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마지막 재앙 (1)
평소와는 다른 아침이었다.
사람들은 날이 밝자마자 부단히 움직였고,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일반 시민들을 통제했다.
“1번부터 1000번까지는 A구역, 1001번부터 2000번까지는 B구역, 보호 대상으로 분류된 시민분들은 본인이 해당하는 구역으로 차례로 이동해 주십시오.”
“물자는 쉘터 내부에서 지급될 예정입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자들이 예고한 시간은 아직 하루가 남았으며, 지금 당장 공격당하더라도 방어 시스템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쉘터에 한번 들어가면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나올 수 없으니, 놓친 부분들이 없는지 확실하게 확인한 뒤에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쉘터로 진입하시면 됩니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철저하게 훈련해 온 부분이니만큼, 시민들을 통제하는 그들에게서 혼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매뉴얼에 따라.
일반 시민들을 쉘터로 안내했다.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며, 대한제국의 한 병사가 놀랍다는 표정을 보였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바뀔 수가 있구나. 불과 몇 년 전에는 모두가 앞다투어 쉘터에 진입하려는 바람에,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나 시간이 지체되곤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한 대재앙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이 동요하질 않네.”
“당연한 거 아니냐. 강민호 사건으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어떤 분인지 증명되었잖아.”
강민호 사건.
조동섭의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던 그 사건은, CCTV 너머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절대자는 신이 아니었다.
라는 진실을 밝힘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민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때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절대자는 감히 대적하지 못할 존재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본인의 사람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진심을 확인했다.
보라!
버티고 버티다 보면.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죽음을 앞두었던 강민호가 살아남은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사람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희망이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절망을 대비하는 훈련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의기투합하며 이를 악물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했다.
모두가 강력한 믿음을 보였다. 인류의 위기를 해결할 사람은 로만 드미트리뿐이며, 최대한 그에게 협조해 인류가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지금의 광경.
그로 인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쉘터로 이동하는 사전 훈련을 진행했고, 그렇게 당일이 되었을 때는 조금의 혼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살아남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물
론 모든 사람이 살아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약이 없는 미래와 희망이 존재하는 미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상급병으로 보이는 병사가 말했다.
“이 세상에 감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불복하는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절대자의 하수인이겠지. 그리고 저걸 보라고. 저런 모습을 보고도 누가 쉘터의 시스템을 의심하겠어.”
병사가 가리킨 곳.
그들의 시야에는 딸을 배웅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 * *
강민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동안 많은 부분을 준비했지만, 막상 어린 딸을 보내려니 걱정하는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민아야. 아빠가 없다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삼촌 따라다니면서 밥도 잘 챙겨 먹고 심심하면 게임도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민아가 아빠를 믿고 잘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돌아올게.”
“걱정하지 마, 아빠.”
강민아가 싱긋 웃었다.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지만, 강민호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강민아는 애써 웃음을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세상 물정 모르고 투정을 부릴 나이에, 하나뿐인 엄마를 잃은 강민아는 철이 들어야만 했다.
특히 강민호 사건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강민호가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절대 강민호에게 부담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빠가.
하나뿐인 아빠가.
괜히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위험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강민호는 딸의 모든 것을 세심하게 확인하더니,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는 말에 옆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촌이라 부른 사내는 수호대의 일원이었다.
전투 도중에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었고, 보호 대상으로 분류된 그에게 강민아를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사내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민호 덕분이었기에, 목숨을 걸어서라도 강민아가 다치는 일은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강민호는 인류의 승리를 확신하나, 그렇다고 본인이 딸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전투에 나서는 모두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으나, 우리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안위는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내게는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해.’
황제의 배려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투 병력을 편성하되, 강민호와 같이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은 해당 위치에 배치했다.
전투력의 극대화를 위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대재앙이라는 것이 수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싸움이라면, 사람들을 어떤 곳에 배치해야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을지를 알았다.
황제에게 감사했다.
적어도 딸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민호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덜 수 있었다.
조동섭과의 격돌.
그때와 같았다.
강민호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버티다 보면, 자신이 죽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면 충분했다. 가족을 뒤로하고 전장으로 떠나는 가장에게, 딸이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문제를 해소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야 했다.
울음을 삼키는 딸을 뒤로하고는, 강민호는 차가운 얼굴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A구역을 폐쇄하라.”
“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인류가 승리하지 않는 한, 딸이 머무르고 있는 A구역 쉘터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 * *
그 시각, 대한제국 회의실.
그곳에 각국의 지도자들이 집결했다.
절대자와의 결전을 앞둔 상황에,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각자의 준비 상황을 말했다.
“미국은 어제 자정을 기점으로 모든 훈련을 종결시켰습니다. 현재 주요 거점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으며, 대규모 포탈(portal)과 비상용 포탈에 대한 점검도 모두 끝마쳤습니다.”
“중국도 마지막 마무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상태이며,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포탈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특별한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이탈리아는…….”
특별할 건 없었다.
지난 49일.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전 세계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시뮬레이션 훈련을 수도 없이 진행했기에, 막상 D-day에 도달한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스스로를 믿었다.
그동안 인류는 사지가 부러지며 피를 토해 내는 고통을 감내했고, 단 하나의 변수조차 허락하지 않기 위해 눈을 붉혔다.
절대자는 분명히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재앙을 선사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인류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이었다.
멸망하든, 살아남든.
어중간한 선택지는 없었다.
강렬한 의지를 표출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 소환을 위한 마법 실험은 최종 단계까지 마무리한 상태입니다. 예정되었던 대로 대재앙이 발발한다면 곧바로 차원의 균열을 이용해 드미트리를 소환할 계획이나, 문제는 차원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의 포인트는 바로 그 4시간에 있습니다. 절대자들이 만약 머릿수의 우위를 보려 한다면, 저희는 최대한 버텨 드미트리를 소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원이 연결되는 순간, 인류는 본격적인 반격을 시도할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재차 계획을 되새겼고, 각국의 지도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본인들의 의지를 표출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서늘한 기분이 맴돌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경험했던 대재앙과는 다르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인류가 겪어 왔던 고통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다. 이번만큼은 각국의 국익을 떠나서, 하나의 인류로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모두 명심하라. 만약 생각과는 다르게 계획이 진행될지라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많은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지금, 이 자리.
로만 드미트리의 역할은 명확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마라.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큼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충분히 준비했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 * *
모두가 물러난 자리.
홀로 남은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평소답지 않은 얼굴로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으로 절대자들마저 쓰러트린다면, 나는 과연 인간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삶.
우여곡절이 많았다.
천마 백중혁이던 시절에 우화등선(羽化登仙)을 경험했으나, 인간으로서 죽고 싶은 마음에 하늘의 부름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몸에 빙의되었고, 또다시 군림을 이루어 내는 과정에서 마왕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악의를 포착했다.
물러날 수는 없었다.
군림하든, 패배하든.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눈앞의 적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왕을 죽였다.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는 인간답게 살아가길 바랐으나, 차원의 경계를 넘은 대가로 자신은 또 다른 시련을 강요받아야만 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만약 처음에 순순히 우화등선을 받아들였다면, 이처럼 많은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번 인간으로서 존재하길 바라기에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들은 고민조차 하지 않을 문제들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번에도 같았다.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아야만, 신에 버금가는 절대자들을 처리하고 인류는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우화등선을 거절할 때도.
지금도.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단을 내린 상황에, 스스로의 선택에 의문을 지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야만 한다.’
절대자.
그들을 쓰러트릴 것이다.
그들을 척결해, 반드시 자신의 삶을 되찾을 것이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했으나, 무엇을 얻고자 투쟁(鬪爭)하는 삶 또한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었다.
항상 갈망했다.
인간으로서 존재하기를.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문득, 자신을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봐 주던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구한 인생이로구나.”
마지막 결전.
이번 문제마저도 해결한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있었다.
생각을 미루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차분하게 의식을 가라앉히며 때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었고.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시계가 11시 50분을 가리켰을 때.
끼익.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문을 나서자 김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고, 이윽고 한 장소에 도착했다.
“미리 세팅을 끝냈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말씀하시면, 지금 하시는 모든 얘기가 전 세계에 전달될 것입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걸음을 옮겼다.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들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동안 인류가 감당해야만 했던 재앙은 인류의 의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절대자가 나타나 시련을 부여했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희생되는 상황을 감당해야만 했다. 내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결심했던 미래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결과에 책임지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바랐다.”
그건.
본인의 소망이기도 했다.
지도자는 스스로의 뜻을 투영했고,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랐다.
“내가 황제로서 존재하는 한 알량한 권력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49일간 악착같이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고,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인류가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최소한 준비된 혼란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모두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다. 수많은 생명이 덧없이 죽어 나가겠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기억하라.”
마지막.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다.
“재앙이라는 먹구름이 모두 지나간 뒤,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툭.
통신을 끊었다.
때마침 시계도 12시를 가리켰다.
때가 되었다.
절대자가 예고한 시간에 도달하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쿠릉.
쿠르르르르릉.
하늘 너머.
새카만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먹구름이 걷히는 날, 인류의 명운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