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살귀(殺鬼) (5)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다들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최초의 대재앙이 발발하고, 인류는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나름대로 미래의 로드 맵을 그렸다.
10번의 대재앙을 모두 막아 내고 평화를 되찾겠다는 목표.
마지막에는 절대자가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그를 쓰러트리기보다는 그가 약속한 것처럼 인류의 평화를 허락받는 방향을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절대자는 이 세상에 대재앙과 동시에 시스템이라는 맞서 싸울 힘을 부여했다.
현재 인류가 갖춘 힘은 모두 절대자로부터 비롯되는데,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절대자를 쓰러트리는 그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절대자가 발언했던 ‘이 세상의 보존’이 인류의 생존과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악을 생각해서는 인류가 살아갈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절대자를 언급하면서도 항상 그의 악의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
목적을 이루면 떠나갈 존재라고. 최악의 상황에는 절대자와 싸워야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생각일 뿐.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지난 국제회의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그 점을 지적했다.
절대자를 신뢰하지 않아야 하며, 인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그때도 충분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지만,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절대자를 처리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수뇌부들은 말을 잃었다.
현재 인류는 단계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S등급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인데, SS등급 몬스터가 나타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대재앙이 반복될수록 얼마나 더 강한 몬스터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절대자가 부여하는 대재앙조차 한 단계씩 겨우겨우 감당해 나가는데, 갑작스럽게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모든 원흉인 절대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원의 영역을 허무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절대자를 마주하는 순간 인류는 스스로의 선택을 비난할 것이다.
차라리 대재앙을 받아들였다면.
대재앙의 주기만큼이나 인류가 살아갈 날이 허락되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를 알면서도, 그 누구도 명령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
항상 파격을 행했다.
상식을 벗어났던 그의 행보에, 머릿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내뱉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면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SS등급의 뱀파이어 로드도 단번에 처리한 존재라면, 분명히 절대자를 상대할 방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맹목적인 신뢰.
모든 것을 맡겼다.
인류의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결정권자로서의 짐을 모두 떠안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정보부장. 현재 대한제국의 기술력으로 ‘차원 이동’을 실현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면밀하게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최소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겁니다. 그것도 차원 이동 자체의 기술력만을 말한 것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목적지를 확인하고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배 이상의 시간이어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김판석.”
“예.”
“네가 차원 이동 실험을 도맡는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지?”
시선이 김판석에게로 향했다.
세계 제일의 마법사라고 한들, 그의 입에서도 부정적인 답변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면 충분합니다.”
“그, 그게 무슨. 정말 가능해서 하는 말입니까?”
박기태가 놀라서 되물었다.
다른 사람들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차원 이동은 고차원의 영역인데, 김판석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1년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수뇌부들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김판석이 알렉산드르로 살아가며 얼마나 오랜 세월 마법을 연구했는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판석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 충분히 가능해서 하는 말입니다.”
“너를 믿겠다. 지금부터 차원 이동 실험을 총괄하여, 1년 안에 내게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거라.”
“명을 따릅니다.”
일련의 상황.
사람들은 두 존재를 경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김판석 또한, 이제는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
* * *
회의가 끝났다.
밖으로 나온 김판석은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차원 이동이라.”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가 계획했던 것은 절대자를 쓰러트리고, 그로 인해 ‘차원의 규율’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드미트리와 재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례로 대재앙을 맞이하면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그 과정을 생략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로 인해 차원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찾아올 미래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차원 이동 마법을 성공시킨다면, 단순히 절대자의 존재를 찾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원의 규율은 차치하고.
드미트리와의 재회가 먼저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이 현생에 나타난다고 생각하자, 김판석의 머릿속은 당연히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는 항상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어. 그들이 현생에 나타난다면, 이제는 제법 신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내 자리가 위태로워지겠지. 정말 나를 위해 차원 이동 마법을 성공시키는 것이 맞을까?’
실험은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다.
알렉산드르.
마법의 제왕이었다.
9서클을 형성하며 수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마계와 지상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차원 이동의 진리 또한 깨우쳤다.
마론교가 20년간 매달린 업적은 김판석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마음먹었다면, 사실 벌써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거부감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
그들이 과연 자신을 용서해 줄까?
만약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마와의 소중한 시간은 더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참담했다.
마음 같아서는 실험에 실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를 실망시킬 수는 없어. 나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할 것이고, 진심을 다해야만 현생에서의 삶이 온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 정면으로 부딪치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나 하나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들,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나날들은 내게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테니까.’
현실을 받아들였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러러보는 상대가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나, 고대했던 삶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꿈이었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로서 천마를 올려다보던 자신이, 새로운 삶에서 그의 신임을 받고 있지 않은가.
믿음에 부응할 것이다.
차원이 열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를 날린다 한들, 기꺼이 천마의 명령을 받들 것이다.
‘앞으로 바빠지겠어.’
자신에게 얼마의 삶이 허락되든.
악마들에게 사지를 물어뜯기던 초라한 최후보다, 김판석은 가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 * *
살귀의 죽음.
그 소식은 세바스찬에게도 전달되었다.
드미트리의 악귀가 폭주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에, 세바스찬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아, 드미트리의 악귀는 이렇게 죽을 인물이 아닌데.”
성서.
헨리 앨버트가 드미트리의 업적을 논할 때, 마론 드미트리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한 인물이 바로 드미트리의 악귀였다.
드미트리의 섬광보다도 더 호전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존재. 그래서 언젠가 케빈의 전승자가 나타난다면, 마론 드미트리가 강림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해내리라고 믿었다.
사실 그러한 이유로 ‘드미트리의 섬광’을 영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스페인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사무엘은 멍청하게도 본인의 힘이 자신의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양팔이 잘려 나갔다.
드미트리의 섬광은 포기했다면, 드미트리의 악귀는 뭘 해 보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드미트리 출신이라면, 절대 케빈의 전승자를 죽이지 않았겠지.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을 서슴없이 죽이는 그의 행보는, 마론 드미트리 님의 강림을 방해하는 악의 존재임을 증명한다.’
그동안은 의구심이 있었다.
MARON, ROMAN.
두 이름의 연관성.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무력은 심상치 않았고, 어쩌면 드미트리와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귀의 죽음을 듣고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드미트리의 악귀는 마론 드미트리 황제가 정말 아꼈던 인물인데, 폭주라는 질병을 해결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죽여 버렸다는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의 진실을 증명했다.
인류의 해악.
신의 시험이 분명했다.
신은 로만 드미트리를 이 세상에 내려보내, 인류가 신의 뜻을 진정으로 믿는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악귀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는 득이 되는 일이다. 전승자는 폭주 상태로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차원 너머의 기억을 무의식중에 내뱉는데, 드미트리의 악귀가 마론 드미트리 님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다시 마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실험에 박차를 가한다면, 우리는 금방 고대하던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겠지.’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았다.
세바스찬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그려 나가며, 다시 한번 성서를 펴서 내용을 정독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도중, 사제로부터 갑작스러운 말을 들었다.
“암영(暗影)에서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암영.
소수만이 아는 비밀 단체.
세바스찬이 성서를 덮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들여라.”
* * *
암영은 정말 비밀스러운 단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청탁을 받아 의뢰를 수행하는 집단인데, 대다수 사람의 부정적인 시선과는 다르게 세바스찬은 암영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20년 전. 아직 마론교가 제대로 기반을 갖추지 못했을 때, 세바스찬은 암영의 도움을 받아서 세력을 확장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악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암영의 의도를 의심하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했음을 알았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암영의 그림자.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였다.
그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그림자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드미트리의 악귀는 인류의 미래에 귀중한 인재인데, 로만 드미트리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류는 중요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십수 년 전. 마론교를 비난하고 그 의도를 의심했던 사람들을 ‘암영’이 처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특단의 대책이라……. 한동안 암영의 활동이 뜸해서, 인류의 안위에는 무관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슥.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내밀자, 세바스찬이 흥미롭다는 눈길을 보였다.
“무엇입니까?”
“암영에서 따로 ‘차원 이동’에 관해 연구한 자료입니다. 마론교의 기술력과 이것을 결합한다면, 앞으로 1년 안에 유의미한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마론 드미트리 님의 소환은 단 한 번의 링크(link)가 중요합니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을 이 세상에 불러들인다면, 마론 드미트리 님의 소지품을 통해 그분을 소환하는 것 또한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겠지요.”
“지금 이것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리 도와주었다면, 마론교의 대업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희로서도 마론교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자체적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난 이후 교주님의 행보에 저희도 확신을 얻었습니다. 무조건 1년 안에 결과를 만들어 내십시오. 그 전에 대한제국을, 아니 로만 드미트리를 척결할 완벽한 판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림자가 웃었다.
두건 너머로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실선을 그리는 눈은 명백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인간은 선동에 약합니다. 1년 동안 차곡차곡 의심을 쌓은 뒤에, 로만 드미트리가 각 국가에 예고한 ‘1년’의 시간이 되었을 때 드미트리의 사람을 소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악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대체할 마론 드미트리 님이 존재하기에, 더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존재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바스찬 교주님. 교주님에게 인류의 중요한 순간을 양보하겠습니다. 피날레(finale)를 도맡아, 인류의 대업을 완성하십시오.”
그림자의 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 잘못된 존재를 따르고 있기에, 1년이라는 시간이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드미트리의 사람을 소환한다면.
마론 드미트리의 강림을 코앞에 두었을 때, 마론교가 악이라 주장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배척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이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세바스찬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 * *
마론교의 비밀 거처.
그림자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햇볕을 받는 순간, 그에게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가 지급됩니다.]
“큭큭큭.”
두건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림자는 선택받은 자였다.
절대자의 선택을 받아서, 스폰서 개념으로 그들의 후원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
전승자보다도 희귀한 존재였고, 조금 전에 스폰서가 본인에게 부여한 퀘스트를 완수함으로써 보상을 얻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
그로 인해서 멸망의 시기가 훨씬 빠르게 앞당겨짐과 동시에, ‘그분들’이 정말 만족하면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을 바라보였다.
마치 세바스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세상 어디에선가 일어난 일.
그로부터 1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