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52화 (552/615)

552화 서열 정리 (4)

박민우가 떠난 자리.

왕위룡이 참담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무릎을 꿇으면서,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더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백의의 마법사. 그는 내 검법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어.’

천적(天敵)이었다.

단순하게 힘과 힘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박민우는 천마검법의 체계를 간파하고 왕위룡을 무너트렸다.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함을 선사했다.

자신의 전력이 상대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에, 왕위룡은 악에 받쳐서 달려들었는데도 박민우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박민우의 진실.

자신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말 그대로 천적이었고,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왕위룡이 로만 드미트리에 이어 다시 한번 날개가 꺾여 버리고 말았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상대가 천마 백중혁이기에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자신이 경험했던 순간들이 꿈인 것만 같았다.

박민우는 대체 어떻게 천마검법을 알고 있는 걸까.

로만 드미트리가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따위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패배했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었다.

가르침을 받았든 말든, 왕위룡은 박민우에게 참담하게 패배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으나 박민우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표정에는 절박함과 다급함이 보이지 않았고, 그는 시종일관 자신과의 대결을 주도했다.

자신이 이토록 완벽하게 무너졌는데, 상대의 밑바닥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왕위룡은 생각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오래전.

백의의 마법사에 대해서 들었었다.

대한민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그 시절 그의 행보에, 왕위룡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고?

자신의 야망에 걸림돌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스스로를 세계 제일이라 생각했던 왕위룡은, 언젠가 야망을 실현으로 옮기는 날에 자신을 막을 존재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참 멍청한 생각에 불과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규격 외의 존재는 제외한다 치더라도, 백의의 마법사에게 이렇듯 패배하지 않았던가.

세상일은 알 수 없었다.

백의의 마법사처럼,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강자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현재 위치를 받아들였다.

자신은 한 명의 강자일 뿐이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나아가는 삶에서, 스스로를 과신했다간 퇴보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멋도 모르고 대륙 정벌을 시도했다가 참담한 현실에 무너지고 말았겠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깨달은 것은.’

이를 악물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군.”

샤오룽.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왕위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왕위룡과 박민우.

둘이 서열을 정리하는 동안, 샤오룽과 호위들은 초조한 얼굴로 왕위룡을 기다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멀리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왕위룡이 명령했기에 멋대로 찾아가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사방이 조용해졌다.

샤오룽이 마른침을 삼켰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내가, 제발 왕위룡이기를 빌었다.

그런데.

‘……설마.’

박민우였다.

백의의 마법사가 피로 물든 얼굴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샤오룽을 발견하다니, 히죽 웃음을 보였다.

“앞으로 똑바로 해, 이 새끼야. 객기부리다가 X 되기 싫으면.”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민우 혼자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가 자신을 향해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인다는 사실은. 왕위룡과의 문제에서 그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박민우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 너머에 따라오지 않는 자신의 주군을 먼저 챙겨야만 했다.

“제길.”

팟.

땅을 박찼다.

황급히 찾아갔다.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장악했지만, 샤오룽은 애써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 왕위룡이 누구인가. 천마신교의 후예로서 중국을 정벌한 전설적인 존재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공을 이어받았던 샤오룽은, 왕위룡의 강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그런 그가.

겨우 백의의 마법사가 패배하다니.

시정잡배처럼 저급하게 행동하는 녀석을 상대로, 무림의 희망인 왕위룡이 패배하다니.

로만 드미트리까지는 인정했다.

천마신교의 주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하나, 백의의 마법사는 허용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현실을 부정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하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우상을 발견했다.

“……주, 주군.”

예상대로였다.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

왕위룡은 패배했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샤오룽이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에, 왕위룡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의의 마법사에게 패배했다. 패자는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로 모시는 것이 대결의 조건이었지. 샤오룽. 나는 거래를 이행할 것이다. 백의의 마법사는 대한제국의 이인자이며, 우리는 지금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만 한다.”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까?”

“아니.”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패배.

인정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앞으로의 미래는 달랐다.

“결과는 받아들이나 패배하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일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로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륙 정벌을 운운하던 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고, 이 세상에는 백의의 마법사와 같은 강자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천마신교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자는 퇴보한다. 고로 나는 패배를 딛고 일어나, 반드시 나의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사람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달랐다.

어떤 이는 절망하고.

어떤 이는 포기하고.

어떤 이는 패배를 딛고 일어났다.

왕위룡은 패배를 자양분으로 삼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천마신교에서, 박민우에게 그 옆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오랜 세월 벽화의 뜻을 받든 왕씨 가문이야말로, 로만 드미트리의 곁을 지킬 자격이 있었다.

그제야 샤오룽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또한 강해질 것입니다. 앞으로 천마신교의 이인자가 될 주군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 * *

중국의 두 인물을 뒤로하고.

박민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왜 이리 푸르른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올 때마다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흐흐흫.”

왕위룡.

드디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처리했다.

독기로 물든 눈빛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장은 서열을 정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중에 도전하면 또 쓰러트리면 그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의 곁은 자신의 것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서 이인자의 자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먼저 백의의 마법사를 알아보겠지만, 이번에는 박민우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러분. 혹시 왕위룡이라고 아십니까?”

“예, 맞습니다. 중국의 주석. 사람들이 대륙 제일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 제가 방금 왕위룡을 쓰러트렸습니다. 이 박민우가, 왕위룡을 쓰러트리고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 이어 대한제국의 이인자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하하하, 걔 별거 없습니다. 대한제국에는 저 박민우가 있는데 왕위룡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입이 근질근질했다.

사실을 말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최대한 많이 퍼지도록, 박민우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내뱉었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박민우와 왕위룡의 대결.

특종이었다.

박민우가 무명이면 모르겠는데, 백의의 마법사 정도 되는 인물이 설마 헛소리를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박민우의 걸음은 가벼워지다 못해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위룡은 패배하고 절대 그냥 물러날 사람이 아닙니다. 중국을 통일시킬 때도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독종의 기질을 보여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한 사람의 말.

거슬렸다.

가벼웠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사람이 한적한 공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그래, 그 새끼가 그냥 포기할 리가 없어. 분명히 날 다시 한번 제껴 보겠다고 별 지랄을 다 하겠지. 단순히 강함으로 겨룬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어찌 됐든 간에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와 왕위룡의 사이에 ‘천마신교’라는 단단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거야. 이 세상도 학연, 혈연, 지연이 우선인 것처럼, 단 하나의 문제가 내 위치를 위협할지도 몰라.”

불안감이 점점 팽배해졌다.

왕위룡을 쓰러트린 지금.

확실한 종지부가 필요했다.

천마신교라는 연결 고리를 견제할, 자신만이 내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가.

‘그래, 그거야!’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일단 박민우는 백일을 불러들였다.

* * *

백일의 마법사들.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민우는 그들에게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백일은 오늘부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공식 친위대로 선정되었다. 우리는 대한제국의 얼굴이며,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위상을 증명하는 존재로 평가받을 것이다.”

지금껏 백일은 정의를 추구해 왔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면서부터, 박민우는 조금씩 교묘하게 로만 드미트리가 정의라고 세뇌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 대재앙을 해결하고, 악을 행하는 러시아를 처단하셨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강해져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중국의 세력’에게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이 토종 한국인들로 구성된 백일의 힘으로 강대한 세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들어야지, 중국이 대한제국의 최고 전력으로 평가받는다면 그 얼마나 굴욕이겠는가. 너희에게 앞으로 상위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를 믿고 따라온다면, 너희는 반드시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을 위하여!”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모두가 열광했다.

그럴듯하게 내세운 명분.

백일의 마법사들이 흠뻑 빠져들었다.

사실 박민우는 그동안 백일을 운영하면서도 그들을 진심으로 가르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인데, 로만 드미트리라는 확실한 명분이 생기면서부터 얘기가 달라졌다.

백일은 온전히 자신의 전력이다. 왕위룡의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상승시킬 필요가 있었고, 백일의 구성원들은 충분히 발전할 여지를 갖추었다.

특히.

‘장윤태. 재능은 나쁘지 않은 녀석인데…….’

한 사내가 눈에 밟혔다.

눈치가 없어서 매번 일을 망쳤지만, 마법적인 재능만 놓고 보자면 백일에서 제일은 바로 장윤태였다.

사실 나쁘진 않았다.

열심히 하려다 보니 실수를 저지를 뿐, 장윤태는 자신의 힘에 매료되어 진심을 보여 주는 사내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자신이 생각보다 쓰레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알렉산드르의 전력인 흑마법을 가르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조금 지켜보다가, 샤오룽과 같은 녀석들의 대항마(對抗馬)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백일의 마법사들을 돌려보냈다.

정신 무장을 끝냈으니.

지금부터는 미리 생각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으나, 박민우는 새로운 변화로 인한 상징성을 바랐다.

그렇게 도착한 건물.

바로 인천 정부였다.

그곳에는 도시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도 있는데, 박민우가 느닷없이 그곳을 찾았다.

웅성웅성.

“백의의 마법사다.”

“백의의 마법사님이 여긴 무슨 일이시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백의의 마법사가 누구인가.

대한제국의 영웅.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마법사.

이번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기에, 사람들은 박민우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창구 너머 직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개명(改名)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명이라니.

이건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