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서열 정리 (5)
정적이 흘렀다.
직원은 말없이 수차례 눈을 깜빡이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한번 되물었다.
“……개명이요? 그러니까, 이름을 바꾸시겠다고요?”
개명은 흔한 일이다.
부모님께서 통상적이지 않은 이름을 물려주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문제는 상대가 백의의 마법사라는 것이다.
박민우라는 이름 자체도 어디서 놀림을 받을 만한 이름이 아닌 데다,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지 않았던가.
해외에서야 백의의 마법사라는 수식어만 기억한다지만, 대한제국에서는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이름을 바꾸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 개명할 생각입니다.”
박민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건물 안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모두가 박민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숨을 죽였다.
원래라면 요청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직원의 본분이건만,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되물었다.
“……혹시 세상을 등지고 떠나시려는 겁니까?”
“그럴 생각 없습니다. 황제 폐하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최전선에서 활약할 생각입니다.”
“그럼 최근에 무슨 특별한 심경 변화라도 있는 겁니까? 여자친구에게 차였다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다든지. 이렇게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실례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최근 10년을 통틀어도 백의의 마법사님과 같은 사람이 개명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개명 리스트를 보여 드릴까요? 다들 이름이 방귀남, 조까치, 김개년 등등. 대부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신 분이라면 이름을 바꿀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직원의 반응.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름이 특이한 것도 아니고, 박민우라는 이름에 사주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라.
이미 백의의 마법사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사주에 문제가 있다면 진즉에 실패해서 뒷골목 한편에서 폐지를 덮고 잠을 청해야 했을 것이다.
이미 성공한 사람의 삶. 그간의 운명을 이어 갈 생각이라면 이름을 바꾸지 않는 것이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명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우를 한참 벗어나다 보니, 직원은 이해를 시켜 달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였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평소의 박민우라면 짜증이 났겠지만, 지금은 왠지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말입니다. 만인(萬人)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의 인정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사사로운 이유가 아니라, 저는 개명이 제 인생에 정말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처리해 주시죠.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강했다.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나, 박민우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직원으로서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바꾸실 생각이죠?”
서류를 꺼냈다.
절차를 준비하던 직원은,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굳어 버렸다.
“김판석. 김판석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예?”
당황스러움으로 얼룩진 얼굴.
이번에도 직원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 *
김판석.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남자답고 강인한 면모가 보이지만,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 선호되는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 백의의 마법사 김판석. 뭐가 더 어울리겠는가.
이름에 어떤 편견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박민우로 잘살던 사람이 김판석이 된다는 게 어색했다.
게다가.
성까지 바꾸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을 바꾼다는 말에, 직원은 다시 한번 캐묻는 과정을 거쳤다.
결국에는 박민우의 청을 받아들였다.
정부 건물에 발을 들일 때만 하더라도 박민우였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김판석이 되었다.
“그래, 판석아.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 보는 거야.”
충만한 감정이 차올랐다.
박민우의 삶.
나쁘지 않았다.
백의의 마법사로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와의 인연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임팩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판석은 첫 번째 삶.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에 불과했지만, 그때의 김판석은 십만대산 아래에서 살아가는 천마신교의 백성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나의 백성이었다고.
그때의 기억을 이름으로 되살린다면, 로만 드미트리 또한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조금이라도 어필하기 위해.
박민우로서 이루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사람들은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로 그를 기억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인정만을 바랐다.
왕위룡이 벽화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연결 고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천마의 백성’임을 이름으로 내세웠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었다.
‘황제 폐하. 신 박민우, 아니 김판석이 가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만날 생각에, 김판석의 머릿속이 꽃밭으로 물들었다.
* * *
황당한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만난 김판석은, 고개를 조아리며 오늘 하루 있었던 다이나믹한 일들을 말했다.
“조금 전. 왕위룡과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황제 폐하를 모시는 몸이나, 저는 확고한 위계질서를 위해서는 서로 간의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왕위룡의 동의하에 결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당연하게도 승리했습니다.”
천마신교.
내부에서의 경쟁은 당연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경쟁의 영역은 관여하지 않았지만, 김판석은 굳이 달려와서는 자신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말하지 않고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성격과 맞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며 본인의 승리 사실을 널리 널리 퍼트렸던 것처럼, 김판석은 보고의 형식을 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로만 드미트리의 진정한 이인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박민우에서 김판석으로 개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백의의 마법사 박민우로 기억하지만, 제 근본은 황제 폐하의 백성이었던 ‘김판석’입니다. 그동안은 새로운 삶에 순응하려고 했지만, 황제 폐하를 만난 이후부터는 제 근본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개명을 결단했습니다. 황제 폐하. 전생에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오로지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며,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면 분골쇄신(粉骨碎身)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중하게 써 주십시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처럼 최전방에 내세워도 좋으니, 저는 황제 폐하의 백성으로서 값있게 살고 싶습니다.”
쿵!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김판석의 의도.
노골적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김판석.
알렉산드르.
박민우.
세 번의 삶, 세 번의 인연.
김판석은 한 번의 삶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판석으로서는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고, 알렉산드르로서는 과도한 욕망에 삐뚤어졌으며, 박민우로서는 전생의 업보를 청산하겠다고 부단히 노력했다.
사람은 단편적이지 않다. 김판석은 정말 입체적인 인물이나, 그와의 관계를 확고하게 정리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보다.
드미트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김판석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나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김판석. 내게 헌신하는 네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만약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네 존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면…….”
천마의 백성.
자신으로 인해 혼란한 삶을 살아온 존재.
김판석은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의 업보일지도 몰랐다.
이미 한 번의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기에, 운명으로 뒤얽힌 존재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다.
“너는 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김판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보장되지 않는 미래이나, 로만 드미트리가 열어 준 가능성은 그가 앞으로 살아갈 원동력을 부여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신 김판석, 앞으로도 황제 폐하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진심을 토해 냈다.
피 맛이 날 정도로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
천마 백중혁.
자신의 전부인 존재를 향해, 김판석은 후회가 없도록 감정을 쏟아 냈다.
* * *
그로부터 며칠.
박민우, 아니 김판석과 관련해 무성한 소문이 떠돌았다.
“백의의 마법사가 왕위룡을 쓰러트렸다고? 그게 가능해?”
“내가 백의의 마법사에게 직접 들었다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의의 마법사와 왕위룡이 한바탕 제대로 붙었대. 일반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검사라고 불리는 왕위룡의 승산이 높겠지만, 백의의 마법사가 하는 말로는 본인이 아주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던데?”
“나도 들었어. 소문이 엄청나게 퍼졌는데도 중국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백의의 마법사가 사실을 말한 것이 분명해. 왕위룡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소문을 방관할 리가 없잖아.”
왕위룡과 백의의 마법사.
둘의 대결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김판석의 실력에 감탄하며,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 외에는 그의 상대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물론 왕위룡을 쓰러트렸다고 해서 모두를 이긴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크리스의 전승자와 같은 실력자들이 존재하기에, 아직 순위를 판단하는 발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백의의 마법사가 왜 개명을 한 거지?”
“박민우에서 김판석이라니.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까지 바꾸다니.”
“내가 보기엔 인간관계를 전부 새로 하고 싶을 만큼, 뭔가 큰 상처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이름을 버릴 이유가 없잖아.”
“병신들. 성까지 바꾼 이유는 뻔하지 않냐. 부모님과의 문제. 알고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거지.”
“막장 드라마냐?”
“이미 막장이잖아. 박민우가 김판석이 되었다는 게.”
의견이 분분했다.
사람들은 김판석에 관해 많은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정작 소문의 주인공인 김판석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존재를 점점 받아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재앙도.
전쟁도 막을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대한제국도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던 것과는 다르게 조용하게 내실을 다지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의 이름을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시작점.
그것은 바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서울의 한 수리 센터였다.
* * *
수리 센터 미라클(miracle).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업체로, 마법 무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곳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평범한 행색에 평범한 용건.
“무기 상태를 점검하러 왔습니다.”
“일단 물건을 먼저 확인해 보고, 수리가 필요한지와 수리 기간 등 대략적인 것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미라클의 장인.
하성태가 사무적인 얼굴로 말했다.
미라클에서 수년을 일해 온 그에게, 지금 찾아온 손님은 흔하디흔한 일상적인 케이스였다.
무기를 받아 들었다.
한 자루의 검이었는데, 간단하게 훑어보려던 그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했다.
검의 상태.
심상치 않았다.
한참 동안 검을 살펴보던 그가 손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난 물건입니까?”
손님의 이름은 박철민이었다.
인천 정부 직할대 소속의 인물.
박철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부에서 보급받은 보급품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이게 보급품이라고요?”
경악하는 하성태.
그때는 몰랐다.
별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
보급품이라는 출처가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