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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75화 (575/615)

575화 충격적인 진실 (4)

머리에 통증이 밀려들었다.

마나를 일으켜 강하게 억누르는 손길에, 안드레스는 바둥거리지도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차원의 경계.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애초에 경계의 문을 여는 것도 문제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나의 흐름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0.1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공간이 바로 차원의 경계다.

그런데 김판석은 안드레스를 곧바로 따라붙었다.

엄청난 마법 능력이 필요한 일인데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의 흐름’을 침범하더니 바깥으로 내팽개쳤다.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진실을 묻고 싶었지만, 김판석이 손에 힘을 주면서 사납게 말했다.

“지금부터 명심해. 너는 대답만 할 수 있다는 것을.”

꽈악.

얼굴이 바닥에 박혔다.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저벅저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일 것이다.

바로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선택받은 자인가.”

“…….”

입을 다물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가설을 하나 말해 주지. 선택받은 자들은 ‘절대자’로부터 비롯되는 후원으로 특별한 힘을 얻는다. 그동안 세상에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선택받은 자들이 악행을 저지른 경우는 모두 후원 때문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너도 다르지 않겠지. 조금 전에 본인의 안전을 확신하고 퀘스트를 언급한 것은, 너 또한 일련의 상황에 절대자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는 의미일 확률이 높겠지.”

그렇다면.

목적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절대자들이 왜 이런 일을 벌였으며, 안드레스가 절대자를 따른 이유가 무엇인지.

“절대자들이 인간을 후원하는 목적은 오로지 유희다. 개미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인간들에게 특별함을 부여하여 생기는 변수를 즐기지. 나는 네가 절대자의 유희를 적극적으로 실현해 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것은 마론교로 인한 인류의 분열은 이 세상을 멸망시킬 텐데, 인간인 네가 어째서 그들을 따르냐는 것이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의미가 없지 않나. 네가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많은 것을 지녔든 말이야.”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강해지는 이유는 생존과 직결되기에, 일부가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서 모두를 매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안드레스는 특별한 케이스가 분명했다.

단순히 대가를 받기 위해서 지금과 같은 일을 벌였다기에는, 멍청하지 않은 이상 돌아올 대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웃었다.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은, 로만 드미트리가 지나온 삶에서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래, 끝까지 네 의지를 관철하라. 나는 의지가 강인한 사람들이 좋거든. 그것은 내뱉을 말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테니까.”

탁.

한발 물러났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확.

“?!”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김판석이었다.

그가 안드레스를 사납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X 같은 새끼야. 넌 뒈졌어.”

그 순간.

깜빡.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눈을 뜬 안드레스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결박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당황스러워?”

김판석이 주변을 걸었다.

느릿하게 걸으며, 손끝으로 스치듯 안드레스를 어루만졌다.

“안드레스. 이곳은 정신의 세계야.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공간이며, 이곳에서 너는 바깥세상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지.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뭔지 알아? 시간의 흐름이 바깥세상과는 다르다는 거야. 이곳에서의 하루가 바깥에서는 겨우 1분. 억겁(億劫)의 시간 속에서 너는 나와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스르르르.

의자가 생겨났다.

김판석이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며 나른하게 물었다.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해.”

1초, 2초, 3초.

얼마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질문을 내뱉고 얼마나 지났다고, 김판석이 씨익 웃음을 보였다.

“그래, 그렇게 버텨 보라고.”

확-

의식이 확장되었다.

안드레스가 그대로 잡아먹히더니, 발끝에서부터 개미들이 갉아 먹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 으아아아악!”

비명을 질러 댔다.

몸을 바둥거리면서 어떻게든 이 공간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발악해도 그의 마법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안드레스로서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김판석이 알렉산드르로서 살아가던 시절, 흑마법을 기반으로 한 고문 방법으로 수많은 인격을 무너트렸다는 사실을.

새로운 삶을 부여받으면서 더는 사용하지 않았던 기술을,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기꺼이 꺼내 들었다.

한낱 인간.

겨우 안드레스 따위가 대항할 만한 힘이 아니었다.

김판석은 정신력의 싸움에서 상대를 압도하더니, 안드레스를 정신의 공간에 완전히 옭아맸다.

“크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개미가 갉아 먹더니 어느 순간 불길이 일었고, 뜨거움에 한참을 몸부림치자 한파가 일며 전신이 얼어붙었다. 안드레스 스스로도 알았다.

이건 정신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가상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마법적인 능력이라면 파훼해야 정상이건만, 김판석의 마력은 안드레스를 압도했다.

천외.

상상 이상이었다.

백의의 마법사는 괴물 같은 존재였다.

“끄, 끄으으으윽. 사, 사람들은 너를 백의의 마법사로 기억하고 있다. 그, 그런 네가 이런 일을 벌여도 되는 것이냐. 나중에 사람들이 진실을 안다면, 끄으으으윽, 큰 배반감을 느낄 것이다.”

정의의 대명사.

진실을 부여잡았다.

제발 고통을 끝내 주기를 바랐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안드레스의 표정에, 김판석은 동정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보였다.

“병신 같은 새끼. 이게 진짜 나야. 그러니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 보자고.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들, 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대항한 존재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끼니까. 아차. 만약 진실을 말할 생각이 있거든,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제발 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내. 그럼 한 이틀 정도 고통을 더 주고 풀어 줄 테니까.”

웃음이 짙어졌다.

안드레스는 고통을 삼켜 냈다.

버텨 내리라.

배신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정신의 세계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안드레스의 정신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스륵.

안드레스가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고,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정신이 붕괴되었다.

전생에 악마와도 같았던 알렉산드르의 흑마법으로 고문을 당하자, 결국에는 연약한 인간인 안드레스로서는 버틸 방법이 없었다.

선택받은 자로서 꿈꾸었던 미래. 지금은 그따위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육체에, 빠르게 죽음을 허락받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는 선택받은 자인가.”

다시 묻는 물음.

이번에는 달랐다.

안드레스가 진실을 말했다.

“……맞습니다.”

“네가 아는 진실을 말하라.”

“저는 절대자로부터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임무는 적당한 선에서 세바스찬 교주를 도와 마론 드미트리를 이 세상에 소환하는 것. 그분들은 ‘성서의 존재’를 매우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차원을 공격했던 것과는 다르게 특별한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그분들의 뜻대로 마론교가 탄생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왔습니다. 인류학자 세바스찬, 이름의 훼손, 그리고 복원 마법. 모든 것은 절대자의 뜻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마론 드미트리를 소환해 단시간에 재미를 보는 것보다, 긴 시간 동안 마론교로 인해 많은 즐거움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진실이 밝혀졌다.

하필이면 세바스찬에게 헨리 앨버트의 일대기가 주어진 이유, 로만 드미트리가 마론 드미트리로 해석되면서 생겨난 일들.

절대자들은 어디에선가 인간들을 바라보며 낄낄 웃음을 보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는 모습은, 이전 세상과는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마론 드미트리의 소환을 바랐다는 의미는, 절대자가 ‘드미트리의 세상’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건가.”

“맞습니다. 그분들이라고 해서 끝없는 차원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며, 그분들 또한 일대기를 통해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사실 마론 드미트리로 복원한 이유도 전승자의 존재를 실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승자는 시스템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 아닌, 절대자님들도 알지 못하는 변수. 그분들은 성서가 그 이유라 보았고 마론교를 통해 인류의 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오해로 인해, 훗날 로만 드미트리가 강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그분들이 의도한 또 다른 흥미 포인트입니다.”

손바닥 위.

인간들이 있었다.

절대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차원 이동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 뒤에나 진행했을 일. 그런데 당신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일정을 앞당겨 인류를 분열시키고자 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받은 퀘스트는 분열을 주도해, 마론교와 당신이 완전히 어긋나 세계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왜 절대자를 따르는 거지? 세상이 멸망한다면 네가 살아갈 세상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텐데.”

“……그분들은 충분히 재미를 본 뒤, 세상 일부를 남겨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드레스가 아는 모든 진실을 확인했다.

넋을 잃은 안드레스는 꼭두각시처럼 모든 것을 토해 내더니, 간절한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호소했다.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억겁의 시간.

정신이 완전히 타들어 갔다.

생존에 대한 갈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안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래.”

번뜩.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얼굴에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선을 돌려, 멍한 얼굴의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네가 행한 모든 일이 인류를 위한 정의라고 생각하나.”

일련의 상황.

충격적이었다.

존재 의미를 잃었다.

세비스찬이 그동안 소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드레스는 자신의 전부를 부정해 버렸다.

처음 헨리 앨버트의 일대기를 손에 넣고 해석하던 시절, 마론 드미트리의 존재를 찾아내 마론교를 창설했던 순간, 사람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말하며 마론교를 믿는다면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간절하고 절박했던 자신의 모습.

와장창.

전부 박살이 났다.

정신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자의 농간이었다.

이 세상을 절망에 빠트린 존재가, 자신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인간들을 가지고 놀았다.

“아, 아아, 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부여잡고 땅바닥에 처박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이따위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참담했다.

스스로가 부끄럽고 저주스러웠다.

세바스찬은 혼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품속에 숨겨 두었던 단검 한 자루를 꺼내 스스로의 목에 겨누었다.

“나, 나는 정말 몰랐어. 몰랐다고. 그러니까 죽음으로라도 내 죄를…….”

“착각하지 마라.”

세바스찬.

그에게 동정심을 베풀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과에는 책임이 따른다.

마론교는 인류를 분열시켰고, 정의라는 명분 아래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적어도 이번 삶에서는, 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한들 이미 죽은 사람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네가 죽는다고 해서, 너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죽음이 보상받지는 못한다. 그러니…….”

말리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단검에 핏방울이 맺히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세바스찬의 모습을 방관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죽어라.”

세바스찬이 이를 악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아득했고,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푹.

“컥, 커억.”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피를 울컥 쏟아 내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현생.

자신은 죽음조차 치장할 자격이 없었다.

* * *

털썩.

세바스찬이 바닥에 쓰러졌다.

세바스찬, 안드레스, 파트리스.

시체들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고, 각국의 수장들은 얼어붙은 채로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아 말했다.

“지금부터 다시 국제회의를 진행하겠다.”

차가운 목소리.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그들은, 황급히 본인들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가 대한제국을 창설한 지 겨우 1년 만에,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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