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출병(出兵) (2)
드미트리에서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일이라는 말에, 주요 인물들은 모든 일을 뒤로 미뤄 두고 곧바로 소집에 응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
펠릭스가 말했다.
“차원 너머의 세상에서 드디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49일 뒤의 재앙을 대비하고 있으며, 그날이 찾아온다면 차원의 통로를 확보해 저희를 불러들일 판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드미트리와 차원 너머의 세상. 두 차원의 힘으로 절대자를 물리치겠다는 계획이나, 문제는 그들의 메시지에서는 ‘30년’이라는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의미입니까?”
“맞습니다. 메시지의 내용이나, 메시지를 담은 아티팩트가 두 차원의 괴리를 증명합니다.”
그 말에.
다들 신음성을 삼켰다.
그동안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 오면서, 설마 차원 너머 세상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헨리 앨버트가 목격한 ‘그때’와 드미트리의 시간은 많은 차이가 있지 않았기에, 차원 너머의 시간도 똑같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매일 의문이 피어오를 때면.
로만 드미트리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라면, 말없이 무책임하게 고통을 떠안길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일상을 살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리는 삶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30년의 세월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삶을 즐겼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으며, 퇴근해서 가족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무언의 약속처럼 정기적인 훈련에 기꺼이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진실이 밝혀졌다.
사람들의 믿음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무책임하게 30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30년이 넘도록 대리인의 자리를 고수해 왔던 로드웰 드미트리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정리했다.
“차원의 경계, 그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인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30년의 세월이 흘렀든 흐르지 않았든. 드디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메시지가 이 세상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한순간을 위해 준비해 왔다. 누군가는 미련한 기다림이라고 말했지만, 드미트리 제국의 전부였던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의 기다림은 드디어 보답을 받았다.”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 그렇게 삼십 년.
켜켜이 쌓였던 세월을 꾹꾹 눌러 담았다.
아직 결과를 확신할 수 없기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승리의 샴페인을 미리 따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집중했다.
지금 해야 할 일.
대리인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역할.
“결전의 날이 정해졌다. 그날을 기준으로 전군, 출병을 준비하라.”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예고한 시간.
곧 있으면 차원의 통로가 열린다는 사실에,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척척척.
“모두 위치로.”
“훈련했던 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대륙 제일의 강대국.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단 한 사람도 방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들은 30년간 반복해 왔던 대로 본인의 위치를 찾아갔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소에는 평화롭기만 했던 골목골목에 병사들이 들어차서 이동하는 모습은,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의 입에서 감탄사를 자아냈다.
사실 그동안 정기적으로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었지만, 본격적으로 실행하는 모습의 비장함은 완전히 달랐다.
“……대단하네.”
20대 중반의 사내.
도미닉이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 실종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라고 불리는 나이대의 사내였다.
지난 30년.
도미닉으로서는 참 의아했다.
설화처럼 내려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비현실적이었고,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혼란한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듣는 이야기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 왔다면, 도미닉은 부정적인 편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삼십 년이다.
드미트리의 병사인 아버지가 훈련에 참여할 때면, 도미닉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도미닉. 이 아비와 놀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단다. 드미트리 제국의 병사로서, 그리고 너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비로서. 이건 선택이 아닌 의무란다. 그러니 부디 이해해 주렴.”
어린 나이에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그냥 아버지의 시간이 빼앗기는 것이 싫었고, 그렇게 유년기가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기적인 훈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공감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직도 로만 드미트리가 돌아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실이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내온 신호가 30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그간 녹아들었던 세월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미닉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삼촌들, 드미트리의 수도를 수호하는 병사들, 그리고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는 실력자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30년간 합을 맞춰 온 만큼, 일사불란한 그들의 움직임은 소름이 돋을 만큼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직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 섞여 있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도미닉은 단 하나의 사실을 확신했다.
‘아.’
늙어 버린 아버지.
그에게 은퇴를 말했을 때, 아버지는 힘이 다할 때까지는 끝까지 버텨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날이 찾아왔을 때, 힘이 있는데도 도미닉처럼 지켜보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제는 늙어 버린 얼굴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어. 그게 아니고선,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는 없겠지. 오늘의 이 날이 있기에, 지난 30년은 헛되지 않았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들끓었다.
20대 중반의 나이.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다.
하지만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를, 모두가 갈망하는 그 존재를 정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전군.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카이로, 헥토르, 움베르토 등 각국의 실세들까지 모두 소집 명령에 응했다.
거대한 공간.
그것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망.
로드웰 드미트리는 무장을 갖춘 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팔락.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로드웰 드미트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라는, 이 세상 전부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덕분에 평화를 되찾았다. 만약 그분과 같은 영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
힘을 실었다.
오래전에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드디어 사람들 앞에서 내뱉을 수 있었다.
“30년이 걸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일군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분이 만들어 낸 체제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우리가. 황제 폐하의 부름에 응해 보답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희망적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차원의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알 수 없으며, 절대자라고 불리는 적을 상대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30년간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어그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릉.
검을 뽑았다.
본인 또한.
차원을 넘어갈 것이다.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선택이라면, 로드웰 드미트리는 기꺼이 본인이 먼저 타죽을 각오가 되었다.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명심하라. 우리는 그동안 이 한순간을 후회 없이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전군-.”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출병하라.”
사납게 내뱉은 그 음성에, 거대한 공간이 뜨거운 울림으로 물들었다.
* * *
포탈 앞.
그곳에 펠릭스와 케빈이 있었다.
준비는 모두 완료되었지만, 전군을 포탈 너머로 보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펠릭스가 말했다.
“케빈 님.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케빈 님의 목적은 차원의 통로가 정상적으로 확보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곧바로 ‘귀환 마법’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차원의 경계에서는 마법적인 능력이 얼마나 통할지 알 수 없습니다. 절대,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차원 너머.
통로가 형성되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검증 없이 작전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원래라면 파비우스 후작이 이번 임무를 담당하기로 되었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격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나이를 제법 먹어 버렸다.
그렇게 케빈이 대체자로 나섰다. 다른 사람들도 본인이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로드웰 드미트리조차 케빈의 열망을 막아내진 못했다.
지난 30년.
케빈은 반복된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르게, 케빈은 오로지 집과 훈련장을 오가면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열망을 꾹꾹 억눌렀다.
누군가는 그것을 광기라고 표현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의지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삶의 밑바닥.
신처럼 내려온 한 줄기의 빛.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날의 강렬함을, 그날의 환희를.
케빈은 차원의 경계에 육신이 찢겨 나간다고 한들, 가장 먼저 로만 드미트리의 세상에 도달하고 싶었다.
꽉.
검을 움켜쥐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물려주었던 검이, 익숙하게 손아귀에 감겼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원 너머의 세상을 확인한다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준비는 끝났다.
케빈이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포탈을 눈앞에 두자, 펠릭스가 마법 장치를 조절했다.
이윽고.
화악.
쿠르르르르르릉.
환한 불빛이 일어났다.
차원의 경계가 일그러지며, 그 너머에 어렴풋이 새로운 세상이 드러났다.
“지금입니다.”
펠릭스의 신호.
망설임은 없었다.
케빈은 곧바로 포탈 너머로 몸을 던졌다.
* * *
세상이 빙글 돌았다.
통제할 수 없는 흐름에서 벗어났을 때, 케빈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몬스터들로 득실거리는 세상이었다.
‘성공한 건가.’
확실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로만 드미트리의 세상임은 알 수 없지만, 차원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상에 도달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펠릭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피 칠갑을 한 채로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중간에 몬스터들을 맞닥트렸지만, 그들은 마치 포식자라도 만난 것처럼 본능적으로 길을 열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가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에게 진실을 물었다.
“묻겠습니다. 당신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사람입니까?”
단 하나의 사실.
중요한 문제였다.
케빈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사내의 눈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그때부터 케빈의 심장도 뛰었다.
사내의 대답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드미트리 제국도 이번 전쟁에 참전하겠습니다.”
짧은 대답.
그것으로 충분했다.
케빈이 검을 뽑았다.
이름 모를 사내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싸울 것이다.
‘펠릭스 님. 우리의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제 이름은 케빈입니다.”
몬스터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는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렸던 만큼, 이 순간을 갈망해 왔던 만큼.
지금부터 막아서는 존재들은 모조리 도륙해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