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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82화 (582/615)

582화 선택받은 자들 (2)

조금 전.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보고받았다.

선택받은 자인 줄리앙이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절대자가 자신을 직접 만나길 바란다는 사실을.

변수였다.

줄리앙과 같이 반항하는 존재가 나타나는 것은 충분히 계산했지만, 절대자가 ‘자신의 후원자’를 통해 접근해 올 줄은 몰랐다.

이건 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줄리앙을 처리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절대자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절대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수뇌부들이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다.

일단 대화를 나누고 다음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선을 그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상식을 생각할 때,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았다.

“우리는 이미 절대자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든, 인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절대자를 척결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로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감히 대한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고, 내가 그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인류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선례를 남기겠지.”

생각해 보라.

강대국이 약소국의 요청을 들어주는 경우가 있을까.

없다.

적어도 약소국이 고개를 숙이고 제발 한 번만 대화를 나누자고 부탁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죽이면서 ‘지도자’를 불러들이는 상황에 강대국은 평화로운 방법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명백한 무시다.

상대는 적의를 드러냈고, 자신의 사람이 죽었는데도 뭐라도 알아보겠다고 담담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현실에 타협한다는 의미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대자가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존재였다면, 적어도 살육을 배제한 대화를 택했을 것이다.

선을 그었다.

적으로 구분했다.

어차피 한쪽이 멸망해야 할 싸움이라면, 이따위 대화에 순순히 응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류의 주적은 절대자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실은 10번째 대재앙 이후에 인류를 살려 줄 의향이 있다고 한들, 아니면 모두에 득이 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고 한들. 인간을 개미처럼 학살하는 그들의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배제하라. 설령 그들이 그만하자는 입장을 전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지난 20년을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존재를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러섬은 없었다.

결단을 내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확실하게 끝을 보았다.

“김판석.”

“예.”

“줄리앙을 처리하라. 할 수 있겠나.”

김판석이 고개를 들었다.

줄리앙의 무력은 예상 불가였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신임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예, 자신 있습니다. 설령 절대자가 직접 강림한다고 한들 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 * *

그리고 지금.

줄리앙이 살벌한 표정을 보였다.

“너, 이 상황 감당할 수 있겠어?”

줄리앙.

강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A등급 헌터이나, 마법 구속을 풀고 학살을 벌일 정도라면 세간의 등급은 무의미했다.

어쩌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괴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정확히 거론한 이유가, 알렉산드르로서 살았던 자신에게 죄를 묻기 위함이 아님을 알았다.

벌이 아니다.

신뢰다.

줄리앙이 정말 강하다면, 그 대항마는 자신밖에 없다는 믿음.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이 아닌 대한제국의 누군가가 줄리앙을 제압하는 결과를 바랐다.

줄리앙은 대놓고 대한제국을 찾아왔고,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매우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

절대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논외의 존재로 취급하지만, 그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은 정말 하찮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줄리앙을 위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을 죽이고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입술을 씰룩였다.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도 선한 인물은 아니지만, 선악의 구분을 떠나 ‘내 편’을 무시하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랄하네. 미친 새끼가.”

딱 거기까지였다.

줄리앙의 표정이 빠르게 굳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나를 폭발시켰다.

“그래,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백의의 마법사마저도 죽인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겠지.”

파앙.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마력이었다.

줄리앙이 손을 휘두르자 그대로 김판석을 강타했고, 김판석은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이 블링크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바로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렁이는 불길이 줄리앙의 머리 위로 작렬했다.

“헬 파이어(Hell Fire).”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다.

전생의 수준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든 단번에 녹여 버렸겠지만, 8서클의 헬 파이어는 줄리앙을 상대로 통하지 않았다.

줄리앙의 마력이 헬 파이어를 맞받아쳤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완벽하게 막아 내더니 역으로 힘을 분출했다.

“데스 사이드(death scythe).”

번뜩.

콰콰콰콰콱!

불길을 그대로 갈랐다.

어둠의 마력이 줄리앙의 몸을 휘감았고, 거대한 낫의 형태를 한 마력이 김판석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레이트 실드.”

콰앙!

콰지지지지직.

겹겹이 형성한 방패막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물리적으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어 마법이건만, 줄리앙의 강력한 마력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줄리앙과 단 한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김판석은 상대가 ‘절대자’로부터 매우 특별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SS등급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

그것을 넘어설 정도의 힘.

김판석은 그레이트 실드로 시간을 벌더니, 일단 무너질 듯 흔들리는 건물을 벗어나 밖으로 향했다.

팟.

“어딜!”

줄리앙이 따라붙었다.

그에게서 작렬하는 공격을 모두 피해 내며, 김판석이 지상에 착지했다.

“세긴 세네.”

바로 눈앞에.

어느새 줄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마력으로 둘러싸인 그는, 마치 죽음의 사신과도 같았다.

히죽, 웃었다.

재밌었다.

김판석이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분명히 비상식의 영역에 암담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래도 황제 폐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매번 되풀이되는 문제였다.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불리해도.

로만 드미트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은 주군으로 모시는 그와 대립했을 때, 김판석은 수많은 세월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로.

“끝까지 해보자고. 다크 필드.”

풍덩.

김판석은 자신의 전력을 드러냈다.

* * *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현실과 공간을 분리하자, 다크 게이트가 열리며 수많은 망자와 S등급의 망자들이 공간을 뚫고 나왔다.

[죽여라.]

팟.

파파파파팟.

자하르와 고트였다.

그리고 이전에 획득했던 엘란.

무려 세 마리의 S등급 망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줄리앙은 눈앞의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조급함 따위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절대자님이 눈여겨보는 존재답구나.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절대 나를 쓰러트릴 수 없다.”

콰앙!

콰콰콰콰쾅!

줄리앙과 망자들이 부딪혔다.

자하르가 빠르게 공간을 파고듦과 동시에 고트가 철퇴를 휘둘렀고, 엘란은 후방으로 돌아 들어가며 공격했다.

완벽한 합이었다.

김판석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그들의 능력을 극한으로 살렸지만, 줄리앙이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힘은 인간 세계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했다.

화르르르르륵.

마력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줄리앙이 마력의 폭풍 속에 휩싸이더니, 복잡하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확.

처음으로는 자하르.

그가 가장 먼저 공격을 시도하자.

번뜩.

콰직.

머리를 베어 버렸다.

자하르는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공격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데스 사이드는 그대로 자하르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동시에 줄리앙의 육체에서 검은 형태의 가시들이 사방으로 분출되었다.

그것은 고트와 엘란의 몸을 관통했고, 줄리앙은 곧바로 달려들며 고트의 가슴팍을 베었다.

퍽.

피는 튀지 않았다.

상대는 망자였다.

고트는 가슴팍이 베이고도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왔고, 자하르는 어둠의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다시 머리가 붙고 있었다.

정말 까다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줄리앙을 쓰러트릴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3명의 S등급 망자와 아무리 많은 망자들이 머릿수를 내세운다고 한들, 줄리앙은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자신을 막아서는 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캬캬캬캭!”

전율이 일었다.

이 힘.

압도적인 학살.

이것이 절대자를 따르는 이유였다.

대재앙 이전 줄리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지만, 절대자를 받아들이며 특별한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어둠으로 변하고 그는 ‘김판석’을 확인하지 못했다.

망자들이 계속해서 밀려들 뿐, 멀리서 지원 사격을 해야 할 그가 그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내가 말이야.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 만약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같은 상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존재를 만난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야 할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부족하겠지. 예전처럼 차곡차곡 세월을 쌓아 가는 것만으로는 ‘비상식의 영역’을 감당하지 못하겠지.”

쿠르르르르르릉.

하늘 위.

김판석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상에 한 존재가 있었는데,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김판석에게 그대로 마력을 헌납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방법을 강구해 냈지. 내게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쌓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확보하자. 내가 다크 게이트에 차곡차곡 모아 둔 망자들은 일인 군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사시에 내게 마력을 부여할 비상식량 같은 존재들이지.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네크로맨서 네피르. 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한때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던 최악의 존재.”

S등급 망자.

김판석은 총 네 마리의 망자를 보유했다.

그중 하나는 지난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가 바로 네크로맨서 네피르였다.

그는 일반적인 망자가 아니다.

무려 선택받은 자.

그가 보유한 스킬 중에 재단(齋壇)이라는 스킬이 존재하는데, 김판석은 일순간 재단으로 모실 ‘대상’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제물은 모두 대상에게 흡수되었다.

망자들이 셀 수 없이 픽픽 쓰러졌고, 엘란과 고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미라처럼 비쩍 말라 가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망자들을 소멸시키는 스킬이지만, 이로써 나는 일순간이나마 전생의 경지를 재현한다.”

번뜩.

콰르르르르릉.

안광이 빛을 발했다.

어둠의 마력이 밀려들며, 마치 김판석을 어둠의 신처럼 보이게 했다.

“너 때문에 두 마리의 S등급 망자를 잃었어. 그러니까, 죽어라. 다크 퍼니쉬먼트(Dark Punishment).”

그 순간.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세상이 더욱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 * *

어둠이 걷혔다.

줄리앙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강력한 일격을 맞고도 끝까지 반항했으나, 김판석의 압도적인 힘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끄륵, 끄르륵.”

피를 토해 냈다.

피 가래가 끓었다.

믿기지 않았다.

절대자가 말하길, 그가 부여한 힘이라면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자신의 적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SS등급 몬스터를 처리한 괴물이라지만, 절대자의 비호를 받는 자신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도 아니고 김판석에게 당했다.

다크 필드는 절대자의 눈을 가렸고, 바닥에 쓰러진 모습에 절대자는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보내왔다.

‘절대자님……!’

하지만 그뿐.

도와주진 않았다.

절대자들도 그들만의 룰이 있다.

자신을 방관하는 절대자의 시선에, 줄리앙은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네, 네가…… 끄르륵, 승리했다. 패, 패배를 인정할 테니 로,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라. 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끄르르륵.”

간절한 음성이었다.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기세 싸움을 원했다.

그들의 승리를 인정했으니,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서 대화를 나눈다고 한들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참담하지만 제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줄리앙의 퀘스트는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대화였기에, 어떻게든 그를 불러야만 생존할 가능성이 허락되었다.

김판석은 조금 힘겨운 표정을 보였다.

그로서도 ‘재단 스킬’은 최후의 방법이었고, 전력을 모두 쏟아부었기에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가 줄리앙에게 다가가더니, 손바닥을 펴며 마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화악.

“왜 우리가 너희와의 대화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웃었다.

같잖았다.

이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다.

“그, 그게 무슨…… 컥!”

“그건 너희 생각일 뿐이야.”

푹.

목을 찔렀다.

단검으로 변한 마력이 목을 파고들자, 줄리앙은 눈을 부릅뜨며 김판석을 올려다보았다.

믿기지 않았다.

왜.

왜 대화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절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아니면 어떤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나쁜 방법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러니까, 죽어.”

푸슈슈슉.

뿜어내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김판석은 더욱 깊숙이 단검을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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