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65화 (565/615)

565화 살귀(殺鬼) (3)

뚝, 뚝.

검을 움켜쥔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강민호는 살귀를 주시하며 주변을 힐끗 살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

놀란 얼굴로 굳어 버린 사람들.

만약 자신이 살귀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딸을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겠다고 다짐한 강민호이지만, 수호대의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단단한 소명감(召命感)이 자리 잡았다.

지금의 그.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완성되었다.

평화로운 삶, 모두가 인정하는 무력,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삶이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딸이 머무는 인천을 수호하라는 단 하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강민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성장은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받은 바를 보답하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E등급 헌터를 성장시켰다.

아직도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인천을 수호하겠다는 마음가짐만큼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버틴다.’

상대를 주시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간.

로만 드미트리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살귀가 더 이상의 살상을 벌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때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을 뚫고, 살귀가 강민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같잖아. 정말 같잖아.”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점점 동화율이 높아지면서, 그의 몸에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네가 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팟.

퍼퍼퍼퍼펑!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강민호가 살귀의 움직임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을 수차례 강타했다. 사방에서 번뜩이는 공격을 악착같이 막아 냈다.

수호문의 방어 초식을 펼치며 공격을 받아 냈지만, 살귀는 강민호가 막든 말든 계속해서 공격의 방향을 바꾸며 강민호를 몰아붙였다.

번뜩.

쾅!

머리를 내리찍었다.

검을 들어서 막아 내자 옆을 파고들었고, 그것 또한 막아 내자 이번에는 몸을 틀며 다리를 베었다.

카앙!

카카카카카캉!

역했다.

살귀의 짐승 같은 움직임을 따라갈 때마다, 식도를 타고 올라왔던 핏물이 비릿한 향기를 내뿜었다.

살귀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처음 격돌할 때는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 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민호의 정신을 현혹했다.

팟.

다리를 베였다.

그것을 포기하고 급소를 막아 내자, 이번에는 팔뚝에서 통증이 일었다.

“크윽.”

시간은 길지 않았다.

살귀와 격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강민호는 벌써 피로 흠뻑 물든 모습을 보였다.

이것으로 살귀는 A등급에 해당하는 실력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는 오라의 파괴력을 떠나서 S등급 이상의 전투력을 보였고, 이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가 도착하기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수호대장님을 도와라!”

“공격해!”

다행히도 추가 병력이 도착했다.

그들이 강민호가 숨을 돌릴 여유를 만들어 주었지만, 그것이 대세를 바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크악!”

“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살귀는 강민호를 몰아붙이면서도 병사들을 도륙했고, 한 마리의 악마가 되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표출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그들 또한 강민호와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대한제국이 격변했고, 그들은 최근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며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소중한 삶을 ‘살귀’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수십여 명.

시체가 쌓여 갔다.

강민호는 더욱 악착같이 살귀를 공격했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했다.

확.

인간의 상식을 벗어났다.

공격을 틀며 반격해 오는 살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번 공격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민호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치명상을 입고도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를 사용해서라도, 살귀가 지금처럼 날뛰지 못하도록 제한하고자 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치고 들어오는 살귀에 맞서려는 순간.

“아악, 아아아악!”

살귀가 갑작스럽게 두 눈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 댔다.

* * *

일련의 상황.

살귀의 눈에는 사람들이 현실의 모습대로 보이지 않았다.

[바르코의 기사야! 죽여 버려!]

[저기 베네딕트 후작이 도망가고 있잖아. 대체 뭐 하는 거야?]

[발할라, 크로노스. 저 악의 무리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네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밖에 없어.]

사람들의 모습이 홱홱 바뀌었다.

누구는 바르코의 기사로, 누구는 베네딕트 후작으로, 누구는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병사들로.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살인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다.

빨갛던 눈이.

점점 더 새빨개졌다.

마지막으로 강민호를 처리하려던 그 순간, 초점조차 빨갛게 물들며 그의 시야가 멀어 버렸다.

“아악, 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머릿속 기억들이 화끈한 통증을 선사했고, 빨갛게 물든 눈은 더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부터 강민호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야가 멀어 버렸다는 사실을 떠나,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인천 한복판에 존재하던 그의 의식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콰당!

“꺄악!”

그곳은 빈민가였다.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주변을 부쉈고, 자신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났기에 지옥을 벗어날 수 없었고, 빈민가에서 태어났기에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얼마 전에 ‘성’에서 살아가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말하는 세상의 불합리함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 주지 않는 부모님, 맛없는 반찬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이지 저따위 말을 내뱉는 아이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변했다.

안락한 환경이었다.

성안에서의 삶.

자신의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자신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불행하게 여겨졌던 환경이 꿈인 것만 같았다.

제발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자신에게 이와 같은 삶을 부여한 존재에게 평생 감사하며 헌신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파파팟.

세상은 계속해서 변했다.

전장에 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싼 공간에서, 자신은 한 존재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기사의 목숨을 끊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전장이었다.

살인에 익숙해졌고, 피로 흠뻑 물든 얼굴로 달려드는 적들을 도륙해 나갔다. 사람들이 자신을 악귀라고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빈민가 소년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지금은 가치 있는 일에 사용되며 자신의 가족들에게 안락한 삶을 선물해 주었다.

행복했다.

언제나 지금과 같기를 바랐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과 가족들의 행복.

악귀로 남을 이유로는 충분했다.

갑자기 한파가 밀려들었다.

믿어 주던 사람을 잃었고, 온 세상을 배회했다.

말을 하지 않아 입은 메말랐고, 먹지 않아 배고픔이 밀려들었으며, 차가운 밤공기와 세찬 바람이 몸을 떨게 했다.

강인했던 육신은 나약해졌다.

이따위 추위는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이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나간 시간에 예전과 같은 강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바라보며, 방황을 시작해야만 했던 간절한 소망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황제 폐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 * *

로만 드미트리는 사건 장소로 향했다.

수하를 통해 상황을 보고받았고, 케빈의 전승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하던 일을 모두 중단했다.

‘……케빈.’

특별한 이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케빈과 같은 존재들로 인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차원의 규율을 떠안고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삶에 그들의 흔적이 보였다.

반복되는 현실은 우연이 아님을 의미했고, 차원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살귀라는 존재가 보이는 증상은 귀혼마공의 광증과 흡사하다. 만약 케빈의 전승자가 귀혼마공을 물려받았다면, 케빈과는 다르게 귀혼마공의 광증을 버텨 낼 수 없겠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케빈은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으나, 귀혼마공을 버텨 낸 정신력은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

전승자.

참으로 미스터리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드미트리의 기억을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기억의 존재와 동일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진실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승자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왜 하필이면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현생과 연결되어 이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시스템.

대재앙.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이론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전승은 시스템을 벗어나는 일이었고, 인류가 언젠가는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임이 분명했다.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향했다.

마침내 현장에 도달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보고받은 것과는 많이 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 * *

살귀가 있었다.

보고대로라면 살귀가 살육을 벌여야 하는데, 그는 눈이 먼 상태로 주변을 계속 배회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탁하고 거치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죽음을 받아들였던 강민호는 고통을 삼켜 내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혹시라도 살귀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죽였다.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 중심을 배회하는 한 명의 인간.

살귀는 계속해서 처절한 음성을 뱉어 냈다.

“이 세상에는 황제 폐하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황제 폐하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세상이 안정되었건만, 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겁니까. 황제 폐하 없이는 세상의 평화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걸었다.

계속 걸어갔다.

그러다 무언가에 막히면, 걸음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정말 너무하십시오. 그렇게 홀연히 세상을 떠나실 생각이라면, 저희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떠나야만 하는지, 어째서 세상의 짐을 혼자 떠안아야만 했는지. 진실을 말해 주셨다면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황제 폐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흐느끼더라도, 저희는 그런 시간을 통해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을 겁니다.”

울음이 차올랐다.

점점 울부짖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요. 결국에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황제 폐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는데, 저희가 대체 어떻게 황제 폐하에게 희생을 감당하라 말하겠습니까. 제발,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아직 살아 계신다고 저희에게 희망이라도 주십시오. 제발……!”

살귀가 눈물을 흘렸다.

피와 뒤섞인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상이 떠나갈 듯 울어 댔다.

“끄윽, 끄으으윽. 이건 아닙니다. 흐으윽. 저희에게는 황제 폐하가 필요합니다. 황제 폐하가 돌아오셔야, 저희는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안고 떠나가신 황제 폐하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끄윽, 끄으윽.”

살귀가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 얼굴을 숙이고는 펑펑 울어 댔다.

그런 살귀의 모습에, 사람들은 말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살인을 벌이던 괴물이었지만,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인파를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살귀를 마주 볼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때마침 살귀가 고개를 들자, 초점을 찾아볼 수 없는 새빨간 눈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황제 폐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너는 케빈이 맞느냐.”

“황제 폐하……!”

“케빈이 아니라면, 너는 대체 왜 여기에서 그렇게 서글프게 우는 것이냐.”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저희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 주십시오!”

말을 멈추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얼굴과 표정, 목소리.

모든 것이 케빈과 달랐다.

그것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고, 한참을 바라본 끝에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너는 케빈이 아니다. 케빈이 아닌 무언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푹.

눈을 부릅떴다.

복부를 파고드는 검에, 살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미안하다.”

더 깊숙이.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끝까지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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