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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79화 (579/615)

579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3)

조금 전.

드미트리에 입성한 에드윈 헥토르는 곧바로 이사벨을 만났다.

헨리 앨버트가 정신을 차린 시점을 기준으로 차원을 조사했고, 수천 개로 나누어진 차원의 흐름에서 이전과 유사한 단 하나의 흐름을 발견했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순간이었다.

차원의 흐름은 겨우 1분만 지나도 수도 없이 쪼개지는데, 드디어 로만 드미트리를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강렬한 열망을 보이는 그들의 눈빛에, 에드윈 헥토르는 본인이 파악한 사실을 말했다.

“앨버트 백작이 경험한 링크(link)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과거에 케빈 또한 미약하나 링크 현상을 경험했고, 저희는 그때의 자료를 기반으로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두 현상과 동일한 차원의 흐름을 발견했습니다. 앨버트 백작의 말대로 그곳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존재한다면, 드디어 목표하는 좌표를 찾았다고 확신합니다.”

“드디어……!”

“그렇다면 지금 바로 차원을 연결할 수 있는 겁니다?”

다들 상기된 표정을 보였다.

에드윈 헥토르로서는 그들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고 싶으나,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차원의 유사성을 발견했다고는 하나, 이번에 찾은 것은 좌표일 뿐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넘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링크 현상으로 인해 두 차원 간에 ‘특정 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만약 그 시기를 공략한다면,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통로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앨버트 백작은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통로는 양쪽에서 공략한다면 경계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에, 차원이 맞물리는 시기에 힘을 집중한다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희망이 생겨났다.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마법적인 근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로서는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차원 너머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쉽지 않은 시간을 감당했다.

미련만 떨쳐 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로만 드미트리를 포기하자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드미트리 제국이 건국되는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미래를 위해서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필요했다.

모든 것을 이루어 낸 그가 갑작스럽게 증발한 현실은, 절대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가 아니었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말했다.

“헥토르 국왕.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하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드미트리 제국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지원이면 충분합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마법 실험’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원의 경계가 맞물렸을 때 실험자가 그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완벽한 시기가 찾아온다고 한들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적인 지원은 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실험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지원을 언급하는 순간.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적임자입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다른 누군가도 아닌, 우두머리급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 * *

그야말로 동상이몽(同牀異夢)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귀환을 목적으로 하지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일단 크리스와 케빈.

‘황제 폐하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야.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시킨다.’

두 사람의 지원은 충성심의 발로였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의 실종 이후 방랑하며 살았던 케빈은, 자신의 지원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한바탕 엎어 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였다.

사실 크리스, 케빈과 마찬가지로 충성심으로 지원자를 받는다면 지원자들로만 거대한 광장을 가득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일은 영예로운 것이기에, 여기까지는 사람들의 예상 범주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상 밖이었다.

발렌티노 공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돕는 일입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실험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동참하고 싶습니다.”

‘평론가들은 말하지. 세월이 흘러 장인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 시대로 돌아가서 직접 경험하면 얼마나 좋을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작품은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 내 전 재산을 쏟아붓더라도 그분이 나와 같은 시간대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 계시는 것이야말로 평론가들이 한숨처럼 내뱉는 말을 현실화시킬 방법이지. 만약 내가 황제 폐하를 찾는 일에 이리도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제 폐하는 분명히 내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겠지.’

웃음을 삼켰다.

그는 미친놈이었다.

마법 실험에 돈을 쏟아붓는 이유, 그리고 실험에 참여하겠다는 지원 동기까지.

모두 로만 드미트리 때문이었다.

한낱 돈(?) 따위는 언제든 다시 벌면 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사라진다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장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밝게 만들었다.

장인이 언제 작품을 만들지 모른다는 기대감만으로도 심장이 뛰었고, 발렌티노는 수집 활동에 문제가 없도록 막대한 부를 끊임없이 탐했다.

마법 실험 지원?

자발적인 실험 참여?

모두 명분을 쌓는 과정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보상이 확실한 인물이기에, 자신의 이러한 행보가 분명히 보답받으리라고 믿었다.

발렌티노에 이어.

“공작님에게는 버거운 임무입니다. 링크 현상을 경험한 만큼, 제가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헨리 앨버트가 나섰다.

처음에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나섰던 그였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모습에 은근히 뽕(?)이 차기 시작했다.

뭐랄까. 영웅이 되는 기분이랄까.

만약 여기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돌려놓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드미트리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질지도 모른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다.

남자는 끝까지 철이 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헌신적인 선택으로 찬사를 받았던 헨리 앨버트지만, 역시 사람은 완벽하게 변하는 법이 없었다.

팽팽한 분위기.

지원자는 넘쳐났다.

모두가 실험에 참여하겠다는 상황에, 한 사내가 확고한 어투로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에 단 한 명에게 차원의 경계를 넘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저여야만 합니다.”

착 낮게 깔리는 목소리.

파비우스 후작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 *

일련의 상황.

파비우스 후작은 흐름을 읽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는 분이야. 샐러맨더 대륙으로 넘어오겠다고 말했다면, 어떤 난관이 기다리든 반드시 이루어 내겠지. 그리고 대륙 제일의 마법사인 헥토르 국왕의 실력이라면 분명히 무언가를 이루어 낼 테고. 만약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를 위한 그럴듯한 수식어가 하나 필요하겠지.’

금의환향(錦衣還鄕).

열광하는 사람들 속, 로만 드미트리 옆자리에 자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정말 환상적인 일일 것이다.

파비우스 후작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막대한 재산을 쌓아 하렘을 건설했고, 남자라면 파비우스처럼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매일이 행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력이란 것은 영원할수록 좋다.

한때 대단한 세력을 유지했다가 뒷방늙은이로 늙어 가는 것보다는, 언제나 권력의 중추에 남아 있다면 삶은 끝까지 행복할 터.

파비우스 후작은 행복한 나날에 욕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대단한 권력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세력을 형성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 옆에 딱 달라붙어서, 영원히 그의 권력에 기생하는 박쥐로 남고 싶었다.

지금이 적기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돌아올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 파비우스 후작은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러분. 이건 정말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뛰어난 검사들이 넘어간다면 전력적으로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적이고 혼자만의 힘으로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 한 명이 적임자로 간택된다면, 그 사람은 차원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눈치 있게 반응할 수 있는 ‘정치력’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크흠흠, 이 자리에서 저보다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증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위기를 확 휘어잡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할 리는 없을 테니까, 파비우스 후작과 같은 눈치 빠른 인물이 적임자였다.

다만.

“차원 너머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파비우스 후작님이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지금 제 안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저 파비우스입니다. 남부 전선에서 황제 폐하를 처음 만났을 만큼 용맹하며, 결단을 내렸다면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모두가 인정했다.

카이로의 너구리.

선택에 사심이 섞였을지언정, 한다면 하는 사람이 바로 파비우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망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은 인물이기에, 그의 의지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결국.

“알겠습니다. 만약 단 한 명의 지원자만 필요하다면 파비우스 후작님으로 가되, 나머지 분들의 의견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윈 헥토르의 말을 끝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 * *

차례로 회의실을 나서는 사람들.

그들을 뒤로하고, 케빈이 파비우스에게 다가갔다.

“파비우스 후작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약 모두를 대표해 지원자로 선정된다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반드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아 주십시오.”

파비우스가 히죽 웃었다.

케빈의 눈빛.

참 살벌했다.

산전수전을 경험한 파비우스로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눈빛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아군일 때는 저보다 든든한 눈빛이 없다.

그리고 케빈이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파비우스의 시야에는 드미트리의 악귀가 아니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순수한 영혼처럼 보였다.

“케빈 님이 보기에 제가 실패할 일에 지원할 사람처럼 보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믿어 주십시오. 백 마디 말보다, 묵묵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케빈이 고개를 떨구었다.

세상을 방랑하며 산발이 되어 버린 머리가,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이 보였다.

참 엉망이었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린 모습에 부모님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면서도, 차마 케빈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살았던 한 가족.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은인이었다.

케빈만큼은 아닐지라도 케빈의 부모님과 여동생에게도 케빈을 저지할 명분은 없다.

그들도 로만 드미트리가 돌아오기를 바라기에, 케빈이 가끔 집으로 돌아올 때면 고생했다는 말도 없이 따뜻한 저녁을 내올 뿐이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났다.

빈민가 골목.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신을 구해 주던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피로 점철이 되었던 그 모습을 어떤 이들은 악마라고 소리쳤지만, 케빈에게 있어 그는 신과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파비우스.

참 아이러니한 인물이었다.

박쥐인데 신뢰가 가는 박쥐.

목적이 분명할 때의 파비우스는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케빈이 말했다.

“파비우스 후작님에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파비우스 후작님을 위해 딱 한 번 ‘제 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검사 케빈으로서 드리는 약속입니다.”

* * *

케빈과 파비우스가 대화를 나누는 그때.

크리스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는데, 그의 시야에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배회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마음이 쓰라렸다.

사내의 정체는 한스였다.

귀족이라고는 하나, 그의 신분으로는 오늘과 같은 주요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길 바랐지만, 회의에 관련된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기에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발을 동동 굴렀다.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하던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크리스가 나온 것을 발견했다.

“크리스 님!”

순간.

얼굴이 밝아졌다.

한스는 크리스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평소라면 참으로 불편했을 상황이지만, 이번만큼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웃어 보일 수가 있었다.

“아, 한스 남작님.”

웃었다.

이번만큼은 그에게 전달할 희소식이 있기에.

크리스는 들끓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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