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49일 (6)
이번 훈련을 계획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수뇌부들을 불러들였다.
만일의 가능성.
49일 뒤를 대비하면서도,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했다.
“너희가 절대자라면 인류가 발악하는 이 상황에 어떻게 행동할 것 같나. 49일 뒤에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한다면 그 선택지들을 말하라.”
천마신교.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백중혁이 온갖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의 변수도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 때문이었다.
대비한 것과 하지 않은 것, 생각이라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실전에서 둘의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런 이유로 로만 드미트리는 전 세계를 상대로 ‘절망’을 대비하는 훈련이라는 파격적인 방식을 진행했다.
익숙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종종 역으로 질문해 왔기에, 김준혁이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열을 일으키려 할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은?”
“현재 인류는 하나가 되어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절대자가 본인들을 과신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의지를 꺾을 ‘무언가’를 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류에 중요한 인물들을 본보기로 처형함으로써 경고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멸망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된다면, 아무리 의지가 굳건하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결속력에 균열이 생길 것입니다.”
타당한 의견이었다.
49일 뒤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예정한 상황에서, 굳이 그에 버금가는 대규모 테러를 진행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준비하겠지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김준혁의 말과 같았다.
소수의 암살.
효율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만약 절대자들이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대화를 듣지 못하고 인류를 무너트리기 위해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면. 인류로서는 그만한 위험을 감당해야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절대자는 그동안 스스로를 신이라 여겼다. 그런 존재가 인간과 똑같이 머리를 굴려 본인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고자 한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그들이 초월적인 능력과는 별개로 ‘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신.
초월적인 존재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생명의 탄생과 끝이 존재하는, 물리적으로 소멸될 수 있는 생명체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한계를 초월했기에 신이라 불릴 수 있다.
승리하기 위해 계략을 준비하고 아득바득 발악하는 모습은 신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런 결과는 오히려 득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인류를 집결할 원동력.
절대자의 위치를 인간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인류의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절대자들이 목표로 삼을 인물들은 각국의 주요 인사들일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만일의 변수에 대항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 * *
최선의 방법.
49일 내내 경호팀을 붙여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설치했는데, 그 대상 중에는 ‘강민호’의 딸인 강민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강민아 자체는 특별히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그녀를 포함시킨 이유는, 절대자들이 본인을 노리지 않는다면 자신과 관련한 모든 인물이 목표 대상에 오를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공략해 불안감을 증폭시키려는 의도.
사람들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지 반신반의했지만, 0.01%의 확률이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강민아도 보호 대상에 올랐다.
그리고 예상대로였다.
불법 침입자로 인해 포탈이 반응했고, 강민호는 다른 업무를 처리하던 도중 이곳으로 소환되었다.
강민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설명해 봐. 넌 누구고, 어째서 내 아이를 해하려는 거지?”
스릉.
검을 뽑았다.
상대의 의도는 명백했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해하려는 목적이라면, 어떻게든 그를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계획과는 다른 상황.
조동섭이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골치 아픈 새끼들이네. 그동안 수많은 인간을 경험했지만, 너희 같은 녀석들은 처음이야.”
히죽 웃었다.
들켰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은 강민호였고,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으니까.
“미안한데, 네 딸 좀 죽여야겠다.”
파팟.
카카카캉!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동섭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공간을 파고들더니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강민호를 몰아붙였다.
강민호는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공격을 막았다.
그가 터득한 무공은 방어에 특화된 것인데도, 빠르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공격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법인데?”
콰앙-!
강민호가 밀려 나갔다.
검을 들며 막아 내는 모습에, 조동섭은 곧바로 옆을 파고들더니 아래에서 위로 검을 쓸어 올렸다.
‘아래.’
강민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훈련.
상대가 아무리 빨라도 놓치지 않았다.
먼저 공격 방향을 선점하며, 강민호는 폭발적으로 마력을 분출해 반격도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홀드(hold).”
작게 속삭이는 음성.
강민호의 몸이 굳어 버렸다.
조동섭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F등급의 헌터가 아닌, 절대자 볼피르의 권능이 깃든 아바타(avatar)였다. 그의 마력은 강민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볼피르의 마력에 비하면 정말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강민호는 몸을 옭아매는 마력에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아득바득 한 발 물러나 급소를 피했지만, 가슴팍이 얕게 베이며 조동섭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단 한 번의 틈.
상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강민호가 내부에 침투한 홀드의 마력을 분해하려고 하자, 끔찍한 고통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푹.
“……?!”
차갑게 밀고 들어오는 감각.
복부를 파고든 조동섭의 검에, 강민호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 * *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강민호는 고개를 떨구며, 내부에 맹독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는 마력에 검붉은 피를 뱉어 냈다.
“쿨럭.”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거야. 내 마력은 하찮은 인간들의 것과는 달라서, 조금이라도 내부에 침투하는 순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거든. 큭큭큭, 지금 당장 네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것도 재밌겠지만, 나는 왠지 네가 보는 앞에서 딸을 죽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말이지.”
조동섭이 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조동섭이었을지 몰라도, 볼피르의 권능이 깃들면서 그는 절대자의 명령을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오로지 볼피르를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 그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강민호를 지나치더니, 강민아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끼익.
“……뭐야 이건?”
문 너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강민아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휑한 방 안에는 생명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큭, 크큭, 크하하하.”
강민호가 미친 듯이 웃었다.
피를 흘리는 바람에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면서도, 강민호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대단했다.
그가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하나뿐인 딸인 강민아는 절대자에게 처참히 살해되었을 것이다.
“너희는 신이 아니었어. 정말 신이 아니었다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을 불러들이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 절대자가 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고. 너희가 만약 승리를 위한 전략을 행한다면, 승리를 위해 발악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는 그 얼굴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모든 사람에게 너희도 똑같은 생명체임을 증명할 것이라고.”
손가락을 들었다.
강민호가 가리킨 곳에는, 이곳 건물 내부 상황을 촬영하는 아주 작은 CCTV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화면에 담겼다.
애초에 함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조동섭으로서는, CCTV와 같은 변수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절대자와 로만 드미트리의 차이였다. 태생부터 절대적이었던 그들과는 다르게, 삶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것을 계산했다.
강민호가 말했다.
“멍청한 새끼들. 내 딸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 혼자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꼴이라니. 네가 이 자리에 나타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어. 인사나 하지. 네 우스운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명백한 조롱.
조동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절대자들에겐 인간들과 똑같이 감정이 존재했고, 볼피르와 연결되어 있는 그로서는 강민호의 조롱을 참아넘길 수 없었다.
이미 당했다.
그렇다면.
“그래, 너라도 죽여 주마. 딸을 죽이든, 아비를 죽이든.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것은 똑같을 테니까.”
* * *
일련의 상황.
강민호는 현기증이 일었다.
내부에 파고든 마력에 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직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목표의 대상으로 추정되는 모두에게 부여된 임무였고, 자신이 선택된 상황에 반드시 이행해야만 했다.
비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조동섭의 모습에, 격하게 들끓는 마력을 끌어 올리며 검을 들었다.
“그래, 끝까지 발악해라.”
팟.
콰앙-!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동섭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지더니, 순간적으로 눈앞에 나타나며 그대로 강민호를 강타했다.
강민호는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막아 냈으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그대로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고통에 신음할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고개를 들자 조동섭의 모습이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콰앙!
콰콰콰콰쾅!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이었다.
머리를 막으면 오른쪽을,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을, 강민호는 울컥거리는 핏물을 토해 내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조동섭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이미 승패는 명확한 상태였다. 복부에 검을 허용한 순간부터 몸은 정상이 아니었고, 단순히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으로 머릿속이 뒤얽혔다.
그렇다 해도.
무너질 수는 없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이, 주화입마(走火入魔) 상태에 돌입했는데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조동섭은 강민호를 조롱하듯, 공방의 연결 고리마다 강민호의 사지를 베었다.
“인간들은 보아라. 너희가 앞으로 경험할 미래를.”
팟.
피가 튀었다.
공격을 막아 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허벅지가 베였고, 또 다른 공격을 막아 냈는데 이번에는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강민호는 수호문의 무공을 터득하며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볼피르의 아바타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컸다.
사실 언제든 끝낼 수 있는 싸움이었다.
조동섭은 강민호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CCTV 너머 인간들이 절망적인 현실을 목격하길 바랐다.
겨우 몇 분.
강민호는 혈인이 되었다.
피로 흠뻑 물들었는데도, 언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도, 강민호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끝까지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누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조동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악, 하악.”
웃음이 나왔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딸은 아버지를 잃겠지만, 그것은 정말 너무나도 절망적인 현실이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딸을 보살펴 주겠다고.
본인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가족이, 버림받아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조동섭의 앞에 자신이 존재해서 다행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받기만 해 왔는데, 드디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
끝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에게 하나의 계획을 전달했고, 그래서 강민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만 했다.
조동섭이 다가왔다.
저승사자라도 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강민호가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가 신이 아님이 증명되었다면 우리가 인류의 승리를 위해서 무엇을 의도한다고 생각하나.”
“말이 많네. 이만 죽어야겠어.”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한들, 나는 인류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콰르릉.
콰르르르르릉.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주화입마로 엉망이 된 단전에서, 선천지기(先天之氣)가 강렬한 빛을 발했다.
죽을 것이다.
허무하고 덧없는 죽음일지라도, 이로 인해 로만 드미트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바가 증명받을 것이다.
그렇게 달려들려는 순간.
“고생했다.”
익숙한 목소리.
강민호의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 CCTV 너머의 존재들.
그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절망적이었던 훈련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의도.
허무하게 죽을지라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신뢰.
“지금부터는 내가 해결할 차례다.”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