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기술 혁명 (8)
한 달 전.
발표회를 개최하기 이전에,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을 따로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었다.
“김판석. 너는 이번 삶의 목적이 ‘업보의 해소’라고 말했는데, 그동안 왜 네 지식을 사람들에게 공유하지 않았지? 너로 인해 이 세상이 변한다면, 업보의 펜던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텐데.”
“그게…….”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도 알았다.
백의의 마법사로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위보다,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영향력 면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업보를 해소하려고 아등바등 살고는 있지만, 자신의 것을 남들에게 알려 주는 일은 다른 문제였다.
평소라면 거짓을 말했을 것이다.
백의의 마법사에 어울리는 대답을 말했겠지만, 로만 드미트리 앞에서는 감히 거짓을 내뱉지 않았다.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을 걸쳐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터득한 제 지식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백일이야 저를 따르는 집단이니 길을 열어 주었지만,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지식만 빼 가고 저를 배신하면 제 삶이 너무 허망해지지 않습니까. 그저, 제가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해결적이길 바랐습니다.”
내뱉는 말 속.
김판석의 진심이 드러났다.
김판석은 혹시 모를 상황을 걱정했다.
자신으로 인해 마법 혁명이 일어났는데,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예상치 못한 존재가 나타나 자신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 그건 정말 열등감이 폭발할 문제였다.
알렉산드르로 살아갈 때는 충분한 삶과 마왕의 도움으로 9서클이라는 압도적인 경지에 올랐지만, 박민우로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삶엔 전생과 같은 시간적인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알렉산드르로서 오라 혁명을 일으켰지만, 재능이 부족했던 김판석은 검사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열등감이 들끓었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던 무지렁이에 불과했기에, 김판석은 세상을 위해 전부를 턱턱 내놓는 영웅적인 면모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업보의 해소는 차근히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왕 살아가는 삶이라면, 세월의 흐름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정상의 자리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욕망의 발로였다.
마론교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것처럼, 김판석은 그리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강제되기에 정의를 행할 뿐.
백의의 마법사는 속이 시커먼 인간이었다.
김판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생각에, 존경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흔들림 없는 강인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너를 능가하는 마법적인 재능은 만나 본 적이 없다. 에드윈 헥토르도, 펠릭스도. 모두 너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지. 네가 지식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일은, 오히려 네가 가진 것을 드러냈을 때 너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김판석. 이번 발표회에서 대한제국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마나의 근간을 사람들에게 공개함과 동시에, ‘백의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네 명성이 발표회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번 자리.
백의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가 살아온 정의로운 삶은, 발표회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적절했다.
“스스로를 믿어라. 내가 경험한 너는, 똑같은 시간에 추월당할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 * *
대화를 끝냈다.
밖으로 나온 김판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떨 때는 맑고, 어떨 때는 원망스럽던 하늘이, 지금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을 선사했다.
“……내가 스스로를 믿지 못했구나.”
감정이 울컥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본인 스스로도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존재인지를.
김판석으로 살아 보았기에, 알렉산드르로서 누렸던 부와 명예를 손아귀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흩어져 버릴까 봐. 김판석은 본인이 가진 것들을 아득바득 지켜 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언제든 무너질 것만 같았다.
착각이었다.
한심할 정도로 첫 번째 삶에 갇혀 있었다.
김판석으로 살았을 때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때의 삶은 일부에 불과할 정도로 알렉산드르로서 더 오랜 세월을 살았다.
열등감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주어진 삶에 순응했다면 역사의 흐름에 쓸려 갔겠지만, 알렉산드르로 살아가며 오라 혁명을 일으키고 마법사로 전향해 9서클의 경지에 오르는 위엄을 보였다.
물론 그 과정에 마왕과의 거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 또한 애초에 재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충분히 대단한 존재였다.
크리스, 케빈, 에드윈 헥토르, 펠릭스 등등.
로만 드미트리의 곁을 빛낸 존재들이, 만약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똑같은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였다.
항상 비교 대상을 로만 드미트리, 천마 백중혁으로 두었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존재와 비교해 대니 어떤 성과를 이루든 만족하지 못했다.
편협하고 열등감에 찌든 성격은 그렇게 완성되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김판석의 본질을 정확히 말해 주었다.
특별한 재능.
추월을 걱정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으로 대한제국이 만들어 갈 미래에서, 김판석을 능가하는 마법사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끄윽, 끄윽.”
눈물이 나왔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지만, 가슴 깊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얼굴을 감싸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천마에게 인정받는 이 순간, 절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인생 전부가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
경쟁자들?
그딴 것들은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존재면 충분했다.
그에게 인정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김판석은 본인의 것을 모두 내어 줄 의향이 있었다.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독기에 차오른 눈빛을 보였다.
‘그래. 이 세상에 내 모든 것을 내어 주지. 하지만 그 누구도, 설령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존재가 나타날지라도. 절대 나를 넘어서지는 못할 거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곁에는 항상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영원히 이인자에 걸맞은 실력을 갖출 테니까.’
열등감이 변화했다.
강한 열망.
아름다운 삶이었다.
노력이 충분히 보상받는 삶에, 지금보다 더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기술 발표회.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2부 발표는, 김판석의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 *
김판석이 말했다.
“마나 무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여러분들은 의문이 생기셨을 겁니다. ‘마나’라는 존재는 스킬에서부터 비롯되는데, 대체 어떻게 스킬을 배제하고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근본적인 부분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초인적인 힘이 모두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지만, 방금 발표한 기술만으로도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마나는, 이 세상의 근간은 미약할 뿐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의미입니다.”
관중석.
모두가 침묵에 물들었다.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김판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기에,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앞두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은 마나와 인간의 연결 고리에 불과합니다. 마나를 일으키고, 마나의 형태를 변환하여 인간들에게 스킬이라는 결과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배제하고 마나를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슥.
손가락을 들었다.
마에스트로가 연주하듯 가볍게 움직이자, 그 움직임에 따라 파란 실선이 따라붙었다.
“간단합니다. 마나에 특별한 형태를 부여하면, 우리는 시스템의 도움 없이 초인적인 힘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화륵.
화르르르르륵.
파란 실선이 불꽃으로 변했다.
특별한 스킬을 발현하지 않았는데도, 뜨거운 불길은 앞 좌석 관객들에게 후끈한 열기를 선사했다.
모두가 넋을 잃었다. 완전히 압도되었다.
머릿속에서 발표회의 내용을 해석할수록, 로만 드미트리가 1부 발표회를 시작으로 어떤 결과를 의도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미쳤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김판석이 무대 위를 거닐자, 사람들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눈동자를 같이 움직였다.
“마나의 근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시스템이 제공해 주는 편리함이 생략되며, 어쩌면 그냥 스킬을 사용하는 것보다 파괴력이 약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나의 근간을 이 세상에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단 하나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더는 각성이 소수의 혜택이 아니라는 것.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일반인들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도 몬스터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는 것.”
점점.
발표가 끝을 향해 나아갔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가, 백의의 마법사라는 정의의 대명사의 이름값이.
발표회를 특별하게 장식했다.
제국의 위상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임을 알면서도, 지금은 대한제국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에게 공개하겠습니다. 서클(circle)의 체계와 서클별 마법. 인류는 지금부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 * *
발표가 모두 끝났을 때.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경쟁하던 존 해리슨, 왕위룡, 아흐메드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 어린 표정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대한제국의 의도는 상관없었다.
그들이 이번 발표회로 어떤 이득을 바라든, 대한제국은 인류 전체에게 확실하게 이득이 되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와 같은 선택을.
대해(大海)와도 같은 거대한 그릇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발표회를 망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베르나르도는 소녀팬처럼 꺅꺅 소리를 질렀고, 관객들은 1분이 넘도록 박수 세례를 보냈는데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감사할 뿐이었다. 이런 결단을 내려 준 대한제국의 선택에. 서로의 이권으로 뒤얽혔던 관계가 지금만큼은 하나의 인류로서 대동단결했다.
발표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직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발표회장을 나서는 각국의 지도자들은, 체면을 내려놓고 대한제국의 업적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기술을 개발해 낸 걸까요.”
“그거야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한제국은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숨겨 둘 법한 것을, 인류를 위해 전부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대한제국이 처음 황제의 존재를 선언했을 때, 저는 그들로 인해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황제의 자리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분입니다. 앞으로 그분이 하는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난리였다.
다들 입을 모아 찬양했다.
그렇게 모두가 흥분한 상황에, 유일하게 허망한 얼굴을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이를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파트리스였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인류의 해악이라고 믿었다.
마론 드미트리를 흉내 내는 그로 인해서, 인류는 훗날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혼란스러웠다.
대한제국의 발표.
완벽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었고, 진정으로 세상을 주도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결단에 파트리스는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해악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를 무너트리는 명분을 얻을 수 있는데, 지금은 마치 인류를 위하는 마론교가 악의 무리인 것만 같았다.
참담했다.
명분이 퇴색되었다.
자신이 정의인지, 로만 드미트리가 정의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표회 자체는 2부로 마무리되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국가 정상들에게 따로 대화할 자리를 제안했다.
모두가 걸음을 옮겼다.
다들 흥분했다.
인류를 변화시킨 로만 드미트리를 만날 생각에, 좀처럼 감정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파트리스는 달랐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목이, 그에게는 지옥으로 추락하는 통로처럼 보였다.
그렇게.
끼익.
문이 열렸다.
거대한 공간이 드러나자.
“자리에 앉으십시오.”
노골적으로 상석(上席)에 앉은 로만 드미트리가, 모두의 존재를 반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