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기술 혁명 (3)
카앙-!
카앙, 카앙-!
반복되는 동작.
반복되는 소리.
로만 드미트리의 근육이 부풀며 강철을 내리칠 때마다, 강철과 본인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하나씩 소멸되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無我之境)이었다.
실력이 있는 장인들도 일평생 한 번이라도 경험하길 바라는 경지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을 먹은 순간 의식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오로지 단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며 무섭게 빠져들었다.
카앙!
현생과 전생.
두 삶을 통틀어 셀 수도 없을 만큼 망치질을 해 왔다.
로만 드미트리는 현생의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단정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마스터 블랙스미스 헨드릭과 대한제국 최고의 장인이라고 불리는 박광덕. 둘의 차이점은 실력과 노력이 아니다.
둘 다 뛰어난 장인이고 망치질에 인생을 바쳤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둘의 간격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차이였다.
배경의 차이였다.
헨드릭의 세상에서 강철을 제련하는 일은 우선으로 취급받았다면, 박광덕의 세상은 현대 사회가 구성되면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적어도 강철로 ‘무기’를 제작하는 일은 총을 사용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쩌면 제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대재앙이 발발하기 전에도 망치를 놓지 않았던 박광덕의 의지가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떠나.
정말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마나’라는 세상의 근간을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마나를 이해하는가, 이해하지 못하는가의 차이.
전생은 마나를 이해했다.
오라와 마법이 발달했고, 마나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정리되었기에 그 모든 정보가 검에 녹아들었다.
대장장이들 또한 단순히 철제 무기가 아니라 마나를 받아들이는 검이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현생처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기술이, 드미트리의 시대가 되면서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곳은 현생과 다르게 마나가 풍부했다.
드미트리의 장인들이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행위 자체에 마나가 녹아들어 있었다.
‘현생의 장인들은 기술이 발달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마나가 척박해 마나 무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의도적으로 마나를 불어넣어야 하며, 시스템을 통해 마나를 발현하면서 마나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박광덕과 같은 장인들을 시작으로 드미트리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지. 이들의 기술력이 부족한 것은 노력의 부족이 아닌, 지금 그들에게 허락된 한계일 뿐이다.’
카앙!
기술 혁명.
시기를 앞당겼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완성해야 할 기술을, 로만 드미트리는 현생에 꽃피울 생각이었다.
대한제국의 부흥을 위해?
그것도 맞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드미트리에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을 통치하기를 바란다. 나의 군림에는 이제껏 군림 자체에 목적이 있었지만, 지금 바라는 군림에는 일말의 변수조차 허락하지 않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드미트리. 그 세상을 이곳에 불러들이는 과정에 조금의 변수도 개입되지 않기를.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강자들과 절대자의 존재가, 감히 나의 목적을 방해하는 일이 없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카앙-!
의지가 부풀었다.
열망이 타올랐다.
격렬하게 들끓는 감정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의 망치질은 지루할 정도로 차분하게 반복되었다.
정도를 따랐다.
평소에는 염화신공을 발현하며 지금보다 더 폭발적으로 작업했지만, 현생의 장인들에게 보여 주려는 기술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따라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들이 한번 보고 배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광경은 대한제국의 근간으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생각하는 강대국을 만들기 위해서, 박광덕과 장인들은 탄탄한 근간으로 성장해야 했다.
드미트리에 대장장이들이 있었듯.
대한제국에 장인들이 존재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의도적으로 마나를 움직이며, 현생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의 작업 기술을 선보였다.
수십,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
하루, 이틀, 사흘,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모두 흘렀을 때.
파스스스스.
로만 드미트리가 마침내 망치질을 멈추었다.
* * *
지난 일주일.
박광덕과 장인들은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제안과는 별개로, 그분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반드시 기술의 원리를 알아내고 말겠어. 하루도 아니고 무려 일주일이야. 평생을 대장간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차고 넘칠 정도의 시간이지.’
의지를 다졌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행동 하나하나 전부를 눈에 담겠다는 듯이 강렬한 의지를 보였다.
그렇게.
카앙-!
작업이 시작되었다.
“와.”
“허어.”
다들 시작부터 감탄사를 내뱉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작업에 어떤 스킬적인 요소가 포함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완벽하게 정석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장인들의 영역이었다.
스킬을 사용해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땀을 녹여 내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망치질을 통해 결과물을 조금씩 깎아 나갔다.
다르게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들과 같은 장인이었다.
그의 외관에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정작 그는 진심으로 장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작업 방식을 선보였다.
망치질을 반복할 때마다 그간의 세월을 느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검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뇌하고 노력해 왔는지가, 감정의 쓰나미처럼 일어나 숨이 막힐 듯이 밀려들었다.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장인들은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체에 흠뻑 빠져들었다.
화륵.
화르르르륵.
넘실거리는 불길 속.
장인들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붉게 일어나는 마력이 강철에 빨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철을 내리치자, 마력은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고는 다시 강철에 빨려 들어갔다.
반복되는 망치질.
반복되는 마력의 폭발.
박광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광경이, 이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차렸다.
‘……자연의 마나를 망치질 하나로 강철에 스며들게 만들다니. 바로 이거였어. 굳이 제작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철제 무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공백을 두지 않더라도. 마나를 완벽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철제 무기로서도 완벽한 무기를 만드는 방법이 바로 이거였어! 철제 무기가 마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검은 두 가지의 강점을 공존시킬 수 있었던 거야.’
감탄했다.
동시에.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설명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이론처럼 보이겠지만, 마나를 자유롭게 다루는 저 능력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현생의 사람들은 스킬을 통해서만 마나를 다루었다.
마나를 이해하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스킬을 사용했을 때만 마나가 동반되는 방식.
혼란스러웠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다른 장인들도 박광덕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이건 예술이야. 예술의 경지라고.”
“아아.”
다들 완전히 매료되었다.
목적을 잊었다.
기술을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눈에 담고자 열망했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를.
그의 작업은 지켜본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며, 마나를 다루는 기술 자체도 겨우 한 단계 과정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도 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마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인으로서는, 근간을 터득하지 않고서는 그 단계를 모방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해가 저물고, 해가 다시 떠올랐다.
사람들은 최대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기술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기에, 역사에 남을 순간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그렇게 일주일.
마침내 망치질을 멈추었을 때.
파스스스스.
“황제 폐하.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황제 폐하.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황제 폐하.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박광덕을 필두로, 장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충성 맹세를 부르짖었다.
* * *
박광덕이 말했다.
“황제 폐하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마나 무기를 만들었던 방식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습니다. 당장 인류가 위험한 상황에, 스킬을 사용하는 방식이 반쪽짜리임을 알면서도 저희는 현실을 외면해 왔습니다. 저희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그 기술을, 저를 비롯한 장인 협회의 장인들은 가르침을 받길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다면 기꺼이 대한제국을 위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위해 제 삶을 바치겠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열망이 퍼져 나갔다.
장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우러러보았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장인으로서 인정하는 순간,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백성이며.
일평생을 헌신한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더할 나위 없는 존재였다.
강렬한 열망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무기를 만들어 내는 장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보유했다 할지라도, 몬스터의 외피를 베어 내지 못하는 무기를 들고 있다면 뛰어난 검술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지. 새로운 시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너희는 너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나 로만 드미트리는. 장인들의 가치를 끌어올릴 것이다. 너희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드미트리.
대한제국.
운명의 연결 고리를 이었다.
드미트리가 제작 기술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것처럼, 장인들이 대한제국의 근간이 되기를 바랐다.
박광덕과 장인들이 감격 어린 표정을 보였다.
그들은 장인으로서 인정받아 왔으나, 로만 드미트리만큼 그 가치를 말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딱 그 정도.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전생을 경험했기에, 장인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감격이 벅차올랐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말했다.
“그 시작은 앞으로 한 달 뒤. 세계 모든 국가를 초대한 자리에서 기술 발표회를 진행할 것이다. 지금의 너희처럼,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기술을 우러러보면서도 감히 따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 그때부터가 기술 혁명의 시작이다. 너희가 주인공인 무대로 인해, 이 나라는 새로운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할 것이다.”
밝은 미래.
주인공의 자리를 내세웠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박광덕과 장인들은 생각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를지라도,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 * *
대한제국이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 그때.
왕위룡은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민우, 아니 김판석으로 개명한 백의의 마법사에게 패배한 이후, 그는 정치보다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검을 휘두른 그는, 수하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며 한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샤오룽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수통을 받았다.
물을 마시는 동안, 샤오룽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한제국에서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천 정부 직할대 소속, 박철민이라는 사내가 검을 수리하기 위해서 서울의 수리 센터 미라클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박철민이 보급품으로 받은 검이, 대한제국 장인 협회 전체를 움직일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직접 제작한 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한제국 정부와 장인 협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가 직접 제작한 검이라고?”
“예.”
우뚝.
왕위룡이 행동을 멈추었다.
그가 수하들을 시켜 대한제국의 행보를 주시하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한달음에 달려가도록.
천마신교의 후예로서, 천마 백중혁이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충성심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다.
우연히 장인 협회의 일을 알게 되었다.
평범하게 흘려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왕위룡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마의 검이라니.’
눈동자가 요동쳤다.
자신의 아버지.
그가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해 줄 때, 정말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천마 백중혁 님은 장인으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었다. 결전의 순간을 앞둘 때마다 현재의 자신에게 걸맞은 검을 스스로 만드셨는데, 그렇게 탄생한 39자루의 검은 천마의 검이라 부르며 무림 제일의 보물이라고 평가받았지. 지금은 모두 소실되었다고 알려졌지만, 한때 내 소원은 천마 백중혁 님의 검을 들고 천마검법을 펼치는 것이었단다.”
전율이 일었다.
아버지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 또한 가슴속에 품었던 강렬한 열망!
잠시 잊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최근의 그에게는 ‘천마의 검’을 떠올릴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샤오룽의 보고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분노와 질투가 뒤섞인 감정이 들었다.
자신은 천마의 검을 사용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건만, 직할대 소속의 박철민은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르면서 천마의 검을 하사받았다.
탐욕이 치밀었다.
보급품.
누군가는 보급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깎아내리겠지만, 왕위룡은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기술 발표회 한 달 전.
“지금 당장 대한제국으로 향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라. 내가 직접 박철민을 만나야겠다.”
기술 발표회를 떠들썩하게 만들.
왕위룡의 한국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