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충격적인 진실 (2)
지난 20년.
세바스찬은 스스로를 믿었다.
처음에는 본인조차도 성서를 의심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신앙심이 굳건해진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이비라 비난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론 드미트리는 실존하는 존재가 분명했다. 성서의 내용을 되새길 때마다, 사람들의 의심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믿었다.
진실만을 바라보았다.
고행(苦行)이라 여기며, 현실의 역겨움을 꾸역꾸역 삼켜 냈다.
20년 전에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론 드미트리를 부정하는 존재들을 하나씩 해치웠다.
믿지 않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대놓고 불신하는 이들은 인류의 미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 한둘의 죽음은 며칠 밤낮을 지새울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으로 늘어나면서부터, 타인의 죽음조차도 희생의 한 갈래로 받아들였다.
무지는 죄다.
불신 또한 죄다.
죄인들을 처벌하면서, 세바스찬은 고행의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고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건만, 눈앞의 현실은 그에게 ‘참담한 진실’을 강요했다.
“…….”
고개를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 너머로, 분명히 1시간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미래를 논하던 사람들이 적의(敵意) 어린 시선을 보였다.
마치 본인들은 피해자인 것처럼. 그들은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했다.
만약.
저들의 눈빛처럼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면.
마론 드미트리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를 몰라본 것이라면.
지난 20년의 헌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동안의 악행은 모두 구원이라는 명분 아래에 모순을 감당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이 드러난다면 자신은 그냥 악인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었다.
성서의 저자인 헨리 앨버트는 진실을 말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한 황제임을 증명했다.
이미 상황은 명백해졌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간의 삶을 부정해야 했다.
틀렸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건 절대 감당하지 못할 현실이었다.
‘아니야.’
자신은 옳았다.
틀리지 않았다.
그래야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야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난 틀리지 않았어.’
정신이 붕괴되었다.
오히려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세바스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표출했다.
“이건 다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라고!”
악에 받친 부정.
그것은 그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살아남는다는 것의 정의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바스찬은 스스로가 증명한 진실을 외면했다.
“차원 이동 마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매개체에 스며든 영혼은 진짜 ‘헨리 앨버트’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가 준비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의미지. 겨우 이것으로는 로만 드미트리가 성서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마론 드미트리 님은 저따위 존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당신이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모순입니다.”
스페인의 총리였다.
세바스찬이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매우 합리적인 의문이었으나, 광기를 표출하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네 말처럼 이번 실험은 내가 주도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로만 드미트리는 이 자리가 본인을 위해 준비된 함정임을 알면서도 어째서 참석했을까. 만약 마론 드미트리 님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대한제국은 위태로워질 텐데, 마치 그는 어떠한 ‘확신’을 지닌 것처럼 상황을 관망했어. 그때부터 잘못되었던 거지. 그는 이미 상황을 조작한 상태였고, 마론교를 매도할 판을 만들어 놓고 비겁하고 비열하게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았던 거지.”
모순을 내뱉었다.
말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면서부터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졌지? 그로 인해 대한제국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로만 드미트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어. 분명히 소중한 생명을 살릴 기회가 있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러지 않았지. 러시아와의 전쟁도 다르지 않아.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였다면,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어. 마론교를 필두로 세상 전부가 본인의 존재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진실을 함구하고 살육을 택했지.”
점점.
눈빛이 선명해졌다.
자신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말을 반복할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정할 수 없다는 거야.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은 인류의 희망이고, 아무리 세상에 무지한 사람일지라도 드미트리 제국 황제의 존재는 모를 수가 없지. 그런데 대체 왜! 로만 드미트리는 살인을 방관했을까. 어째서 분란을 부추겼을까.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성서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지. 성서에서 마론 드미트리 님은 인류를 구원하고, 본인 스스로가 모든 희생을 감당한 영웅이야. 그런 숭고한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살육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저 존재가, 정말 성서가 말하는 영웅이 맞는 걸까?”
스스로를 속였다.
사람들을 선동했다.
말이 되지 않는 진실보다, 그럴듯한 거짓이 옳다고 믿었다.
자신이 그동안 상상해 왔던 존재는, 절대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악인이 아니다.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이 또한 신의 시련이다.
로만 드미트리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확정시키자, 그때부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진심을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대답해. 대체 무슨 의도지? 우리를 전부 속여서 네가 이루려는 목적이 뭐지?”
지금, 이 순간.
세바스찬은 스스로를 정의라 여겼다.
* * *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실과 거짓이 혼동되는 지금, 사람들로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진실을 명확하게 말해 주기를 말했다.
재밌었다.
인격(人格)이 상실되는 순간이었다.
세바스찬은 스스로를 지탱하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설전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바란다면, 네게 하나 물어보지. 성서가 말하는 그 존재.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인류’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나.”
“그게 무슨…….”
“진실을 묻는 것이다. 네가 읽었던 드미트리 황제의 일대기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지? 맹목적으로 선을 표방했나.”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드미트리 황제는 인류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도 없고, 맹목적으로 선을 따르는 존재도 아니었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다면 악이라 비난받을지라도 강직하게 밀고 나가는 존재.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구했기 때문에, 세바스찬은 그 모든 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큰 뜻이라고 해석했다.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진실을 내뱉는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힘을 싣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희가 어떤 것을 기대했든 내가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째서 진실을 밝히지 않았느냐고? 그것은 너희가 해석한 ‘성서의 존재’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마론교를 믿는 존재들을 내가 책임질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서 내게 맹목적인 헌신을 바랐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세상을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세바스찬. 내가 왜 진실을 밝혀야 하지? 내가 왜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던 기대감에 부응해야 하지?”
잔인한 현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나만의 방식을 따랐다. 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너희 또한 드미트리 제국처럼 나의 사람으로 남을 기회가 존재했다. 그런데 너는 상상 속의 존재에 빠져들어 대한제국을 배척했다. 대한제국은 모든 일에 명확한 명분이 존재했으나, 너는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고 악의를 드러냈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드미트리의 황제로서도, 대한제국의 황제로서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단 한 번도 정의를 표방하지 않았고, 너희처럼 악의를 정의라 주장하는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누군가에게는 ‘악행’임을 알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 사람들이 온전한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기에, 내 손에 피가 흥건할지라도 그것을 정의라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믿고말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판단에 맡겼다.
“20년 전의 네 선택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다르다. 세바스찬. 눈을 떠라. 현실을 직시하라. 나는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이나,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존재와는 다르다.”
시선을 돌렸다.
각국의 수장들.
충격으로 얼룩진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나는 이 자리가 내 목숨을 위협하는 자리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참석했다. 그러니 선택하라. 나를 함정에 빠트린 적으로 남을지, 아니면 나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할지를. 선택을 예고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 * *
최후통첩.
각국의 수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세바스찬의 뜻으로 이 자리가 마련되었기에, 사람들은 섣불리 로만 드미트리를 지지할 수 없었다.
헨리 앨버트.
그가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도 선택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왕위룡이 말했다.
“처음부터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성서의 주인공이든 아니든, 저 왕위룡은 스스로 믿는 바를 따를 생각입니다. 앞으로 대한제국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뜻이라면, 설령 눈앞에 불구덩이가 기다릴지라도 기꺼이 뛰어들겠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가 마론교가 준비한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미국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르는 것이 인류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저 또한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존 해리슨이었다.
두 거물.
그들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그것을 다시 한번 거론하면서, 대한제국과의 관계가 공고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사람 중, 한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그동안 스페인이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이유는, 이 한 번의 선택으로 국가의 명운이 결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악을 행할지라도, 그것이 황제 폐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이탈리아도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세바스찬 교주는 이 자리를 통해 대한제국을 척결하자고 주장했지만, 헨리 앨버트의 증언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도……. ”
“잉글랜드도…….”
스페인이 기폭제였다.
이미 입장을 표명한 국가들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상황에, 각국의 수뇌부들은 더 늦었다가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자존심은 내팽개친 채, 앞으로 대한제국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세가 기울었다.
과반수가 대한제국을 따랐다.
대놓고 세바스찬을 따르던 사람들로서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빌어먹을.’
특히 파트리스.
그는 크나큰 혼란에 휩싸였다.
세바스찬의 나팔수로 살아왔던 그는, 진실이 드러났다고 한들 섣부르게 로만 드미트리를 따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장을 고수하는 것 또한 정답은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이번 실험이 마론 드미트리의 존재를 증명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고, 그의 계획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각국의 수장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지금과 같은 자리를 주도했다.
그 믿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계획의 실패와는 별개로, 세바스찬의 말이 무조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신이 생겨났다.
맹목적인 믿음.
일말의 불신.
상황이 달라졌다.
불신은 마음에 균열을 일으켰고, 더는 맹목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어. 성서의 저자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의 존재를 증명한 지금, 세바스찬 교주가 뭐라고 말하든 마론교를 믿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 인류를 선도하던 마론교는 이제 끝이야.’
진실은 명백했다.
헨리 앨버트의 증언.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그것이라면, 로만 드미트리가 인류의 희망임이 분명했다.
세바스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간절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에, 파트리스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생존의 동아줄을 움켜쥐려 했다.
“프랑스도…….”
“거기까지.”
말을 툭 끊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파트리스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프랑스는 마론교의 뜻을 받아 이 자리를 주도했다. 함정을 도모했고,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해 파멸하는 결말을 바랐다. 너희의 선택은 이미 그때 결정되었다. 파트리스를 비롯해 이번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나라들은, 마론교와 더불어 ‘대한제국을 위협한 적’으로 규정하겠다.”
그 말에.
파트리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