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2)
탁.
찻잔이 식탁에 놓였다.
곱고 아름다웠던 손에 자글자글 생겨난 주름에, 로만 드미트리는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브차란다. 노화 방지에 좋다고 해서 매일같이 마시고 있는데, 우리 아들은 30년 전 모습 그대로네.”
어머니가 웃었다.
맞은편에 앉는 그녀의 모습에,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에, 이렇듯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까지도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진실을 듣고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바로 부모님의 건강이었다.
30년의 세월이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할 뿐 안색은 오히려 전보다 좋은 느낌이었다.
로메로 드미트리가 말했다.
“말도 마라. 네 엄마가 우리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면서, 지난 30년간 건강에 좋다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 개나 먹였단다. 이걸 봐라. 내 나이면 모두 방구석에서 앓아누워야 하는데, 나는 힘이 넘치다 못해 다시 대장간 일을 시작했단다. 예전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네가 돌아오면 근사한 검을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
“여보도 참. 그래도 제 말이 맞았잖아요. 우리가 건강하니, 아들의 모습도 보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긴 하지, 껄껄껄.”
부모님의 말.
감정이 벅차올랐다.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그에게, 부모님이란 핏줄의 가혹함을 강요하는 잔인한 존재였다.
이번 삶은 달랐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해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아무리 무모한 일을 벌인다고 한들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었다.
지금의 로만 드미트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에 도착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먼저 부모님을 만나 뵙겠다고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뭐가?”
“그냥 전부, 전부 감사합니다.”
낯부끄러웠다.
자신도 다른 자식들처럼 말랑말랑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말투를 푸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다.
드미트리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렸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부모님에게는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은 불효자였다.
시간이 흘러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부모님을 만날 기회가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로만아.”
“예.”
“돌아와서 고맙고, 사랑한다.”
“……예?”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랑한다니.
아버지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로메로 드미트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이 말이다.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말이 있단다. 내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30년 전에 꼭 말하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 정말 많이 후회했었거든. 그런 내 진심을 알아다오.”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
사랑한다는 말.
로만 드미트리의 인생에 허락되지 않는 단어였다.
입술을 씰룩이며 똑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렇게 망설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웃긴 모양인지, 부모님은 웃음을 터트리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말 화기애애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로 돌아온 선택이 옳았음에 확신을 얻었다.
그러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한스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 말에.
부모님의 표정이 굳었다.
로메로 드미트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 보거라. 그곳에 가면 한스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다.”
* * *
끼익.
방문을 열었다.
그 익숙한 공간을 확인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
무려 30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드미트리의 수도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것처럼, 이 공간도 당연히 세월의 흐름이 적용되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예전과 똑같았다.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았다면 유지되지 않을 깔끔함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 공간에 스며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다행이었다.
책상 위에 정돈된 물건들, 가구의 배치, 침구류 등등 한스라면 알지 못할 디테일들이 녹아들었다.
확실했다.
한스의 손길이었다.
부모님만큼이나 걱정스러웠던 한스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매일같이 자신의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리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만난 이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기분이었다.
정돈된 방.
한 인간의 마음이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30년간 이 공간이 변하지 않도록 매일같이 정성을 들인 한 인간의 마음.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부모님보다도 먼저 울타리 안에 들였고, 자신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단 한 번도 일반적인 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얼른 한스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와 함께 살아갈 때는 매일같이 조잘대는 그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잔소리를 온종일 들어 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쿠당탕!
“화, 황제 폐하?!”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놀란 얼굴을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여성이 떨군 물건들.
청소를 위한 도구들임을 확인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뒤늦게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방으로 돌아가면 한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
로만 드미트리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 * *
한스는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다.
본인이 맡은 바를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았고, 나중에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해서 업무가 많아지자 추가로 사람을 뽑으면서도 방만큼은 절대 본인이 청소했다.
그런 한스가 정말 좋았었다. 한결같은 한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따뜻한 마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기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차가운 물음에, 여성은 오히려 살짝 기쁜 듯한 반응을 보였다.
“황제 폐하. 제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한스 남작의 손녀인 한나예요.”
“……한나라고?”
“예. 드미트리를 떠나시기 전에, 매년 제 생일을 챙겨 주셨다고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기억이 났다.
한스의 아들 해리슨.
해리슨에게는 딸이 있었고, 한스가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여기는 손녀를 위해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건 매년 진행되는 행사였다. 드미트리의 귀족들은 한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손녀는 명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한스를 대체해 손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한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잔인한 현실을 의미했다.
한나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궁금하신 거군요. 사실 3년 전만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황제 폐하의 방만큼은 무조건 본인이 청소하셨는데, 나이를 먹어 기력이 쇠약해지시면서 저에게 모든 일을 물려주셨어요. 저도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이것을 가업(家業)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고요.”
10년 전.
한나는 훌륭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실제로 드미트리 제국에서 행정적으로 여러 직책을 맡았던 그녀였지만, 막상 많은 것을 경험하자 오히려 할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존재가 하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하인으로서 드미트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일을 물려받아 할아버지처럼 드미트리 가문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드미트리.
그 나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뿌리가 되어 준 가문이기에, 한나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일을 배웠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기뻤다.
할아버지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그의 부재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에.
한나는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황제 폐하를 본다면, 할아버지는 분명히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 * *
장소를 옮겼다.
단출한 방이었다.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수수한 그 방 침대에 한스가 누워 있었다.
“……화, 황제 폐하십니까?”
“일어나지 마라.”
한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예전과 달랐다.
기력이 쇠약해져 반쪽이 되어 버린 얼굴에, 흐릿한 눈동자는 로만 드미트리를 제대로 바라보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슬픈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30년의 세월은 절대 적지 않은 시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한스, 괜찮느냐.”
옆에 앉았다.
한스를 눕히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한스는 이빨이 없어 오물거리는 입으로 조잘조잘 말했다.
“괜찮다마다요. 황제 폐하는 잘 지내셨습니까? 챙기는 사람이 없어 불편한 점이 많았을 텐데, 황제 폐하를 생각할 때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고 많이 시장하시지요? 지금 바로 제 손녀에게 말해 점심상을 준비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가 맛있게 드셨던 음식들로요. 그나저나 얼굴은 왜 이렇게 상하신 겁니까? 제가 항상 몸을 챙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이 꼬리를 물었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한스는 끝날 것 같으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황제 폐하, 혹시 기억나십니까? 갑작스럽게 마을 최고령자에게 안내하라고 했을 때, 저는 도련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악독한 무리를 단번에 처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가 그동안 모셔 왔던 도련님에게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상했다.
호칭이 변했다.
흐릿해지는 한스의 눈빛은, 기억 너머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 이후로 달라진 도련님의 행보에 말이 많았습니다. 드미트리의 장자가 변화했다면서 감탄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도련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도련님이 어렸던 시절에.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항상 제 입에도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 군것질거리들이 얼마나 달았는지, 아직도 잊질 못합니다.”
“황제 폐하.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저는 정말, 황제 폐하 걱정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입니까?”
한스의 말들.
계속해서 시점이 바뀌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주름이 가득한 한스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들어 주었다.
한스와의 세월.
로만 드미트리는 빙의 이후의 삶을 기억하지만,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유년기였던 시절부터 자신과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30년을 기다렸다. 자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방을 청소했을 그 마음에, 언제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었던 한 인간의 진심 어린 마음에.
슬픔을 삼켰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황제 폐하라 부르면 황제로서 답해 주었고, 도련님이라 부르면 도련님으로서 답해 주었다.
똑똑.
“황제 폐하, 시간이 늦으셨습니다.”
해가 저물었다.
한나의 목소리에,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괜찮다. 오늘은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눈앞의 순간이 중요할 뿐이었다.
한스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30년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30년이 지나도록 기다렸으니, 한스로서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황제 폐하. 정말 너무하십시오.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면 남겨진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알겠다. 내 약속하마.”
한결같았다.
언제나처럼, 한스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한스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붙잡은 손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의 옆을 지켜 주었다.
* * *
짹짹.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아 따사롭게 비추는 햇살이, 아주 오랜만에 걱정 없이 평화롭게 잠든 한스의 얼굴을 비추었다.
은은히 웃으며 잠이 든.
그 행복한 얼굴에, 로만 드미트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