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3)
며칠 뒤.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이번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한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자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드미트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아직 장례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지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기에, 주요 인물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카이로의 국왕.
다니엘 카이로가 로만 드미트리 옆에 나란히 섰다.
“저는 카이로의 국왕으로서 만인(萬人)의 목숨이 똑같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도 특별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백작. 아무것도 아니었던 어린 국왕을 지지해 준,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린 국왕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사내의 눈빛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했다.
“한스 남작은 행복했을 겁니다. 적어도 마지막을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고맙다.”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죽었기에, 그에게 이와 같은 조언은 쉽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선뜻 용기를 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카이로의 전부라고 불리는 그는, 이만한 감정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거인이 되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물러나고.
이번에는 플로라 로렌스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인생이라는 게, 참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처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저는 50대 중년이 되어 그때와 똑같은 모습의 황제 폐하를 만나 뵙게 되었네요. 제게도,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도. 한스 남작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맹목적으로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잖아요.”
로렌스와 드미트리.
혼인으로 결합한 관계이니만큼, 플로라 로렌스는 드미트리와의 만남이 잦았다.
사실 조금은 불편할 때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정략결혼을 맺었던 자신이 차남인 로드웰 드미트리와 결혼하면서,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나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때마다 한스는 보란 듯이 플로라 로렌스를 챙겨 주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이곳에서 대우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스 남작이 보증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한스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플로라 로렌스에게 그는 정말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신 걸 정말 축하드려요.”
마지막 말이었다.
플로라 로렌스도 물러났다.
그렇게 차례로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들이, 각국의 인사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며 한마디라도 거들려고 노력했다.
그들도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드미트리로 돌아오자마자 한스의 곁을 지킨, 한스 남작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그렇게.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려고 했다.
하지만 울먹거리며 슬픔을 참아 내던 유족들이 결국에는 무너지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엉엉 울며 가족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더는 담담할 수 없었다.
* * *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로서 눈을 떴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했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도련님!”
“어서 약을 가져와라! 도련님이 아프시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에 로만 드미트리가 정신을 차리면서 일단락되었지만, 그때부터 한스라는 사람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와의 벽을 허물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특별한 계기가 없이도 그를 울타리 안으로 들였다.
백중혁과 로만 드미트리.
사실 둘의 시작은 비슷했다.
아비에게 버림받았던 백중혁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평판에 아버지 눈 밖에 나 버린 로만 드미트리.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에,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곁을 지키며 전생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감정을 전달받았다.
아무런 싹도 트지 않은 감정에는 다른 감정을 받아들일 여력이 존재하지 않지만, 한스의 맹목적인 감정은 로만 드미트리의 가슴에 씨앗을 뿌렸다.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한스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와 있었던 추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로만 드미트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의 황제로서.
만인의 지도자로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천마신교의 가르침대로라면, 전대 교주이자 아버지의 가르침대로라면.
인간의 눈물은 나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순간 절대적인 군림은 불가능하다면서 항상 냉혹하게 말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들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도, 아버지는 아들의 나약함에 오히려 이죽거리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 아버지를 백중혁은 증오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닮아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해 왔다.
“……한스.”
그래서였을까.
더는 눈물을 참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다른 유족들의 감정처럼.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울었다.
한스를 보냈던 그날 남몰래 울었던 울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아무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든.
황제든.
그 누구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 * *
대재앙.
차원의 균열.
인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면서, 드미트리와 대한제국 두 세상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지난 일주일.
특별한 변화가 있었다.
일단 로만 드미트리가 다시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 복귀하면서, 대한제국을 김준혁에게 맡겼다.
“인천 시장 김준혁은 중앙 정부의 핍박을 받아 온 시절에도, 국민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다. 나는 그라면 대한제국의 다음 황제로서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을 건국하며 너희에게 약속했던 말이 있다. 반드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주겠노라고. 비록 내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는 하나,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대한제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열광했다.
김준혁.
그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가 물러난다는 사실에 다들 아쉬운 반응을 보였지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알기에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자리와는 별개로 그의 책임감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또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드미트리의 백성들은 들어라. 내가 자리를 비운 지난 30년, 내 동생이자 대리인이었던 로드웰 드미트리는 훌륭한 지도력을 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드미트리는 결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일을 경험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언제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 찾아온다면. 드미트리의 후계(後繼)는 나의 자식이 아닌, 그동안 이 나라를 위해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준 로드웰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증명받은 인물이, 드미트리 제국을 이끌 자격을 부여받을 것이다.”
파격적이었다.
권력의 대물림을 차단했다.
훗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세습으로 인한 문제들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시련을 경험했다. 특히 절대자와의 결전. 그 싸움에서 승리하며, 대한제국과 드미트리는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앞으로 두 세상, 두 차원은 활발히 교류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 신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부여했으나,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그 시련을 감내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화창한 오후였다.
당장 피크닉을 가야 할 날씨건만, 드미트리의 한 건물에 수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이유는 바로.
김판석의 재판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운 현실이 모두 정리된 이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릴 진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마법사. 백의의 마법사가 사실은 알렉산드르였다!”
충격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세상에서는 알렉산드르를 악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거론되며, 악마 같은 그 존재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하필.
알렉산드르의 환생이라니!
문제가 심각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당장에 김판석을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환생’한 존재에게 전생의 죄를 대물림하는 것이 맞는지를 따져 물었다.
정말 복잡한 문제였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사이에, 결국에 죄를 판단하는 재판 일정이 결정되었다.
법정 안.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사가 입을 열었다.
“죄인 김판석. 그는 전생에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으로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하며, 그것은 김판석으로 환생했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곧 판결을 앞둔 지금, 죄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최후의 항변을 하라.”
시선이 집중되었다.
최후.
마지막 발언 기회였다.
드미트리의 시스템에는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기에, 김판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가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판사나, 적의 어린 시선을 보이는 배심원들이나.
모두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체를 밝히고 이 자리에 참석한 지금까지, 알렉산드르였다는 과거를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김판석이 말했다.
“제 죄를 전부 인정합니다. 알렉산드르라 불리던 그 시절의 저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김판석으로 환생해 회개(悔改)의 기회를 얻은 저는, 뒤늦은 반성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대한 전생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많은 선행을 했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본다면 저는 부정할 수 없는 쓰레기입니다. 저 자신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전생의 악행으로 현생의 제가 처벌받아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김판석이 선택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의 최선이었다.
* * *
새로운 삶.
새로운 기회.
김판석은 살고 싶었다.
천마를 모실 기회를 부여받았기에, 정말 간절히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악행을 저질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때는 흑마법에 물들어 인간임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변명이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겠지.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 업보를 청산해야만 해.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이를 악물었다.
막다른 길목에, 김판석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
선택권을 맡겼다.
지금부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살리든 말든, 김판석은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였던 자신이, 정말 한때였지만 천마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던가.
판사가 배심원들의 의견을 전달받았다.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논의하더니,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마침내 판결을 말했다.
“이번 재판은 배심원들이 참석, 죄인의 판결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알렉산드르는 부정할 수 없는 악인이다. 그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나, 재판부는 알렉산드르의 악행과 김판석의 존재 사이에 책임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한번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돌린 이유가 있었다.
“죄인은 환생의 기회를 얻은 이후 실제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의의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선행을 베풀었으며, 무엇보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난 직후 본인의 정체를 곧바로 밝히며 많은 부분을 도왔다. 만약 죄인이 단순히 살아남길 바랐다면. 정체를 밝히지 않거나, 아니면 차원의 통로를 연결하는 일에 비협조적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죄인은 많은 부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드미트리의 국민들은 그 부분에서 죄인의 진심을 높이 평가했다. 고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용서받는다고 한들.
무기 징역과 같은 판결이 나온다면, 김판석은 앞으로 살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마침내.
판사가 재판의 종지부를 찍었다.
“죄인 김판석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대신, 전생의 죗값을 청산하기 위한 무기한 사회봉사를 명령한다.”
그 말에.
무죄라는 단어에.
‘천마이시여. 제가 살아남았습니다! 천마신교의 이인자인 제가, 정당한 방법으로 살아남고야 말았습니다!
김판석이 남몰래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세 번의 삶.
천마와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