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충격적인 진실 (1)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다.
헨리 앨버트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를 부르짖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능성이 번뜩 떠올랐다.
“……서, 설마.”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라고?!”
황제의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수많은 전승자를 탄생시킨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
로만 드미트리의 실체가 드러나는 상황에, 각국의 수뇌부들은 놀란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진실을 말해 주기를 바랐다. 정말 당신이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냐고, 그동안 인류가 갈구해 온 존재가 바로 당신이었냐고.
더는 참지 못한 사람들이 직접 물어보려는 그때, 사나운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는 마론 드미트리 님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상황.
세바스찬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서가 말하길,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는 분명히 마론 드미트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헨리 앨버트 님. 저는 당신이 직접 작성한 성서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마론 드미트리 님의 행보를 되새기며, 그분을 이 세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지난 20년간 각고의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 황제라니요. 저런 인물이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일 리가 없습니다. 장난이라도 그런 헛소리는…….”
“너야말로 대체 무슨 개소리지?”
말을 툭 끊었다.
헨리 앨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바스찬을 보았다.
“네가 말한 성서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책에 ‘마론 드미트리’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한 분은 이 앞에 계신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분명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성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마론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대해!”
“나는 그런 적이…….”
순간.
헨리 앨버트의 표정이 굳었다.
세바스찬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은 자신이 차원 너머로 뿌린 ‘일대기’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 황제를 부르짖을 때, 세바스찬을 비롯한 사람들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건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모른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일대기를 확인하고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설을 대입해야 했다.
착각.
문제가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를 마론 드미트리라고 착각하게 만든 문제가.
헨리 앨버트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아무것도 아닌 망나니였던 그가 대륙의 유명 인사가 되었던 것은, 상황을 빠르게 판단해서 결단력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눈앞의 상황이 갑작스러웠다. 누구 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만일의 가능성에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너 설마…….”
세바스찬의 표정.
한껏 억울함을 표출했다.
본인의 말이 진실임을 호소하는 모습이었고, 그렇다면 자신의 가설에 힘이 실렸다. 정말이지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는 없었다.
마론 드미트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진짜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를 매도한 것이 분명했다.
일대기의 목적과는 달랐다.
이런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헨리 앨버트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고, 세바스찬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헨리 앨버트에게 진실을 호소하려 했다.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이건 아니라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라 말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이런 미친 새끼가!”
짜악-!
세바스찬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 * *
콰당!
세바스찬이 바닥에 넘어졌다.
강한 충격에 뺨이 붉게 물들었고, 마론교의 교도들이 사나운 얼굴로 당장에라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헨리 앨버트는 개의치 않았다.
제대로 군사 훈련조차 받지 않은 연약한 몸뚱이지만,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칠게 소리쳤다.
“너희가 지금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내가 살아가는 샐러맨더 대륙을 구하고, 홀로 모든 짐을 떠안고 사라지셨다. 우리는 그 누구도 황제 폐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건만, 샐러맨더 대륙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안 황제 폐하는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해서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그런 분이시다. 너희가 그따위 눈깔로 바라볼 분이 아니란 말이다!”
악에 받쳤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당장에라도 세바스찬을 찢어 죽일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내가 황제 폐하의 일대기를 차원 너머에 뿌린 이유는, 혹시라도 황제 폐하를 상대로 불경을 저지르는 녀석들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디에 존재하든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기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업적을 기록했고, 그분의 이름까지 남겼다. 마론 드미트리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라고. 그런데 대체 마론 드미트리는 어디에서 나온 이름이지? 어째서 바로 눈앞에 황제 폐하를 두고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거지?”
화가 났다.
차원 너머.
모든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를 바랐다.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이따위 취급을 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드미트리 제국의 백성들은 다시 황제 폐하의 통치를 바란다. 정말 간절하게, 황제 폐하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너희가 그렇게 대할 분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공석으로 남아 있는, 샐러맨더 대륙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칭호를 인정받는 존재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시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너희는…….”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참담한 현실에 감정이 들끓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갑자기 그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파스스.
헨리 앨버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빙의가 끝나 갔다.
타의로 이 세상에 불려왔지만, 헨리 앨버트는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황급히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허튼 곳에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황제 폐하. 이렇게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수많은 차원을 샅샅이 살피면서 간절하게 바라 왔던 것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안위였습니다. 무사히 존재한다는 희망을 바랐을 뿐입니다.”
파스스.
얼굴이 변해 갔다.
헨리 앨버트가 아니라 매개체로.
점점 흩어져 가는 존재감에, 헨리 앨버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는 됐습니다. 반드시 이 세상에 도달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저희는 반드시 황제 폐하를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놓을 것입니다. 신 헨리 앨버트,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전파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겠습니다.”
차원 너머.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헨리 앨버트가 터트리는 감정은,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일련의 상황을 말없이 바라보던 로만 드미트리가, 헨리 앨버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모두 잘 있느냐.”
“아니요. 모두가 불행했습니다. 삶은 평탄하나, 드미트리의 백성들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을 삼켰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생각을 축약했다.
그러고는, 진심을 말했다.
“나 또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눈을 부릅뜨는 헨리 앨버트.
그것으로 끝이었다.
파스스스.
헨리 앨버트의 모습이 완전히 흩어지더니, 매개체로 사용되었던 사내가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 * *
일련의 상황.
세바스찬은 넋을 잃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헨리 앨버트가 내뱉는 말,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혼란이 일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 들어갔다.
로만 드미트리라니.
마론 드미트리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라니.
헨리 앨버트는 성서를 작성한 인물이 분명했다.
차원 너머에서 불러들였고, 본인이 드미트리 황제의 일대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성서를 해석하면서 마지막 마침표인 이름이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었다.
그때는 ‘복구 마법’으로 완벽하게 마론 드미트리의 이름을 알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그 마법이 잘못되었다면 문제가 커졌다.
MARON이.
ROMAN일 가능성.
단순한 애너그램이, 사실은 실수를 의미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세바스찬은 차원 이동 실험을 총괄하는 안드레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교주님.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로만 드미트리가 마론 드미트리 님일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까. 최근에 실험을 반복하면서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성서는 드미트리 제국을 건국한 마론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대해 말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성서의 행보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선택들은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일말의 불안감.
세바스찬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마론 드미트리와 유사했다.
강력한 무력과 과감한 행보,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의 울타리는 확실히 챙기는 모습.
그렇기에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바스찬이 말했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처럼 드미트리를 모방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그런 존재는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세계를 휘어잡는 모습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 말처럼 그것이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를 의미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반대로 악마가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름의 유사성.
그것은 악의였다.
인류를 절망에 빠트리려는 지독한 악의.
“정말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였다면, 그는 마론교를 찾았어야 했다. 본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우리를 배척하는 그의 행보는, 그가 드미트리 제국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상하지 않나. 마론 드미트리를 울부짖는 우리를 방관하지만, 마치 성서의 존재처럼 살아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그때는 몰랐다.
하나의 결과에 빠져드는 순간.
인간은 확신을 지니기 위해 결과에 맞는 근거들을 찾는다는 사실을.
편견이 뿌리를 내렸다.
세바스찬이 확신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는 절대 아니다. 내 인생을 걸고 장담하지.”
* * *
선명한 기억이었다.
그날의 대화.
자신감에 찼던 목소리.
세바스찬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그제야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나는 대체…….’
성서는 인류의 희망이었다.
매번 진실을 말했다.
마론 드미트리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라고.
마론 드미트리가 아닌 로만 드미트리가 인류의 구원자라고.
그런데 자신은 어떻게 행동했던가.
로만 드미트리가 인류의 해악이라는 생각에 정치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국제법을 위반한 대한제국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악행이라고 단정 지었던 행보를 막기 위해서 파트리스와 같은 마론교의 신도들을 앞세웠다.
조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목숨이 걸렸지만,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필요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신앙심(信仰心).
굳건한 마음이 그를 지탱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 그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우웩.”
역했다.
역겨움을 참아 낼 수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속을 게워 내던 세바스찬은, 차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바스찬 교주. 준비한 것은 이게 끝인가.”
확실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어떻게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정말 무섭도록 잔인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