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66화 (566/615)

566화 살귀(殺鬼) (4)

털썩.

살귀가 쓰러졌다.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피로 흠뻑 물들었다.

살귀가 뿜어낸 피였고, 주변을 둘러보자 충격받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로서는 아직 혼란스러울 것이다.

살귀가 왜 살육을 벌였는지, 갑작스럽게 미쳐서 내뱉은 말들은 무엇인지.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악의 존재를 처단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여, 역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위험 요소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살귀의 죽음에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갑작스럽게 폭주한 살귀는 무분별한 살인을 저질렀고, 잠깐 이상한 말을 내뱉은 것으로 그를 안쓰럽게 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환호에 반응할 수 없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얼굴로, 피가 번져 나가는 살귀의 시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약육강식의 세상.

로만 드미트리는 항상 단호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케빈의 전승자를 마주하며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살귀가 호소하듯 내뱉은 말들. 그것은 온전히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에 남았다.

자신이 떠나고 케빈이 살아온 험난한 삶에, 상대가 진짜 케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이 들었다. 그를 살려 주고 싶었다.

단순히 자비를 베풀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케빈의 전승자를 연구해서 전승자와 케빈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심을 삼켜 냈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기에,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살귀의 복부에 검을 쑤셔 넣었다.

만약 진짜 케빈이었다 할지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살인한 순간부터, 눈앞의 존재에게 자비를 베풀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다.’

고개를 들었다.

열광하는 사람들 앞에는, 살귀를 막기 위해서 희생된 수호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비를 베푼다면,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악착같이 싸운 수호대원들의 희생이 무의미해진다.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100명의 타인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케빈은 정말 남다른 의미를 지닌 사람이지만, 단 한 번의 예외는 체계를 무너트리고 맹목적인 신뢰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철인 정치(哲人政治).

자신은 굳건해야만 했다.

과격하고 잔인할지라도, 항상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명확한 목적에 의해 행동했다.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귀가 케빈처럼 보였다.

한순간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아득하게 밀려드는 감정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군림하는 삶.

외로운 길이다.

수하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잠깐의 위안을 받을지라도 수하들은 군주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세한 균열은 불안함을 낳는다.

상식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 단 한 번의 위로는 분명히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강민호에게 다가갔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몸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당분간은 수호대 임무를 내려놓고 치료에 전념하거라. 그리고 경비대는 지금부터 시체들을 수습하고, 사망자들의 신분을 확인하라.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진행할 것이며, 이번 일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은 국가 유공자로서 그 희생을 기억할 것이다.”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로써 상황은 종료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서야,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대한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하고 감사해했다.

그러나.

“…….”

강민호는 왠지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의 뒷모습이 정말 쓸쓸하다고 느껴졌다.

* * *

그날.

인천에서 수뇌부 회의가 소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참석하지 않은 그 자리에서, 김준혁을 필두로 살귀 사건의 분석을 진행했다.

정보부장 박기태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전승자들의 폭주는 꾸준하게 발생해 왔던 사건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차원 너머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기억이 과도하게 밀려드는 경우 전승자들이 폭주한다는 논문이 있습니다. 살귀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살귀가 살아온 삶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고, 특히 ‘드미트리 황제’를 반복해서 언급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폭주의 형태입니다.”

“폭주를 미연에 방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시스템, 각성, 전승자, 선택받은 자. 현재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인간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류가 경험한 것들의 근거를 찾아 분석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분석으로 끝날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참 거지 같은 세상이구나.”

김준혁이 참담한 표정을 보였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수도 경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벌어진 사건이었고, 이번과 같은 사건을 사람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고 표현했다.

전승자의 폭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들을 억압할 수는 없다.

폭주는 정말 만에 하나 벌어질까 말까 한 사건이고, 인류의 안전에 큰 보탬이 되는 전승자들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박기태의 말처럼.

방법은 없었다.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박기태가 이어서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살귀의 발언입니다. 마론교는 그동안 꾸준하게 드미트리의 세상, 그리고 그곳의 황제인 마론 드미트리의 강림을 주장해 왔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발언이 사실임이 밝혀지면서 마론교는 상당수의 신도를 확보했지만, 지난 20년간 무의미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발언이 사실은 전승자의 기억을 이용한 사기극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싣습니다. 오래전에 언급했던 드미트리의 악귀가 실존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며, 살귀는 폭주한 상태로 ‘드미트리의 황제’를 언급했습니다. 마론교의 주장처럼 마론 드미트리 황제가 존재한다면, 그는 현재 인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힘을 갖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마론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류로서는 나쁠 것이 없겠지. 당분간은 정보부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 마론교의 행보를 주시하도록. 마론 드미트리의 존재가 언급된 상황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움직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후에도 몇 가지 안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례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개운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다들 궁금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살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예전부터 궁금했던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진심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세상에 홀연히 나타났고, 절망밖에 남지 않았던 사람들을 지옥에서 구해 주었다.

이 나라의 황제이기 전에.

은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현재 로만 드미트리는 거처에 있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김준혁이 말했다.

“이것으로 회의를 끝마치겠다.”

* * *

해가 저물었다.

창밖에서 드리우는 달빛에, 로만 드미트리는 피로 물든 검을 바라보았다.

살귀의 피였다.

피를 털어 냈는데도, 얼룩처럼 남아 있는 검붉은 빛깔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살귀는 케빈이 아니다.

눈이 멀어 자신을 바라보지 못했고, 마치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을 반복하는 인형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감정의 동요가 만만치 않았다.

황제 폐하를 부르짖는 존재의 복부를 관통시켰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경험했던 살인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충격이 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항상 반복했던 질문.

그 대답은 군림이었다.

언제나 모두의 머리 위에 존재해야 했고, 군림하기 위해서 투쟁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같을까.

로만 드미트리는 단언할 수 없었다.

백중혁으로서 살아갈 때는 죽지 않으려고 투쟁했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불안한 밤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힘을 갖추고도 투쟁의 삶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의 불안 요소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으며, 항상 강함을 열망하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갔다.

로만 드미트리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장자로 태어났을 때, 나약한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투쟁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변했음을 알았다.

만약 백중혁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아무리 명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들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을 진즉에 정리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막강한 힘을 갖추고도,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충분한 단계를 거쳤다.

달라진 것이다.

변해 버린 것이다.

전생의 삶을 경험하며,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욕망이 깃들었다.

공존하고 싶었다.

홀로 외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필두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강해지기 위한 욕망이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자신의 진심을 알지 못했다.

케빈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들과 같이 살아가던 삶을 이토록 추억할 줄은 몰랐다.

결핍은 현실을 보여 주었다.

샐러맨더를 떠났기에 더욱 확실해졌다.

이제야 알았다.

단순히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좋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형성하는 관계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었다.

그런 삶을 바랐기에 우화등선을 거절했다.

백중혁으로서는 온전히 충족하지 못했던 삶을 로만 드미트리로서 충족할 수 있었고, 샐러맨더를 떠나서야 그 삶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알았다.

돌아가고 싶었다.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살귀에 깃든 케빈의 울부짖음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혀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혼자 감당하는 것이 익숙했기에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난 강민호를 받아들였던 것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백 때문이었다.

마음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 했다.

강민호, 김준혁, 그렇게 사람들을 차례로 알아 가며, 로만 드미트리는 전생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했다.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더는 진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또다시 창밖으로 햇볕이 내리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받아들였다.

‘10번의 대재앙. 나는 절대 그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

확실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드미트리와 재회하기를 바랐다.

1분 1초라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로만 드미트리가, 그 거대한 존재감을 일으켰다.

* * *

다시 한번 회의가 소집되었다.

대한제국의 수뇌부들이 모두 자리했다.

살귀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뭔가 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이번 사태를 경험하며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절대자가 만든 판에서 놀아나야 하는가. 그들이 아무리 신적인 존재라고 한들, 인류가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자를 처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명확한 사실을 증명한다. 차원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 드미트리의 전승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존재가, 차원은 하나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현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절대자가 갑작스럽게 재앙을 선사한 것은, 그들이 차원을 넘어 지금에야 이곳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조금씩.

강렬한 어투를 내뱉었다.

사람들을 압도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지난 며칠간 고뇌하고 결론을 내렸던 부분들을 표출했다.

“대재앙 이후 인류는 불안에 떨고 있다. 절대자가 예고한 10번의 대재앙. 언제 어디에서 발발할지 모르는 대재앙에, 인류는 단 한시도 완전한 평화를 누릴 수 없었다. 너희에게 묻겠다. 왜 우리가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가. 10번의 대재앙을 차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자를 찾아낸다면 인류는 문제의 원흉을 해결할 수 있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

상식을 벗어났다.

그동안 인류는 절대자의 초월적인 힘에, 언젠가는 그를 상대할지도 모르는 막연한 현실을 상상해 왔다.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였기에, 그때까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갖추어야만 미약한 희망이라도 허락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의 영역을 허물었다.

“나는 차원의 경계를 허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절대자의 존재를 직접 찾아내 그를 척결할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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