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화 49일 (1)
다음 날, 이른 아침.
미국의 대통령 존 해리슨은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
“예.”
“믿기지 않는군. 어둠의 세계를 장악했다고 알려진 암영이, 하루아침에 모두 몰살을 당했다니.”
보고서 안.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제공한 정보였으며, 로만 드미트리가 의도적으로 암영의 공격을 유도해 그들을 몰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지 않았다. 각국의 권력자들은 암영이 얼마나 강대한 세력을 갖추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노골적으로 파 놓은 함정에 발을 들여, 순수 무력으로 암영을 모두 몰살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불과 1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절대자를 상대로도 칼을 들이미는 그분의 무력이라면, 암영 또한 한낱 인간일 뿐. 알량한 세력을 믿고 그들이 자기 무덤을 팠구나.’
로만 드미트리.
매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시점에, 자신이 러시아의 마르코프처럼 그를 적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단언컨대 천조국(千兆國)의 강력한 국방력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선택에 불과하지만, 미국이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순순히 ‘이인자로 전락한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국민들.
그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일인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에, 지도자인 존 해리슨을 비난하는 여론을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세계 전체가 받아들였기에, 오히려 존 해리슨의 선택이 탁월하다면서 다음 대선에 대한 지지 여론이 생겨날 정도였다.
상념을 접어 두었다.
비서의 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직접 미국을 방문한다고 하셨습니다. 방문 목적은 연합국의 전력 강화이며, 연합 훈련을 위해서 미국의 전력을 소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훈련의 형태는?”
“보고서 뒷장에 있습니다.”
팔락.
보고서를 넘겼다.
순간 존 해리슨의 표정이 굳었다.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었지만, 이곳에 나온 내용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는 매우 노골적이었다.
탁.
보고서를 덮었다.
존 해리슨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께서 수많은 연합국 중 미국을 먼저 선택한 이유는, 미국이 대한제국 다음가는 강대국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를 ‘본보기’로 내세우려는 의도겠지. 그분의 비위를 맞추려고 어중간하게 상대할 필요는 없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목적이 49일 뒤의 대재앙을 대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겠지.”
의도를 파악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지금 당장 사령관들을 소집하라. 내일 있을 연합군 훈련에, 우리 미국은 사활을 걸 것이다.”
* * *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그곳에 군사 훈련을 위해 넓게 마련된 공간에, 존 해리슨의 명령을 받은 병력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미국의 정예 병사들.
특수 부대 등등.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존재들이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들은 서로를 확인하며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동부의 호크아이(Hawk-eye)라니.”
“호크아이라면 S등급의 헌터인 체이스가 이끄는 특수 부대잖아. 절대 일반적인 임무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호크아이도 이번 훈련에 소집되었구나.”
“호크아이뿐만 아니야. 지난 대재앙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마법 부대 볼케이노(Volcano)도 있어.”
미국을 대표하는 실력자들.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반 병사들조차도 군에서 인정을 받은 존재들이었지만, 호크아이와 볼케이노 같은 네임드들의 등장에 서로 속닥이기 바빴다.
그들로서는 훈련을 위해 소집했다고만 들었을 뿐, 정확히 어떤 훈련인지는 알지 못했다.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 이만한 병력을 불러들였는지.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한 사내의 등장에 이전보다 더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헉.”
“리처드다.”
“방랑 검객 리처드!”
미국 최고의 실력자.
미국이 자랑하는 제일의 검이나, 몇 년 전에 스페인의 S등급 헌터인 사무엘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명성이 한번 꺾였었다.
하지만 최근 그에 대한 평판이 다시 물이 올랐다.
사무엘에게 패배한 이후 리처드는 폐관 수련에 돌입했고, 본인의 전승인 ‘방랑 검객 카리스’의 능력을 완전히 각성했다.
이제는 사무엘을 이길 수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미국에서 주목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훈련에 임했다.
대통령의 명령이 아니라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인데, 그조차 이번 임무에 소집되었다.
대체 어떤 목적의 훈련일까.
사람들이 아는 것은 존 해리슨의 경고뿐이었다.
“모두 최상의 상태로 준비하라. 이번 훈련에 너희의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며, 어중간한 태도로 훈련을 망치는 존재들은 엄히 처벌할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부디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마라.”
소집의 목적이 무엇이든.
이번 훈련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자긍심이 걸린 문제라는 말에, 사람들은 서로 떠들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
마침내 존 해리슨과 더불어 한 존재가 나타났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입장하십니다.”
대한제국의 황제.
인류의 지도자.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에, 사람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로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에,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49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절대자가 예고한 파멸적인 대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대재앙과는 완전히 다르다. 상상하지 못할 규모로 인류를 쓸어버릴 것이며, 지금까지의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버텨 낼 수 없는 공포를 선사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두가 대재앙을 대비했다.
그들 또한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상식을 벗어나는 공포다. 너희가 아무리 발악한들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앞으로의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마라. 절대자와의 전쟁은 모든 예상을 깨부술 것이며, 미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있는 너희조차도 대부분은 투쟁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겠지. 그래서 이번 훈련을 소집했다. 나는 이 자리를 통해 절망을 훈련시킬 생각이다.”
훈련의 목적.
그 발언에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절망을 훈련시킨다는 발언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단어가 주는 공포가 사람들의 숨통을 조였다.
호크아이든.
볼케이노든.
리처드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의미가 없는 이름값이었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너희 전부는 지금부터 백의의 마법사를 상대할 것이다.”
순간.
사람들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절망을 경험할 정도의 훈련이라면, 당연히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던 로만 드미트리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판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김판석 본인 또한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었는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다소 놀랐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것은 찰나의 감정일 뿐.
김판석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참 말도 안 되는 임무였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의 전력을 상대로도 그리 두려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날 시험대에 올리셨다.’
하루 전.
암영을 처리한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달해 주었다.
마법 문명에서 이룩했던 모든 것, 상단전에 관한 지식들.
김판석 자체적으로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지만, 그를 수하로 받아들인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감격했다.
김판석은 홀로 펑펑 울었고, 밤새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의 지식을 반복해서 되새겼다.
24시간 전의 자신.
그리고 지금의 자신.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사람들은 겨우 24시간 만에 얼마나 변화할 수 있겠냐고 코웃음을 치겠지만, 알렉산드르로서 대륙을 평정했던 김판석에게는 다른 이야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김판석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라고 말했다.
자신 또한, 로만 드미트리처럼 비상식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도 아닌 자신에게 무너진다면, 미국은 엄청난 절망감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존 해리슨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이다.
존 해리슨은 웬만해서는 순순히 받아들였겠지만, 이번만큼은 로만 드미트리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백의의 마법사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 폐하 이후 처음으로 SS등급으로 분류되는 실력자인 만큼, 미국의 그 어떤 실력자도 백의의 마법사를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일대일의 대결로는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번 훈련은 황제 폐하가 말씀하셨듯이 ‘절망’을 훈련시키기 위함이 아닙니까.”
존 해리슨은 전투의 문외한이 아니다.
실력자들이 서로 맞붙었을 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았다.
“백의의 마법사는 겨우 한 명일 뿐입니다. 미국의 전력이 작정하고 그를 쓰러트리려고 한다면, 마법사들의 마법 방해와 같은 적절한 역할 분배만으로도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해 낼 수 있습니다. 물론 피해는 있겠지요.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훈련의 성과입니다. 이왕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신 거라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상대로 절대자의 절망감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인류를 위한 충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인류가 살아남길 바라기에, 훈련을 조금 더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말했다.
그의 조언.
나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충분히 이해하나, 굳이 그것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지금부터는 김판석의 몫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김판석의 시선이 뒤얽히자, 무언의 승낙을 받은 김판석이 존 해리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겨우 저로는 훈련의 목적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참.
같잖았다.
알렉산드르 시절이었다면, 존 해리슨과 같은 인간들은 자신과 감히 겸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존 해리슨의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지금부터 백의의 마법사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업보의 펜던트를 부숴 버린 이상, 단어 하나하나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김판석이 말했다.
“사실 그동안 단어를 가려 말하느라 진심을 말하지 못했는데, 막말로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 중에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볼케이노? 미라클? 겨우 미국의 마법사들이 제 마법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X 같은 시스템에 의지해서 이제까지 마법을 사용해 온 사람들은, 겨우 일이 년 열심히 훈련했다고 해서 감히 저를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보였다.
상당히 상스러운 어투와 파격적으로 내뱉는 발언에, 존 해리슨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백의의 마법사는.
절대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절대적인 선으로 기억하건만, 김판석은 이 자리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존 해리슨 대통령님. 황제 폐하가 바라는 바는 이번 훈련을 통해 절망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생각 그대로 전력을 다하십시오. 스스로에게 강한 확신을 지녔을 때야말로, 압도적인 패배로 진정한 절망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웃었다.
계속되는 도발에, 미국의 병사들이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뭘 꼴아봐, 이 새끼들아.”
김판석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