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608화 (608/615)

608화 출병(出兵) (7)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준혁의 목소리에, 일순간 현실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미트리 제국의 도움으로 위험한 위기는 넘긴 상황입니다. 그리고 크리스 님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안전은 드미트리 제국이 확보할 것이며, 일부 병력을 편성해 절대자들이 나타나는 지역들에 즉각 대응할 것이라고. 그러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대로 날뛰십시오.]

차원을 넘어.

드미트리가 부름에 응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헨리 앨버트와의 만남 이후,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월의 흐름에 일방적일 수도 있는 감정이 양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절대자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한 미래에는, 30년의 세월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돌아오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설마 30년의 세월을 하염없이 기다려 왔단 말인가.’

가슴이 먹먹했다.

30년.

절대 쉽지 않은 시간이다.

갓난아이가 성인이 돼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백 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사실상 30년의 세월은 인생의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자신을 위해 헌납했다. 사람들이 살아왔을 삶에, 사람들이 감내했어야 할 고통에, 그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 번의 삶.

세 번의 인연.

로만 드미트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지금과 같은 감정은 난생처음이었다.

‘정말 미련하구나.’

30년이라면 포기했어야 했다.

부름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케빈의 외형을 표현하는 김준혁의 말에, 소년이었던 케빈이 중년의 남성이 되어 버렸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30년을 감내해야 할 줄 알았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헨리 앨버트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에게 잊혀지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훗날 그들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지라도, 살아온 삶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를 위해 살아가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울타리에, 몇몇 사람들을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었구나. 너희가 나를 울타리에 들이지 않았다면, 나라는 인간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드미트리.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을 갈망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살아왔던 한 인간을, 진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이래서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압도적인 권력을 갖추어도, 김준혁과 강민호라는 자신을 따르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은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처음 드미트리의 세상을 떠났을 때는 몰랐던 그들의 공백을,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간절하게 바라는 열망이었고, 30년이라는 기다림이 있었다고는 하나 재회의 순간이 도래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30년의 세월만큼 자신을 향한 감정이 진심이었다면, 자신은 지금부터 그것에 감정적으로 충분히 보답할 것이다.

‘나는 반드시 드미트리로 돌아갈 것이다.’

재회는 잠시 미루었다.

지금은 자신을 묶어 두었던 족쇄를 풀어헤칠 차례다.

그동안은 많은 부분을 계산해야 했지만, 드미트리가 나타난 이상 더는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믿었다.

드미트리를.

대륙을 정벌했던 그때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막아서는 존재들을 모조리 찢어발길 것이다.

* * *

상황이 급변했다.

크리스가 몬테르를 처리한 이후, 케빈도 절대자와 맞닥트려 그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벌써 여섯.

여섯의 절대자가 처리되었다.

아직도 똑같이 여섯이 남았다고는 하나, 볼피르는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야…… 아악!]

[볼피르! 방법을 말해라! 이대로라면 모두 끝이다!]

의식 너머.

절대자들의 절망이 들려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절대자들로서는 게릴라 작전도 여의치 않았다.

일단 어디를 공격하든 드미트리의 병력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곧바로 따라붙는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순식간에 한 명의 절대자가 더 죽었다.

압도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정면 승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단 1초 만에 머리가 날아갔다.

‘정말 우리가 패배할 수도 있다니.’

참담했다.

절대자들은 살면서 패배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건만,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남은 절대자는 다섯밖에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열두 절대자의 힘을 합쳐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지금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우리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하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넷의 절대자가 죽었고, 그동안 무시해 왔던 다른 인간들에게도 셋의 절대자가 당했다. 우리는 인간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까마득한 세계에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었다. 언제든 패배할 수 있었으나, 반복되는 승리에 스스로를 신이라 착각했을 뿐이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발밑에 타오르는 도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인간들을 더 죽인다고 한들, 드미트리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절대자의 패배는 뻔했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는 그들에게, 패배 이후의 삶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볼피르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 너의 존재를 인정하마. 하지만 우리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마지막 결전.

최후의 방법이 필요했다.

승리를 위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던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볼피르는 마음속에 품어 두었던 무기가 하나 있었다.

볼피르가 의식을 확장시켰다.

‘절대자들이여. 모두 한자리에 모여라.’

마지막.

정말 마지막 승부수였다.

* * *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한적한 그곳에 절대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속속들이 나타나자마자, 겁에 질린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우, 우린 다 끝났어. 무려 일곱의 동족이 죽었다고. 우리 다섯이 죽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야.”

“볼피르! 로만 드미트리가 이렇게 강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든 말렸어야지.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은 배제하고 유희를 진행했어야지. 유희를 강행하는 바람에 지금 우리 모두가 죽게 생겼다고!”

“제발, 방법이 있다고 말해 줘. 너마저도 답이 없다면, 나는 당장 차원 너머로 도망칠 거야.”

다들 공포에 잠식되었다.

압도적인 존재를 상대로, 그들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휩쓸렸다.

공포, 절망, 고통 등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던 존재들이, 지금은 그동안 경험했던 인간들과 똑같이 나약한 표정을 보였다.

“한심한 새끼들.”

볼피르가 이죽거렸다.

절대자라 불리는 자신의 동족들.

그들이 모르는 진실이 있었다.

절대자들은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볼피르가 가장 먼저 세상에 나타났다.

최초의 절대자.

나머지 열하나의 동족을 맞이할 때까지, 볼피르는 생각보다 오랜 세월을 보냈다.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었다. 본인이 어떤 존재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두 번째 동족을 맞이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족의 모습에, 볼피르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배고픔이나.

적의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호기심.

볼피르가 동족을 공격했다.

그를 쓰러트리고, 살아 있는 채로 팔다리를 뜯어내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래서 다른 절대자들과는 다르게 감정이 풍부했다.

그때 목격했던 동족의 모습.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공포와 절망감, 그리고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볼피르는 여러 감정을 터득했다.

열하나의 동족을 받아들인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볼피르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만 바라보는 절대자들의 모습에, 순간 마력을 일으켜 그들의 존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콰악!

“아악!”

“보, 볼피르!”

“네, 네가 대체 왜?!”

절대자들이 발악했다.

그들은 볼피르의 마력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볼피르는 이미 그들을 옭아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절대자들을 압박했다.

그러고는.

“너희를 먹어 치움으로써, 나는 유일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니 감사해라. 너희가 죽을지언정,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테니까.”

콰득.

콰드드드득.

육식(肉食).

볼피르가 동족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 * *

팟.

차원의 경계를 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새로운 공간에 도달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아직 도망치지 못한 볼피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섯.’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 올렸다.

찰나의 순간.

볼피르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어떠한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채 곧바로 천마검법을 펼쳤다. 폭발적인 마력이 들끓었다.

그동안 절대자들은 단 한 명도 천마검법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에도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을 펼치며 상대를 공격했다.

콰콰콱!

콰콰콰콰콰콰콱!

세상이 찢겨 나갔다.

세상 전부를 소멸시키는 강력한 힘에, 볼피르는 이렇다 할 대응도 못 하고 그대로 쓸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히죽.

볼피르가 웃었다.

입술을 씰룩이더니, 정면에서 천마검법을 맞닥트렸다.

콰앙!

콰콰콰콰쾅!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볼피르는 천마검법을 막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폭발로 일어난 마력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존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회색빛이었던 볼피르의 육체가 검게 물들더니, 자연을 이용하던 그간의 전투 방식과는 다르게 육체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압박했다.

콰드드드득.

엄청난 힘이었다.

검게 물든 손톱이 내리칠 때마다 몸이 요동쳤고, 로만 드미트리는 모조리 맞받아치며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처음부터 이상함은 느꼈다.

볼피르의 존재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고, 그것이 분명 특별한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볼피르가 강해졌든 말았든.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존재였다.

이전에 처리했던 네 명의 절대자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볼피르를 처리해 인류를 위협하는 절대자들을 이 세상에서 모조리 소멸시킬 뿐이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볼피르가 뒤로 밀려났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그만한 힘을 갖출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다를 거다. 아주 오래전. 나는 열둘이었어야 할 내 동족을 먹어 치운 경험이 있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게 남들과는 다른 무기를 주었지.”

콰득.

콰드드드득.

기묘한 광경이었다.

볼피르의 몸이 뒤틀렸다.

온몸에서 팔과 다리, 머리가 튀어나왔고, 그것이 기존의 것들과 같이 합쳐지더니 검어지다 못해 새카맣고 거대한 육체를 형성했다.

그건 분명한 진화(進化)였다. 태생부터 생명체의 한계를 초월했던 절대자들이, 서로를 먹어 치움으로써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놈을 먹어 치웠을 때 나는 2배로 강해졌다. 그렇다면 넷을 먹어 치운 지금의 나는 어떨까.”

웃었다.

카르가스는 본인과 자신을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볼피르는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어쩌면.

사실 절대자들은 하나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혼자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신이 되고자 했다면.

볼피르는 진즉에 카르가스를 비롯한 나머지 열하나의 동족들을 집어삼키고 강해졌을 것이다.

굳이 강해지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상황에, 웬만해서는 동족들을 지켜 둔 채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지금은 달랐다.

진화를 받아들였다.

볼피르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하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의 경계 너머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느꼈다.

‘케빈?’

익숙한 마나.

익숙한 존재감.

곧바로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케빈은 절대자들을 추격하다가, 결국에 로만 드미트리와 볼피르가 있는 공간에까지 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항상 케빈과의 재회를 바랐다.

빈민가의 소년.

한스에 이어 울타리에 들였던 존재.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케빈을 마주하며, 그와의 재회를 기뻐할 차례가 아니었다.

슥.

몸을 틀었다.

케빈이 위험하지 않도록, 그 앞을 막아서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나는 당한 것 그 이상을 갚아 줄 것이라고.”

콰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동안과는 달랐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출하는 볼피르를 상대로, 로만 드미트리 또한 전력을 표출하고자 했다.

“너는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전력(全力).

이제는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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