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서열 정리 (1)
로만 드미트리의 예상대로였다.
전 세계가 모스크바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상황을 확인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마르코프에게 제안하는 장면도 고스란히 담겼다.
“지금부터 네게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앞으로 다시 1시간을 주겠다. 러시아의 전력,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연합 세력의 병력을 모두 불러들여라. 그리고 1시간 뒤. 나는 이곳에서 러시아의 전력을 상대할 생각이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열띤 회의가 진행되었다.
마르코프가 연락하기도 전에 어떻게 할지를 결정했고, 파트리스는 세바스찬의 의견을 참고해서 한발 물러나는 선택을 내렸다.
심적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격렬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마르코프의 반응에, 파트리스는 통신을 끊고도 한참이나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적당하게 타협했다면, 상식의 선에서 행동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과한 것이 문제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듯, 로만 드미트리의 충격적인 행보에 전 세계는 그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성격이라도 고분고분했다면 어떻게 잘 회유해 보려고 했겠지만, 중앙 정부와 러시아 등 적으로 규정한 존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사실 지금이 기회였다.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쓰러트리는 순간 기회가 돌아오지 않겠지만, 연달아 들려오는 러시아의 패전 소식에 세바스찬은 참담한 얼굴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바로 백의의 마법사와 왕위룡. 둘의 변수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한 명만을 감당해야 한다면 마론교는 기꺼이 사활을 걸어 보았겠지만, 러시아는 로만 드미트리를 배제하고도 상당히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위룡이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의의 마법사가 이 정도로 강력한 줄은, 그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쑥 튀어나온 변수들.
패색이 짙어졌다.
불길한 생각에 한발 물러났고, 프랑스는 일단 러시아와 대한제국의 전쟁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도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최상의 시나리오로 흘러간다면 러시아의 승리를 축하하면 그만이고, 대한제국이 조금이라도 고전한다면 그때는 태도를 바꾸어 전쟁에 가담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러시아가 무력하게 패배한다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에 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화면 너머.
모스크바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마침내 로만 드미트리와 러시아의 전력이 격돌했다.
그리고.
[크악!]
[아악, 아아아악!]
[크아아아악!]
화면 너머.
비명이 끊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핏물을 뒤집어썼고, 피에 굶주린 악마가 되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일 대 다수의 대결? 숫자는 무의미했다.
사람들은 그래도 로만 드미트리가 특별한 전략을 준비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단순히 검 한 자루로 모두를 도륙해 버렸다.
길이 열렸다.
러시아의 병사들이 항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코프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순간.
“……후우.”
툭.
파트리스가 참담한 얼굴로 화면을 종료해 버렸다.
* * *
러시아와의 전쟁.
메시지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놓고 본인을 드러냈다.
대한제국은 강력하며, 대한제국을 건드린다면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되는지를 증명했다.
침묵으로 물든 회의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파트리스의 모습에, 수뇌부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통령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로만 드미트리와 마론교.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마론교는 이미 로만 드미트리의 척결이라는 목표를 설정했고, 마론교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결정을 무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와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강대국이 무력하게 무너진 지금, 로만 드미트리와의 전면전은 승산이 낮았다.
파트리스가 말했다.
“러시아의 요청을 거절한 그 순간부터, 이미 교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너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일은 단순히 무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불리한 현실을 인정했다.
상대를 정공법으로 쓰러트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걸맞은 전략이 필요했다.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두 가지의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첫 번째로는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마론교의 교도들을 소집, 그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 간다면 답이 없겠지. 이는 인내의 싸움이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전략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그래야 두 번째 전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테니까.”
두 번째 전략.
최후의 보루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십수만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정말 이런 전략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전략은 드미트리를 현세에 강림시켜, 그들의 힘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마론 드미트리’ 님을 따르는 사람들. 마론교가 생각하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 줄 것이다.”
앞으로 마론교는 분주해질 것이다.
차원 이동.
그 원대한 계획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간절한 노력이 필요했다.
* * *
그 시각.
미국은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
그들은 일단 로만 드미트리를 지지했으나, 그렇다고 중국처럼 신하의 나라를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겨우 단 한 번의 전투로.
러시아를 무너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대한제국은 그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미국 전체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심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파트리스와 수뇌부들이 동요했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그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수뇌부가 말했다.
“미국은 항상 세계 정부를 주도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대한제국의 편을 들었다고는 하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들에게 주도하는 자리를 내어 준다면 사람들은 더는 미국을 세계 제일이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님. 저희로서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무너트린 지금, 단 한 번의 선택이 앞으로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입니다.”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대한제국이 적당히 고전했다면, 미국은 대한제국의 승리를 축하하며 진심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결과였다.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압도당한 상황에, 대한제국의 전과를 온전히 인정해 준다면 앞으로 세계 제일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른 나라면 몰라도 미국으로서는 허락할 수 없는 미래였다.
국민들 스스로도 세계 제일의 강대국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한데, 그 자리를 내어 준다면 존 해리슨과 그 수뇌부들의 지지도는 순식간에 바닥을 칠 것이다.
정적이 맴돌았다.
존 해리슨은 묘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더니, 이내 수뇌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 나라를 세계 제일로 만들고 싶었다. 정확히는 권력의 체계를 물려받았던 시점에도 세계 제일이었기에, 적어도 내가 통치하는 동안 위상을 드높이면 드높였지, 제일의 자리를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대재앙을 경험하며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더는 기존의 체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미국이든, 러시아든, 중국이든. 기존에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혼란한 시기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트렸고, 혼자서 러시아를 멸망시켰으며, 우리는 정보부 전체를 투입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진실이다.”
참담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존 해리슨은 국익을 위한 판단을 먼저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미지의 위험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대재앙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격한 행보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신념’을 보았다. 그는 적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나, 본인의 사람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였다. 단 한 번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으로 그 과정을 납득하게 했다.”
결단을 내렸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존 해리슨은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만약 본인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낸다면. 우리는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의 계획을 전면수정한다. 대한제국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만들어 갈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판도가 정리되었다.
중국에 이어 미국.
그들이 확고하게 위치를 결정했다.
세상을 발칵 뒤집을 결단이나, 이 자리에 있는 미국의 수뇌부들은 존 해리슨의 선택을 지지했다.
일련의 상황.
근거는 충분했다.
절대자라는 공공의 적을 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희망을 선사하는 존재였다.
존 해리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며칠 뒤. 대한제국의 국호 변경, 전쟁에서의 승리 등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든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부터 우리는 대한제국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미국이 노선을 확실히 정리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며, 동시에 중국을 압도하는 선물을 준비해야만 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선물을 찾아보겠습니다.”
할 거면 확실하게.
존 해리슨과 수뇌부들이 강한 열망을 표출했다.
* * *
대재앙에 이어.
전쟁도 끝이 났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정리되는 상황에, 그에 맞춰서 세계 정부도 결론을 내놓았다.
“대한제국의 국제법 위반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음을 인정하며, 국호 변경 또한 인정한다.”
대세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의 대한제국을 인정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축제가 진행되었다.
대재앙이 끝났음을 축복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새로운 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도 예정되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겉치레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두 번의 삶에서 두 번의 군림을 이루어 냈고, 대체 무슨 의미냐고 말할 만한 겉치레가 제국의 위상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각국에서 모여들었다.
중국과 미국은 당연했고, 일단 속내를 숨기기로 한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모두에게 그 자리를 인정받았다.
인파가 몰려든 상황에, 각국의 사절들이 선물을 공개했다.
“이탈리아에서 아티팩트를…….”
“스페인에서 보검을…….”
“이집트에서 금으로 만든 왕관을…….”
다들 속내가 같았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선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미국의 차례가 되었다.
존 해리슨은 직접 나와 말했다.
“미국은 이번 대재앙에서 대한제국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말로는 그 감사함을 모두 표현할 수 없기에, 이 자리를 빌려 진심 어린 마음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알래스카(Alaska) 마나석 광산에서 매년 채굴되는 마나석의 10%를 독점으로 공급하겠습니다. 앞으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위해, 그것이 가장 적절한 선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헉.”
“10%나 독점으로 공급한다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국.
자원이 넘쳐나는 나라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새로운 시대에도 그들은 충분한 자원을 확보했다.
그중 알래스카의 마나석 광산은 세계 최대의 규모다.
마나석은 어디에서든 사용되는 매우 필요한 자원인데, 매년 10%를 독점으로 거래할 수 있다면 대한제국은 발전의 초석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격적이었다.
대놓고 대한제국을 밀어주겠다는 발언에, 로만 드미트리 또한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미국의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미국과 대한제국.
주종의 관계는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의도를 알았고, 정확히 거론해 줌으로써 존 해리슨의 선택이 의미가 있음을 부각했다.
필요한 발언이었다.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단순히 찍어 누른다고 해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절하게 공을 부각하고 인정해 주는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의 삶을 통해 경험했다.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태도. 존 해리슨은 그 모습에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이번에는 중국의 차례였다.
존 해리슨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내려오자, 왕위룡이 비장한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 앞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박민우도 있었다.
박민우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왕위룡이 씰룩 웃음을 보였다.
둘의 경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둘 다 대단한 활약을 보였으나, 왕위룡과 박민우 사이에는 절대 좁혀지지 않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박민우는 겨우 한 단체의 수장이라면.
왕위룡은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실.
왕위룡이 말했다.
“10년 전. 처음 중국을 정벌하고, 저는 역사의 뒤편에 사라졌던 ‘무림’을 재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각국의 수장들은 대부분 진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시스템을 통해 터득하는 무공은 사실 현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림 재건을 위해 창설한 단체의 이름은 ‘천마신교’이며, 지난 10년간 상당한 데이터를 쌓았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전부이며, 단언컨대 천마신교에 기록되어 있는 자료들은 그 어떤 보물과도 비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 중국은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자처했습니다. 단순한 동맹 관계가 아닌, 주종의 관계로서 앞으로 황제 폐하를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니 부디 제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중국 내부.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반발했다.
상당히 파격적인 선택이나, 왕위룡은 상대가 ‘천마 백중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았다.
“천마신교를 바치겠습니다. 중국의 미래를, 대한제국에 바치겠습니다.”
파격적인 발언.
사람들이 경악했다.
승리를 자신했던 존 해리슨조차도, 왕위룡의 발언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이런 개새끼가.’
박민우만큼은 순수한 감탄이 아닌, 질투심에 당장에라도 터질 것같이 달아오른 얼굴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