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선택받은 자들 (1)
팟.
타타타탁.
멕시코 시티의 한 골목.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급한 얼굴로 도망쳤다.
추격전은 혼란한 세상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지만, 사내의 정체가 ‘후안 카를로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의아해할 상황이었다.
멕시코의 영웅. S등급의 실력자. 절대 누군가에게 쫓길 인물이 아니건만, 후안 카를로스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빌어먹을.”
때는 일주일 전.
로만 드미트리가 세상에 공표한 사실이 있었다.
선택받은 자와 절대자의 연관성을 말하며, 선택받은 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람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론교의 충격적인 진실에 대혼란이 일었고, 그 와중에 로만 드미트리가 ‘마론 드미트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갈팡질팡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일부 선택받은 자들이 절대자의 하수인이었다니.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이 옳다고 말하지 못했다.
세상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이.
선택받은 자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차례로 조사를 받는 상황에, 후안 카를로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잡히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
호전적인 인물이다.
조금의 타협도 없이 세바스찬 교주를 죽인 것을 보면, 자신의 죄목이 밝혀지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는 생각보다 그리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이야 그가 매번 멕시코를 구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절대자와의 거래를 통해 일부러 위기를 만든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몬스터들을 끌어들이고.
그 몬스터들을 직접 처리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사람들을 구해 주면서 절대자가 만족할 수 있는 재미를 선사했다.
S등급의 실력.
광대로서 충실한 대가였다.
자신의 악행에 조금의 증거도 남기지 않았지만, 만약 사실이 밝혀진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살려 둘 리는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일단 살아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한때는 멕시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받았던 후안 카를로스가, 도망치는 길에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유명한 만큼 존재를 감추기 힘들었다.
“하악, 하악.”
그렇게 일주일.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삶이 그리웠고,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도망쳐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씨발,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어차피 무능력한 새끼들이 그냥 다 뒈져 나가는 것보다, 몇몇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나라도 강해지니까 멕시코를 구할 수 있었던 거잖아. 난 억울하다고. 나는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그 녀석처럼 인류를 완전히 배신하려던 게 아니라, 사람들을 적당히 팔아먹는 선에서 세상을 도와주려는 의도였다고.’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특히 ‘대한제국’에서 추격팀을 직접 보내온 상황에, 그의 인내심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판사판이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몸을 돌리며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내가 그렇게 순순히 잡혀갈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지.”
누가 추격해 왔든.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무력으로 증명해 보이고,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그런데.
팔락.
“이거 재밌는 새끼네.”
날개를 팔락이며 내려오는 존재.
그가 김판석임을 확인하는 순간.
“오우, 쒯.”
후안 카를로스는 황급히 걸음을 돌려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선택받은 자들 전부가 후안 카를로스처럼 악행을 숨겨 왔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와 흔쾌히 조사를 받았다.
“선택받은 자가 후원의 개념은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악행을 대가로 보상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를 후원하는 ‘절대자’는 참으로 잔인한 존재였습니다. 제 힘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트릴 때마다 보상을 제시했고, 저는 항상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결백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만약 저였다 할지라도, 안드레스의 악의를 확인하는 순간 선택받은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사에 임할 것이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떳떳합니다.”
결백을 말할지라도.
하루 만에 조사가 끝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의 증언에 거짓이 섞여 있지 않은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전 세계 국가가 제공한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했다.
물론 완벽하게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안전망이었고,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는 결백을 증명받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당연히 후안 카를로스 같은 케이스도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 네가 도주했다고 해서 너를 무조건적으로 ‘인류의 배반자’라고 단정 짓지는 않겠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에서, 네가 증언한 것과는 다르게 네 알리바이가 부정확하다는 점이 파악되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하나겠지. 세상이 영웅이라고 말하는 네게 알리바이를 숨겨야 할 만큼의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 너에겐 지금부터 정신 심문(審問)을 진행하겠다.”
“아, 안 돼!”
“끌고 가.”
“아악!”
병사들이 나타나 후안 카를로스를 끌고 갔다.
정신 심문.
김판석이 주도하는 심문이며, 정신의 경계에 침범해 진실을 말하도록 상대를 고통에 빠트리는 매우 잔인한 수단이었다.
혹시라도 무고한 자들이 정신 심문을 받지 않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한 기준을 내세웠다.
후안 카를로스와 같은 도주하려는 자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진실과는 다른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방대한 자료를 통해 ‘안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팔아먹은 의심쩍은 부분들이 존재한다면 정신 심문을 진행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일부 언론들은 이를 비난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비난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평화로운 시기에는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선택받은 자라는 인류의 배반자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내부의 적이 인류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일이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들만 상식을 따졌다가는 절대자의 장난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차례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무고한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후안 카를로스처럼 확실한 경우만 정신 심문을 진행하다 보니,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본인이 ‘악인’이었음을 밝혔다.
안드레스와 마찬가지로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서 인류를 팔아먹었음을 말했다.
더는.
선택받은 자들을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 왔던 존재들일지라도, 그들의 힘이 ‘절대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로부터 며칠.
세상을 충격에 빠트릴 사건이 발생했다.
* * *
1-3 조사실.
그곳이 사건의 발생지였다.
선택받은 자이며 A등급 헌터로 알려진 프랑스의 줄리앙이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조사관을 앞에 두고는 실실 웃음을 보였다.
“조사관님. 제가 역으로 하나 묻겠습니다.”
끼익.
의자를 앞으로 땅겼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내밀더니, 조사관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조사관님이 ‘절대자’의 후원을 받는 존재라면 절대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매일 빌빌거리며 살던 한 인간이, 단번에 S등급 헌터에 버금가는 강력한 힘을 갖출 수 있는데도 아, 인류를 위해서 절대 그래서는 안 돼.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인류를 배반했다는 뜻인가.”
조사관의 표정이 굳었다.
조사실 바닥에는 마법진이 겹겹이 설치되어 있어서, 줄리앙이 허튼짓을 한다면 곧바로 그의 몸을 옭아맬 것이다.
그리고 조사실 밖에도 수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조사관은 줄리앙의 반응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앙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줄리앙이 피식 웃었다.
재밌었다.
다른 선택받은 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다른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조사에 임했다.
“진짜 가식적인 새끼들이네. 절대자는 이 세상의 신이야. 신이 내게 직접 말하면서 보상을 주겠다는데, 그걸 거절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머리가 있다면 생각이라는 걸 하라고. 후원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고, ‘선택’을 한 순간부터 내겐 인류의 안위보다 내가 중요할 뿐이라고.”
“너……!”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명백한 적의.
조사관이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 줄리앙의 마력이 폭발했다.
“이따위 마법진으로 날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마법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었다.
수백 개의 마력 다발이 나타나 줄리앙을 옭아맸지만, 줄리앙의 강력한 마력이 그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조사관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수도 없이 대비했다.
마법진이 발현됨과 동시에 몸을 피신했고,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들이닥치며 줄리앙을 제압하려고 했다.
A등급.
선택받은 자치고는 낮은 등급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은 세간의 평가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격해!”
“제압하라!”
팟.
파파파파파팟.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격을 모두 받아 냈다.
줄리앙의 양손에서 격렬한 마나가 들끓더니, 가장 먼저 달려든 병사의 머리를 책상에 찍어 버렸다.
퍽!
콰직.
머리가 터져 나갔다.
줄리앙의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고, 그때부터 득달같이 달려드는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조사관들의 안전을 위해 배치된 실력자도 있었다.
A등급 헌터로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실력자건만, 줄리앙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전부 죽여 버렸다.
이곳은.
대한제국 한복판이다.
그런데도 악의를 보란 듯이 드러낸 그는, 모조리 죽이고 나서야 의자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이미 주변은 폐허가 되었고, 건물이었던 천장은 뻥 뚫린 채로 푸르른 하늘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단 한 명.
조사관만이 살아남았다.
줄리앙은 조사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이곳으로 불러와. 내가 아니라, 나를 후원하는 절대자님이 만나고자 하시니까.”
* * *
“으흠~.”
줄리앙이 콧노래를 불렀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발을 까딱거리며, 마치 이곳이 본인의 집인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공간이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뻥 뚫린 하늘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줄리앙은 일부러 ‘조사실’이라는 공간에 남아서 로만 드미트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조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조사관을 바라보며, 줄리앙은 하나를 더 요구했다.
“아,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 외에는 그 누구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마.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 만약 개수작을 부린다면, 단언컨대 ‘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죽일 거야.”
그로부터 약 10분이 흘렀다.
줄리앙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가 되어 버린 조사실.
그래도 마법 방어를 잘 형성했는지, 천장이 날아갔을 뿐 나름대로 조사실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너덜너덜한 채로 간신히 붙어 있는 문. 최근 마법 문명의 발전이 대단했다.
대한제국을 필두로 빠르게 발전했고, 자신을 후원하는 절대자조차 감탄하는 반응을 보였다.
절대자들의 계획.
그것보다 빨랐다.
인류는 조금 더 느리게 발전했어야 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쯧쯧, 그게 명줄을 재촉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라니.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이 세상을 구원할 존재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새끼 때문에 이 세상은 곧 끝나고 말 거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선택받은 자.
절대자에게 붙어먹은 이유는 인류에게 재앙을 선사한 존재가 절대자이기 때문이었다.
안드레스와 같았다.
절대자를 대적하는 방법으로는 단 0.1%의 생존 확률도 허락되지 않기에, 차라리 절대자를 충분히 만족시켜서 살아남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절대자가 줄리앙에게 하나의 퀘스트를 주었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야만 했다.
걱정 따윈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초월 등급이든 뭐든 간에.
이번 퀘스트는 절대자가 ‘직접’ 개입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때였다.
끼익.
쿵.
불안했던 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불러들이지 말라고.”
“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저벅저벅.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바로 김판석이었다.
그는 줄리앙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상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절대자든 뭐든, 씨발 황제 폐하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냐?”
사납게 내뱉은 음성.
줄리앙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정말 당혹스러운 상황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