇지 않으니까.
친구운이 좀 좋고 인싸력이 있는 편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아까 보니까 삼국지에 나오는 호걸처럼 호탕하게 웃던데.
얼굴이 망가지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최소한 여우 같다고 뒷담은 안 까일 사람이다.
방정맞다고 까일 수는 있다. 엄마한테 등짝은 맞을 듯.
“어, 무당 아니세요?”
굉장히 자주 받는 오해인데.
그래도 나름 친절히 설명해 줬다.
“무당은 신력으로 타인의 운명을 맞히는 사람이고, 역술인은 점서로부터 비롯된 고대 동양 철학을 토대로 운명을 추론하는 사람이죠. 그 기준은 태어난 년도, 달, 날짜, 시간이고.”
“아아……. 그러면 사주 그 생일이랑 말하면 되는 거예요? 한번 보고 싶은데.”
“복채는 마침 저녁이니, 적당한 저녁 식사 한 끼 대접하시면 제가 봐 드리죠.”
“아 저, 저녁이요?”
“예.”
“그건 음……. 어.”
“알겠습니다. 다음 워크숍 때나 뵐 수 있으면 뵙죠.”
괜히 오해할까 봐 끊었다.
명승철학관과 전북 콘텐츠 진흥원은 도시의 극과 극에 있어서 버스 타고 40분은 가야 한다.
거 길바닥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사주 볼 것도 아니고.
최소한 장소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커피는 되는데요?”
커피는 식후에 마셔야 좋고.
카페 커피는 비싸서 잘 안 먹는다. 편의점 1+1이면 충분.
“커피 정도론 복채가 안 되는데요. 전 아메리카노만 먹는데 열 잔은 사셔야겠네요. 철학관으로 오시려면 오고, 저는 밥이나 먹으러 갈랍니다. 그럼 안녕히.”
요즘 신시가지에 못 보던 가게들이 많아져서 혼밥이나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밥 안 먹는다니까.
“아, 밥…….”
“저녁 굶는 다이어트 안 하셔도 될 것 같긴 한데.”
딱 보니 저녁 굶는 다이어트 하는구먼.
그냥 보기엔 딱 건강하고 좋은 표준 체중에서 약간 마른 것 같은데.
여인네들은 저걸 딱 좋다고 여기질 않고, 보통 운동해서 뺄 생각들도 없다. 굶으면 빠지니까.
운동한다고 빠지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어, 그걸 어떻게…….”
저녁은 안 먹을 건데, 커피는 먹자니까.
커피값 이상 지불할 생각이 없거나, 저녁은 못 먹겠단 얘기겠지.
커피값 이상 지불할 생각이 없다면 물값 빼 달란 진상 아줌마보다 못하구만.
그런 심보면 별로…….
내 능력이야 별거 없지만, 사주 강화술과 명승 선생의 비결은 커피 한 잔의 값어치는 아니다.
속이 안 좋은 안색 같진 않고.
내가 저녁 안 먹는 다이어트로 살 좀 빼 봐서 안다.
나야 누가 저녁 사 준다고 하면 그걸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분은 독하게 하나 보네.
“저 살 올라 보여요?”
그런 말은 늘씬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키 160대 초반에 체중이 50대 초반이면 충분히 늘씬하고 예쁜 몸매인데, 몸무게 40대에 집착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
“그런 건 아닙니다. 안 쪄 보여도 다들 그래서 해 본 얘기에요. 턱선 갸름하시구먼. 아무튼 전 이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야겠습니다.”
“진짜 가도 되나요?”
“예, 철학관으로 오세요. 손님 거절하는 장사치 봤습니까.”
폰으로 주변 맛집 검색 중이다.
상도 탔으니 큰맘 먹고 한 끼 15,000원 깐쇼새우밥이나 먹을까.
순간 메시지가 들렸다.
[가볍게 들이대고 심지어 밀당까지 시도한 당신의 여자, 재성운에 포인트가 적립됩니다.]
예? 이게 들이댄 거라굽쇼?
황당하게도 사주 강화 포인트가 올랐다.
아니 뭐 오른 건 좋은데…….
사주 강화술 프로그램과 비결에 의하면,
원래 안 하던 짓, 못하는 짓, 그리고 아직 레벨이 낮은 짓들은 일단 하면 잘 오른단다.
물론 잘하고 매번 하던 짓을 해도 잘 오르는데, 그건 이미 레벨이 꽤 높아서 필요 경험치가 많이 필요하다.
고로 여복과 여자운, 이것이 포함된 재운은 말마따나 들이대고 다니면 오르기야 할 것인데.
“뭐 몇 마디나 나눴다고. 참 나. 재밌네.”
복채 대신 밥이나 사 달라고 했다가 안 된대서, ‘에이 난 밥이나 먹을라요.’하고 나온 거구만.
* * *
혼밥러가 슬픈 건 한참 잘 되는 저녁 장사에 낄 수가 없단 거다.
“가서 피순대에 막창국밥이나 먹자.”
나름 대식가라 2인분씩 먹으므로 혼밥도 뻔뻔하게 잘 먹는 편인데, 아무래도 줄 선 집은 안 되겠다.
문제는 도시의 번화가라서 금요일 저녁, 사람이 너무 많다.
집에나 가야겠다 싶어 버스 정거장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구면인 사람을 만났다.
“어.”
“아.”
그 아까…… 이름은 까먹었는데, 호탕하게 웃고 사주 봐 달라던, 저녁 굶는 여학생.
제목에 지정환 들어가는 것만 기억난다.
“그, 이 근처에서 식사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엄마가 상다리 휘어지게 밥 차려 놨다고 외식하고 오면 죽인대요.”
“아, 엄마.”
밥 먹는다며 인사하고 떠났는데 다시 만나니 참 민망하구만.
그래도 요즘 자영업 시작했고, 친구운도 3렙 정도 된다.
LV3 친구운, 누구나와 가벼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도 원래 낯을 굉장히 가리는 편이었는데, 철학관 운영하면서 사주를 주제로 대화하다 보니까 사람 뭐 똑같구나 싶더라.
요즘은 어색하지 않게 대화하고, 말에는 아부도 가득 담고 그러고 산다.
“몇 살이세요?”
엄마라고 하니 만만해 보이나 보지?
“스물여덟인데요.”
“진짜요?”
동공이 흔들릴 정도인가.
포인트가 남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남으면 피부 미용도 만렙 가 봐야겠다.
지금까진 체감 안 되는데, 나이 들면 절실할 수 있겠다.
“예. 그쪽은 연배가 어떻게 됩니까.”
그 지정환 신부 피자 어쩌고 쓰신 양반, 뜨악한 표정이다.
“연배요?”
“아, 철학관 손님들은 주로 어르신들이다 보니. 나이가?”
어르신 핑계를 댔지만, 말투가 고리타분해진 건 결정적으로 무협 쓰다 생긴 버릇이다.
외래어 피해서 쓰다 보니까 전통 한자어나 안 쓰는 사어까지 가져다 쓰곤 했더니, 고풍스러운 말이 입에 뱄다.
“저 다 소개했는데요. 기억 안 나세요?”
“대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이름도 모르죠?”
“지정환 신부의 하와이안 피자 쓴 건 압니다. 그…….”
성은 특이했던 거 같다.
“그, 예수지 씨?”
“예지숩니다.”
“성이 이쁘네요.”
“이름은요?”
“흔한데요.”
아줌마들 대하듯 대하면 콧대 잔뜩 높여줄 수도 있긴 한데.
아줌마들은 집에서 남편이 속없이 ‘드럼통이냐, 굴러가겠네.’ 같은 막말이나 듣고 사는 한이 있으신 분들이고.
이 아가씨는 젊음에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솔직히 그럴 만한 미모도 되는 것 같고.
충분히 인정받고 사는 근거 있는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겐 칭송과 부추김보다 제동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는 사이 버스가 와서 탈 준비 하는데 예지수도 벌떡 일어났다.
“이 버스?”
“가는 길 같나 봐요?”
“시 외곽 나갈 거 아니면 뭐 보통 이 버스죠.”
버스에 자리가 두 자리인데, 한 명 앉으면 보통 안 앉는 자리 있다.
저녁 안 먹어서 뺄 것도 없는 몸매 깡마르게 만드는 양반 같은데.
일단 대뜸 창가 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냥 봉 잡고 섰고.
예지수의 옆자리는 이내 그냥 따로 탄 보따리 든 할머니가 앉는다.
그냥 쳐다보고 목례한 뒤 알아서 서서 갔다.
나는 버스 등을 타면 굳이 스마트폰을 보지 않지만, 예지수는 여느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그렇듯 금방 휴대폰에 몰두한다.
시내버스 파업이 몇 차례 있었던 동네다.
버스 기사님들 복지는 여전히 제대로 안 되는지, 운전에 울분과 잠재된 폭력성이 그대로 담겨 있어 서서 타기는 좀 하드코어하다.
사실 다리에 적응도 안 됐다.
6센티 정도 더 짧고 작았을 때 있던 안정감이 안 든다.
무슨 시내버스를 탔는데 놀이기구처럼 운행하냐.
물론 그딴 안정감 필요 없고 키 컸으니 사주 강화술 만세다.
네 정거장쯤 지나서 버스 뒤쪽의 두 자리 연석 몇 개가 비었는데, 예지수가 갑자기 내 쪽을 보면서 좌석을 두드린다.
툭툭툭툭.
앉으라는 거 같은데, 가서 앉지 뭐.
내가 앉자마자 궁금한 건 못 참겠는지 말을 꺼낸다.
“사주 그냥은 정말 못 보는 거예요?”
“본 적이 아예 없어요?”
“아뇨. 그, 생일만 넣어서도 누가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생일만 넣어도 운명 데이터는 나오긴 한다.
그게 사주팔자가 아니라 삼주육자일 뿐이지.
그리고 그 생일만 넣어서 뽑은 게 영 별로였나보다.
“태어난 시간 알면 뭐 사주 만세력에 집어넣고 뽑고 그러면 되는데요. 생일 모를 리는 없겠고.”
“시간을, 잘 몰라요.”
“어머니가 교회 다니시려나.”
“예? 그건 어떻게…….”
여성들은 사주명리학, 점술학의 주된 고객으로 고등학생만 넘어도 자기 태어난 시간 모르는 경우가 드물다.
남자들은 ‘그냥’ 모름, ‘왜 알아야 하지?’가 가장 많다.
여자들의 경우 모른다고 하면 ‘그냥’ 모름이 좀 있긴 한데, 태어날 때부터 내가 태어난 시간이 언제라고 알고 태어나는 건 아니라 부모의 성향을 살펴야 한다.
부모가 태어난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경우는, 대표적인 모집단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중시하지 않음.’, ‘그 신념에 따라 부모가 굳이 알려주지 않음.’ 의 비중이 높다.
물론 기독교인이어도 다 그런 건 아니라서 일반화하긴 뭐하지만, 여자들이 모른다 하면 30~40%가량은 부모가 신앙인일 경우가 많았다.
나머지는 ‘그냥’ 알려주지 않음(사주에 관심 없음).
엄마가 없거나 이혼 가정에 매우 안 친함.
그런 거 신경 쓸 새 없이 낳은 자식이라 엄마가 진짜 기억 못 함.
엄마는 알려줬는데 지가 까먹음, 등이 있다.
그리고 엄마도 모름, 지가 까먹음, 엄마랑 안 친함, 그냥 등에서도 엄마가 기독교인인 비율은 존재하므로, 이렇게 찍으면 반 이상 맞는다.
“그래도 알고는 있으실 거고, 알려는 주실 겁니다. 명문대학에 다니는 문리에 트인 딸이면 엄마랑 사이가 안 좋진 않을 테니 후딱 다다다 물어보세요.”
“문리요? 말투 너무 어른 같으신데요.”
문리文理가 그리 이상한가.
학사 느낌의 주인공이 무사 될 놈들한테 쯧쯧대며 공부 좀 하라고 할 때 쓴 단어인데.
“어른 맞는데요.”
“할재 느낌 나요. 아재도 아니고.”
회귀자도 아닌데 이런 취급이라니.
“하긴 내 또래들도 이런 말은 안 쓰죠.”
“암튼, 시간 한번 여쭤볼게요.”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 누르는 거 보소. 광속이네.
말투 고민을 하던 사이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던 예지수가 드디어 자기 시간을 알아낸 모양이다.
“엄마가 그런 거 보는 거 아니라면서 교회 다니는 거 맞췄다니까. 알려는 주네요.”
“그러면 생년월일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스물한 살이구먼.
사주가 쉬운 편이다.
전형적인 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야 하는 독선왕 사주.
그런데 아마 독선왕이 될 만한 자부심을 인생에 업적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나도 독선적이기로는 한 독선 하는데, 이런 강한 사주의 사람에게 사주를 납득시키려면 기교를 좀 부려야 한다.
“어, 이럴 수가…….”
“그, 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어디서 무당 같은 거 될 팔자란 소리 들은 적 있죠?”
“어, 어? 네.”
시간은 몰라도 볼 수 있는 삼주육자에 귀문관살 하나 있다고 누가 또 대뜸 무당 팔자라고 했나 보네.
내가 군에서 막 책 보고 배울 때 자주 범하던 오류다.
구타는 없는 부대라 욕만 처먹긴 했지만. 집합은 당해 봤다.
‘~병장님한테 무당 팔자라고 했다며? 일병 나부랭이 새끼가 존나 미쳤나 보다. 그치?’
어우 트라우마.
근데 그 병장 전역 직전에 나한테 사주 함 더 봐 달라고 하더니.
이상한 거 진짜로 보인다고 귀신 본 얘기 줄줄이 하더라.
“그게 쓰여 있어요? 정말 그래요?”
예지수는 다급하게 물었는데, 그때 마침 버스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음 정거장은 중앙시장, 중앙시장 앞입니다>
“어, 내려야 해서요. 안녕히 계십시오.”
“예에? 내리셔야 해요?”
원래 세 정거장은 더 가야 하지만 근처의 순대국 먹으러 내린다.
뭔가 절단신공을 쓴 것 같은데, 의도한 것 맞다.
“무당 그런 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그래도 사람이 불길한 소리 듣고 꿈자리 사나울까 봐 위로 한마디 스포일러처럼 남기고 자리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내릴 수가 없었다.
옷자락이 잡혔다.
예지수가 갑자기 날 붙들고 자기도 민망한지 입술을 떨면서 말했다.
“아, 안 내리시면 안 돼요?”
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