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6)
마지막 대재앙 이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제국 사람들은 그때의 악몽을 극복한 모양인지, 평화롭고 일상적인 하루에 녹아들었다.
“아씨, 늦었네.”
한 사내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는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예전에는 단순한 출퇴근용으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텔레포트 마법진을 찾았다.
[텔레포트 설정]
[정기권 회원]
[목적지 강남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확-
사내가 밝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마법 혁명이었다.
예전에도 텔레포트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드미트리의 마법 기술을 전수받으면서부터 마법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지금은 텔레포트를 대중교통으로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덕분에 빠르게 강남에 도착한 사내는, 입사 첫날부터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전광판이 보였다.
전광판의 존재는 세상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증명했으며, 전광판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뉴스가 보도되었다.
[최근 피닉스 마탑에서 진행되었던 ‘균열 실험’이 매우 고무적인 성과를 얻었다는 소식입니다. 절대자의 죽음으로 차원의 균열이 심각해지면서, 드미트리는 그동안 세계수의 마력을 불어넣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들이 많았는데, 이번 실험을 통해 대마법사 펠릭스는 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확신한다고 발언했습니다. 한편, 미국과 헥토르가 관광 산업을 체결하면서…….]
세상이 변했다.
마법이 일상이 되고.
대한제국은 새로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당연하게도 드미트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었다.
-드미트리 제국-
“으아아!”
“이런!”
“저 멍청한 새끼는 왜 저기서 헛발질이야!”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그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은 거대한 TV 화면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 프로 리그였다.
“내가 보기에는 구단주 새끼를 당장에 쫓아내야 해. 아니, 이따위 멤버로 대체 어떻게 시즌을 치르려는 생각인 거지? 단언컨대 시즌 중반이 지날 즈음에는 이보다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 분명해.”
“옳소!”
“우리 같은 일반인도 아는 문제를 대체 왜 수뇌부들은 모를까?”
차원 너머의 문화.
축구 리그가 드미트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TV야말로 현대 문명의 산물이었고, 그 외에 현대식으로 발달한 건물과 다양한 기계들이 두 세상의 조화를 증명했다.
물론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시기가 존재했었다. 워낙 다른 방향으로 발달한 세상이니만큼, 같은 인간일지라도 서로를 외계인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방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상황에 맞는 정책을 펼쳐 나가며, 두 세상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기술의 교류.
문화의 교류.
서로의 장단점이 맞물렸다.
특히 화폐로서의 단점이 지적되던 금화를 폐지하고, 지폐를 받아들이면서 화폐 혁명도 일어났다.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
30년을 기다려 왔던 사람들에게는 겨우 3년에 불과하겠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30년을 압도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모두가 변화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인류는 평화를 되찾았다.’
3년 후의 현재.
사람들은 평화가 일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 *
드미트리의 연무장.
그곳에서 한참 대련이 진행되었다.
금발의 중년이 머리칼을 팔락이며 달려들자,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냈다.
파앗.
카카카카카캉!
빨랐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검술이었고, 금발의 중년은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키겠다는 듯이 공격의 속도를 높였다.
확실히 드미트리의 섬광다운 모습이었다. 금발의 중년, 크리스는 일선에서 물러나며 일반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술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번 대련.
3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한번 상대해 달라는 크리스의 부탁에, 로만 드미트리는 기꺼이 받아 주었다.
결과는 뻔했다.
크리스는 나름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목에 겨누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검을 거두며 두 손을 들었다.
“항복입니다.”
“그래도 제법이구나, 크리스. 처음 나를 만났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엉망이었는데 말이지.”
“왜 옛날얘기를 하고 그러십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피식 웃었다.
크리스와의 첫 만남.
평범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던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대놓고 엿을 먹이려는 의도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련을 진행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크리스의 모습. 만약 그때의 일을 악의로 품었다면, 지금의 크리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법이라는 말.
진심이었다.
크리스의 검술은 드미트리의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웠다.
크리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황제 폐하. 다른 건 다 좋은데, 나중에 제 아들을 만날 때는 첫 만남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십시오. 그래도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 아비인데, 된통 당해서 널브러졌다고 말한다면 꼴이 우습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도 아들에게 허풍을 조금 쳤단 말입니다.”
“그건 네 문제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3년.
로만 드미트리는 국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크리스와 같은 사람들과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케빈과 따로 시간을 보냈다. 빈민가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들을 추억하는 가벼운 자리였지만, 케빈과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자.
한나가 다가와 말했다.
“황제 폐하. 오전에 요청하신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그늘 밑.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나가 구해 온 책을 확인하자, 고풍스럽게 꾸민 겉표지에 책의 제목이 보였다.
[드미트리를 빛낸 위대한 영웅들. 저자, 헨리 앨버트.]
“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웃음이 나왔다.
헨리 앨버트.
베스트셀러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복귀 이후 ‘드미트리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 이미 교수로서 압도적인 스펙을 가지고 있는 만큼, 드미트리는 물론이거니와 차원 너머의 세상에서도 자식들을 드미트리 아카데미에 보내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문득 궁금했다.
최근 엄청난 관심을 받는 이 책.
드미트리의 영웅들을 기록했다는 이 책에, 과연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지.
팔락.
책장을 넘겼다.
아직 본문은 나오지도 않았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저자의 소개를 확인하자마자 실소를 터트렸다.
[저자, 헨리 앨버트]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교육자. 사람들은 헨리 앨버트 교수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남부 전선의 동료였으며, 앨버트 가문은 드미트리의 삼남인 로렌 드미트리와 결혼했고, 무엇보다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드미트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사람들에게 묻겠다. 과연 이 세상에서 헨리 앨버트 교수만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존재가 있는지를. 지금부터 이 책을 통해, 드미트리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틀린 말은 없었다.
특히 차원 너머에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후, 헨리 앨버트의 입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드미트리 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불렸다. 남의 손길을 빌린 저자 소개는 낯부끄러운 말들이 많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걸 보며 전혀 웃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 감격했다.
헨리 앨버트의 시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정말이지 위대한 인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여러 인물의 소개가 나왔다.
그것을 간략하게 추린 내용은 이러했다.
[다니엘 카이로]
:현재 사람들은 카이로 국왕이 한때 ‘허수아비 국왕’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경악할 것이다. 지금은 카이로를 강국(強國)으로 만들며 카이로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다니엘 카이로지만, 그에게도 아픈 시절이 있었다. 지난 30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륙을 지탱한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드미트리의 로드웰 드미트리, 카이로의 다니엘 카이로, 헥토르의 에드윈 헥토르. 그중 유일하게 아무런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던 다니엘 카이로는 오로지 지도력만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 만약 그가 드미트리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지난 30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락.
[발렌티노 공작]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인.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갖춘 재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도 드미트리를 향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와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하며, 매년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부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발렌티노 공작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게 말할 것이다. 드미트리를 향한 그의 호의는 진심이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부를 축적한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검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공백의 30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기다리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재산을 쌓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탐욕의 수집가는 그 명성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단언컨대 도굴꾼들에게 발렌티노의 묘는 군침이 도는 먹잇감일 것이다. 3년 전에 950조에 낙찰받았던 광명과 더불어 그의 컬렉션 전부가, 그와 함께 잠들었다는 소문은 아마도 소문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팔락.
[파비우스 후작]
:드미트리를 대표하는 다산(多産)의 상징.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라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하렘을 건설한 이후로 수많은 첩을 두었다. 그녀들 사이에서 무려 98남 79녀를 낳았으며, 아직도 정정한 그의 정력에 이대로 30년만 더 지나면 파비우스의 자손들로 일국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본 저자가 직접 만나 본 결과, 그건 소문으로 치부할 이야기는 아니다.
팔락.
책장을 계속해서 넘겼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알려 주는 이야기에 로만 드미트리도 추억에 잠겼다.
재밌었다.
사람들이 왜 말장난 같은 이 책에 열광하는지를, 책의 주인공인 로만 드미트리조차 이해가 될 정도였다.
책에는 다양한 사람이 언급되었다.
세 인물 외에도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모든 인물이 거론되는 상황에, 헨리 앨버트는 지금과 같은 부와 명예를 누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망해 가는 귀족 가문 망나니에 불과했던 존재. 자신처럼 천마라는 전생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스스로의 무기를 만들어 갔다.
인정했다.
그의 존재를.
그가 뭐라고 떠들든, 로만 드미트리가 제지하지 않는 이유였다.
물론 슬슬 간을 보다가 이제는 폭주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모양새였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이번에도 한나가 찾아와 말했다.
“저녁이 준비되셨답니다.”
책을 덮었다.
기다렸던 순간에,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드미트리로 돌아오고.
리한나 드미트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드미트리 가문은 1년에 한 번 만찬(晩餐)을 준비했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부모님이 직접 요리하는 자리에,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했다.
“위험하십니다. 음식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아버지! 그러다 허리 나가십니다!”
“매년 먹는 음식이지만, 이번에도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요?”
파티장 안.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조나단, 크리스, 케빈, 로드웰 드미트리, 로렌 드미트리, 플로라 로렌스, 펠릭스, 한나 등등.
매년 만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만큼 직접 움직였고, 음식들을 나르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그들을 도왔다.
처음 만찬을 진행했을 때는 다들 기겁하며 황제를 말렸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부모님을 모시는 자리라고 말하자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힘을 합쳤기 때문일까. 금방 상이 마련되었다.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을 대표해, 리한나 드미트리가 말했다.
“매년 이렇게 참석해 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장남인 로만이를 30년 동안 기다리면서, 소중한 존재와의 시간을 뒤로 미루지 말자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 이 자리를 여러분 모두 즐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그건 예의를 갖춘 자리가 아니었다.
조용하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닌, 다들 왁자지껄 떠들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했다.
“아니, 제가 그랬다고요?”
“그랬다니까!”
“껄껄껄, 웃긴 사람일세!”
그 중심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백중혁은 죽지 않기 위해 투쟁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 온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 상황.
이 순간.
이 일상적인 즐거움을 위해, 자신은 살아가는 것이라고.
로만 드미트리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 2부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