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13화 (613/615)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4)

재판이 끝났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판장을 나선 김판석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들을 발견했다.

파파파팟.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차원 너머의 기자들이 김판석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판석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한제국,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은 김판석 씨를 백의의 마법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황제의 전생이라니요. 그동안 백의의 마법사로 활동해 온 것은 전부 거짓입니까?”

“결국에 무죄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게 과연 올바른 판결이라 생각하십니까?”

난리였다.

그들은 드미트리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김판석과 관련한 이슈로 취재 허가를 받았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잘 차려입은 정장과 플래시를 터트리는 카메라는, 마법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확실한 것은.

백의의 마법사.

김판석과 관련한 문제가 대한제국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절대자를 쓰러트리며, 이번 대재앙에서 손에 꼽히는 활약을 선보였던 인물.

단언컨대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김판석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고, 드미트리의 세상에 대단한 마법사가 있다고 한들 백의의 마법사야말로 제일이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전쟁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대부분 드미트리 출신인 것과는 다르게 그는 대한제국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렉산드르의 전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크나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오히려 드미트리의 세상보다도 더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차원 너머에 알렉산드르의 환생이 존재한다고?’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의 사람들/은(에게는)/ 김판석을 알아 온 세월이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왔던 기억들.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백의의 마법사라는 평판을 얻은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만큼, 김판석이 무죄 선고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배신감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의 시선.

분노가 가득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죽음과 회개로 자비를 베풀었지만, 대한제국 사람들의 분노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이 또한 내가 살아가며 갚아야 할 업보겠지.’

수많은 카메라 중 하나.

그 렌즈를 바라보며 김판석이 말했다.

“사실 새로운 삶을 허락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전생에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저에게, 새로운 삶이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로 활동해 왔던 시간이 전부 진심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상당 부분 제 진심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선행을 이어 나갔던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알렉산드르로 살아온 삶보다 백의의 마법사로서 존재할 수 있어 행복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실망시킨 것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재판부의 처벌에 따라 앞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재판과는 별개였다.

새로운 갈림길에 선 지금, 김판석은 전생의 업보를 짊어지는 방향을 택했다.

* * *

한 번의 사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기자들의 추격을 겨우겨우 따돌린 김판석은, 사람들이 한적한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을 맞닥트렸다.

“알렉산드르. 아니, 이제는 김판석이라고 불러야겠지.”

적발의 머리칼.

날카로운 눈빛.

그는 바로 케빈이었다.

케빈은 묘한 적의를 드러내며, 김판석의 앞을 막아섰다.

“참 재밌는 일이야. 같이 힘을 합쳐 절대자를 무너트렸던 백의의 마법사 정체가 실제로는 알렉산드르 황제였다니. 마음 같아서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지만, 내 진심과는 별개로 너를 살려 두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도왔기 때문이야. 재판부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서 너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으니, 전생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치고는 눈빛이 상당히 위험한데?”

묘한 분위기였다.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달려들 것 같은 기세에, 김판석은 마력을 끌어 올리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케빈이 웃었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사람들이 말하길, 명실상부(名實相符) 백의의 마법사야말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라고 하던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확실해졌다.

케빈의 의도.

바로 서열 정리였다.

김판석은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케빈의 열망은, 가히 광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지. 너와 크리스. 둘 사이에 서열이 정리되지 않았을 텐데, 너는 스스로 드미트리 제국의 이인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크리스 님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難題)지. 하지만 내가 서열 정리를 요구하자, 크리스 님은 내게 곧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평범한 삶을 살겠다고 말하더군. 그러니까 대답해 봐. 너는 대체 누가 드미트리의 이인자라고 생각하지?”

의외였다.

크리스.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그의 열망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며 발전과는 별개로 목적의식이 흐릿해져 버렸다.

천의 경지를 경험하며 현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고 대륙 제일의 검사가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일상과 기다림의 경계에서 살았다면, 지금부터는 온전히 일상과 가족에 집중하고자 했다.

김판석이 케빈의 말을 되뇌었다.

사실 적당히 원하는 대답을 말해 주고 돌려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방금 재판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이 케빈과 한바탕 전투를 벌인다면, 그건 나중에 뒷말이 나올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다.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자신도 당당하게 로만 드미트리의 이인자 자리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죄가 많은 그에게 그것은 강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김판석이 말했다.

“진짜 개염병을 떠네.”

머릿속 생각과는 달랐다.

분명히 머릿속으로는 평화적인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김판석은 본능적으로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죄는 죄고.

이건 이거다.

앞으로 착하게 살 생각이나, 그 범주에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자신 있냐? 날 상대로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을 자신이?”

물을 엎질렀다.

케빈의 눈빛에 피어오르는 살기에, 김판석은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 * *

자리를 옮겼다.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들이 사용하는 비밀 대련장.

마법 방어가 겹겹이 설치된 그 장소에 도달하자, 케빈이 검을 뽑아 들며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룰은 간단해. 한쪽이 패배를 시인하는 것. 이런 문제로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 또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는 불충일 테니까.”

“오케이. 심플하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케빈이 달려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 빠른 움직임에도, 김판석의 눈빛에는 조금의 당황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루전(illusion).”

파파파팟.

환영이 일어났다.

김판석의 존재가 수백 명으로 나누어지더니, 케빈의 정신을 현혹하며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발현했다.

“익스플로전.”

화륵.

화르르르륵.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김판석은 절대자를 제단의 제물로 바치면서, 지금은 힘을 잃었으나 심장에 10번째 고리를 형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실제로 10서클에 도달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만 남고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지만, 10번째 서클의 존재는 9개의 고리에 이전과는 다른 폭발력을 부여했다.

수백 개의 마법.

그것이 모두 실체화되었다.

각자가 강력한 힘을 분출하며, 케빈의 빠른 움직임을 쫓아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퍼펑!

불길이 넘실거렸다.

화마(火魔)가 일렁이는 세상 속에서, 케빈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길을 향해 검을 뻗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콰앙!

콰콰콰콰콰콰콱!

화염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화염이 쓸려 나갔고, 그 와중에도 케빈의 시선은 수많은 환영 중에서도 정확하게 김판석의 위치를 찾았다.

추가적으로 발현한 마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조리 베어 버리며 치고 들어오는 케빈의 모습에, 김판석은 예리한 눈빛으로 케빈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글아이(eagle eye).”

번뜩.

팟.

공격을 피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냄과 동시에 마법을 폭발시켰고, 케빈이 막아 내며 반격하자 이번에도 공격을 흘려보냈다.

파파파팟.

콰르르르르르르릉.

경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케빈과 같은 전사를 상대로는 근접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건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왔던 김판석은 근접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다.

워 메이지의 대명사라고 평가받는 에드윈 헥토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감히 드미트리의 악귀를 상대로, 대담하게 근접전으로 맞받아치는 마법사는 없었다.

서로가 뒤얽혔다.

마법이 폭발하고 검이 공간을 찢어발기는 일련의 상황에서, 유의미한 공격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감히!”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김판석이 눈을 부릅떴다.

케빈.

인정했다.

그가 절대자를 물리치며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나, 김판석은 케빈이 빈민가 소년이었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

고로 그와 비등한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계 마법으로 케빈의 추격을 떨쳐 내더니, 9개의 서클이 미친 듯이 폭주하며 하나의 마법을 발현했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Lightning Punishment).”

번뜩.

콰콰콰콰콰콱!

번개 다발이 내리쳤다.

케빈의 존재를 집어삼키는 그 공격에, 이번만큼은 충분한 타격을 입히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확-

번개를 뚫고.

케빈이 나타났다.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서로 공방을 주고받을수록.

케빈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귀혼마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고도 이성을 통제하며, 그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1초 만에 수십 번의 번개 공격이 작렬했지만, 케빈은 득달같이 따라붙으면서도 모든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건 김판석조차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 블링크로 공간을 이동하며 케빈과의 거리를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코앞에 나타난 케빈의 존재를 발견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번뜩.

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콱!

마법이 찢겨 나갔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드미트리의 악귀.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절대자를 쓰러트렸던 결과처럼, 30년 만에 케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말 경악스러운 성장세였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단 말인가. 30년의 세월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천마검법에 투자했음을, 그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김판석은 알지 못했다.

팟.

피가 튀었다.

얼굴이 베였다.

김판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패배한다.’

고로.

“항복! 항복할게!”

흠칫.

케빈이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에, 케빈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김판석을 바라보았다.

* * *

케빈과의 승부?

중요했다.

어떻게든 승리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케빈과는 다르게 김판석은 뒷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제단 스킬로 절대자의 힘을 흡수한다면, 10서클 마법으로 케빈을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해. 다음번에 패배한다면, 이번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아.’

김판석은 먼 미래를 보았다.

본인이 보유한 절대자의 시체는 하나에 불과했다.

그건 비장의 무기였다.

10서클의 영역을 허무는 순간 케빈조차도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김판석에게 중요한 문제는 절대자의 힘을 분석해서 온전한 10서클에 도달하는 것. 분노를 삭였다.

무지렁이에서 알렉산드르로, 알렉산드르에서 백의의 마법사가 되었던 삶의 기간만큼, 미래를 걸고 현실을 베팅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케빈이 사납게 말했다.

“왜지? 아직 전력이 아닐 텐데.”

“전력이 아닌 것은 맞아. 하지만 지금 내 전력을 발현한다면, 나는 두 번 다시 너에게 대적할 수 없겠지.”

사실대로 말했다.

그 또한.

자존심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김판석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힘을 잃었지만, 그건 자존심을 달래 줄 명분이 되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그래서일까.

“그냥 이번에는 네 승리를 받아들여. 다음번에 내가 네 자리를 넘본다면, 그때는 장담컨대 내게 이인자의 자리를 내어 주게 될 테니까. 지금은 그 승리를 충분히 즐기라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케빈이 검을 거두었다.

김판석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케빈에게 있어 백기를 내건 지금의 결과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케빈이 웃었다.

“단언하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치열했던 이인자 대전.

마침내 그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물론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김판석과 케빈.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한, 둘의 악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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