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화 약육강식(弱肉强食) (6)
조금 전.
이르쿠츠크의 지휘관, 바실리예프는 수하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
“……죄송합니다. 현재 병사들을 공격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SS등급 헌터 백의의 마법사로 추정되며, 마법진의 체계를 역행(逆行)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대응해야만 합니다. 이대로 마법진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대한민국의 병력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박민우의 공격.
정말 기습적이었다.
바실리예프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그 어떤 수뇌부도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백의의 마법사가 대한민국의 병력을 불러들인다면, 현재 이르쿠츠크에 남아 있는 병력만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다.
대규모 텔레포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상황. 수하의 말처럼,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백의의 마법사를 제압해야만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러시아는 마르코프의 명령대로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했다.
전력 대부분이 모스크바에 집중된 상황이었고, 기습적인 공격이니만큼 각 도시의 방어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르쿠츠크는 적의 공격을 아예 대비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중국과 연합을 맺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북진할 경우 몽골 땅을 밟지 않고서는 곧바로 이르쿠츠크를 공격할 수 없다. 상
황상 예비 병력이 편성되었던 도시이니만큼, 이르쿠츠크를 담당하고 있는 바실리예프로서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아직 백의의 마법사 한 명이라면, 상황은 충분히 수습할 여지가 있었다.
“지금 당장 병력을 모두 불러들여라. 감히 러시아에 발을 들인 쥐새끼를 처단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러시아는 강대국이다.
아무리 전쟁으로 병력이 대부분 차출되었지만, 국경에 인접한 이르쿠츠크와 같은 도시에는 기본적으로 상당수의 병력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수천.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의의 마법사가 LA 사태 때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고 들었지만, 혼자서 이 많은 머릿수를 상대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자신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바실리예프는 S등급 승격을 앞둔 실력자였고, 모스크바에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잠시 이곳으로 좌천되었다. 어쩌면 신의 뜻일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자신이 이르쿠츠크를 담당하고 있는 이때, 대한민국이 수많은 도시 중 ‘이르쿠츠크’를 택하는 우연이 발생했다.
피가 끓었다.
당황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은 단 하나.
어려울 건 없었다.
병력을 소집했다.
곧바로 비상벨을 울리며 공격을 명령했다.
거기까지가 상황의 전개였다.
예상대로 박민우는 아직 대규모 텔레포트를 사용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홀로 대담하게 대군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백의의 마법사는 LA 사태를 통해 SS등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때 보여 준 활약은 그만큼 대단했지만, 마법사는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약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인해 전술(人海戰術)은 적절한 대응 방법이었다.
그런데.
박민우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정말 미안한데 말이야. 나는 이곳에서 많은 힘을 소모할 수 없거든? 그랬다간 다른 도시들을 처리할 힘이 부족할 테니까, 지금부터 너희들에게만 특별히 내가 숨겨 둔 비밀 하나를 보여 줄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바실리예프가 소리쳤다.
“전군 공격하라! 백의의 마법사를 처단하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탈환하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박민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박민우가 검푸른 마력을 폭발시키더니, 파도처럼 일어나는 어둠 속으로 몸을 빠트렸다.
그러자.
“다크 필드(dark field).”
풍덩!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세상이 캄캄하게 변했다.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배경만 어두워졌을 뿐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고는.
치직.
치치치칙.
통신 장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실리예프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챘다.
외부와의 단절.
다크 필드를 극단적으로 사용해, 오로지 외부와 현재 서 있는 공간을 완전히 차단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 들었다.
다크 필드는 보통 ‘시각적인 혼란’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민우가 사용한 다크 필드는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제약도 강요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을 들키지 않길 바라는 사람처럼.
외부와의 단절만을 극대화시켰다.
그때였다.
“나의 아이들이여. 인간의 살점을 물어뜯고 피의 축제를 즐겨라! 다크 게이트(dark gate).”
콰콰콰콱!
마력이 넘실거렸다.
어둠의 마력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더니, 공간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그 너머에서 어둠의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은 제각기였다. 현실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몬스터들이, 검게 물든 눈으로 강렬한 살의를 표출했다.
소름이 돋는 외형이었다. 특히 얼굴 전체에 돋아난 검붉은 핏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존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캬악!
캬카카카칵!
몬스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병사들은 황급히 방어를 준비했으나, 몬스터들과 뒤얽히는 순간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머릿수?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바실리예프가 동원한 수천의 병력보다, 그를 압도하는 수많은 괴물이 인간들의 육체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병사들도 발악하며 괴물들의 머리를 날렸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어떻게든 살길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괴물들의 공격에 결국에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황.
바실리예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믿기지 않았다.
마법의 위력보다, 백의의 마법사가 이런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백의의 마법사는 정의의 대명사일 텐데 어찌 이런 마법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박민우.
아니, 알렉산드르.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업보의 펜던트를 위해 최대한 정의의 대명사처럼 행동하고 다녔지만, 알렉산드르로서 힘들게 쌓아 올렸던 공든 탑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흑마법을 익혔다. 그것은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할 박민우만의 무기였고, 다크 필드는 공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흑마법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업보 해소에 실패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고, 알렉산드르로서 다시 한번 야망을 이루어 버리겠다고.
어차피 망한 삶이라면.
그때부터는 이판사판이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면서, 박민우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절대자를 처리하는 엄청난 업적이면 업보의 펜던트도 단번에 하얗게 물들겠지. 그러니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모시면서 어느 정도는 손에 피를 묻혀도 괜찮을 거야. 이딴 주제도 모르는 새끼들을 몇 죽이는 것보다, 황제 폐하를 보필해 세상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기적의 사고 회로였다.
그래서 마법을 개방했다.
왕위룡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인자 자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강력한 전과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 바실리예프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전력을 드러냈다.
“백의의 마법사! 우리를 만만히 보지 마라! 광폭(狂暴)!”
콰앙!
콰콰콰콰쾅!
눈이 붉게 물들었다.
바실리예프가 광기에 물들더니, 사방을 둘러싸는 괴물들을 빠르게 도륙해 버렸다.
강력했다.
순식간에 그를 중심으로 길이 열렸지만, 바실리예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번뜩.
카앙-!
“크윽.”
갑작스러운 공격.
황급히 검을 들어서 막았다.
상대를 확인한 바실리예프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자하르?”
수년 전.
러시아의 S등급 헌터가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있었다.
상대가 바로 그 자하르였다.
러시아에서 자하르를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자하르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바실리예프는 자하르와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맞닥트린 자하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흰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검붉은 핏줄이 얼굴 전체에 돋아나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알았다.
백의의 마법사는 절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위험하다. 이 사실을 반드시 대통령님에게 알려야 해!’
뒷걸음질을 쳤다.
S등급 헌터를 망자로 부리는 존재라면, 이 많은 몬스터들을 숨겨 둘 공간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대한민국의 저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지금은 이르쿠츠크를 지키는 것보다, 진실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하르가 달려들어 그를 몰아붙임과 동시에, 하늘 위에서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박민우가 사납게 웃었다.
“이만 죽자.”
번뜩.
수백 발의 번개 다발.
그것이 바실리예프의 몸을 관통했다.
“다크 라이트닝(dark lightning).”
콰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쾅!
* * *
그 무렵.
왕위룡은 병력을 이끌고 스코보로디노로 향했다.
그곳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함락시킬 생각이었는데, 박민우로부터 한 소식을 전달받았다.
“황제 폐…… 아니, 왕위룡 주석님. 방금 백의의 마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르쿠츠크를 함락시키고 다음 도시인 체렘호보를 공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통신병의 보고.
다들 놀란 눈빛을 보였다.
샤오룽이 다그치듯 물었다.
“벌써 이르쿠츠크를 무너트리다니. 그건 불가능하다. 이르쿠츠크에는 수천의 병력뿐만 아니라 한때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쳤던 바실리예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곳인데, 백의의 마법사 혼자서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곳을 함락시켰다고? 정말 확실한 정보인가?”
믿기지 않았다.
하나의 도시다.
한 명의 사람도 아닌, 한 개의 부대도 아닌, 무려 한 개의 도시.
아무리 백의의 마법사가 SS등급에 부합하는 실력자라지만, 거대한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라는 게 있다.
그렇기에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백의의 마법사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르쿠츠크를 겨우 30분 만에 무너트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통신병이 말했다.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정보부에서 확인한 결과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습니다.”
샤오룽이 입을 다물었다.
충격으로 얼룩진 표정이었다.
본인도 S등급 헌터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박민우와 같은 전과를 이루어 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법사의 특별함으로 이루어 낸 것일까. 아니, 오히려 마법사기에 핸디캡이 대단할 것이다.
마법사는 보호받지 않는 상황에서 약해지는 특성이 있는데, 박민우는 상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왕위룡이 웃었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샤오룽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왕위룡이 진짜 분노할 때 나오는 반응임을 알기에, 지금은 그의 심기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됐다.
“샤오룽. 백의의 마법사가 굳이 왜 본인의 전과를 알렸다고 생각하나.”
“설마 의도적이란 말씀입니까?”
“그래. 서로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백의의 마법사가 어떤 전과를 세우든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의 상황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백의의 마법사는 내게 직접 이르쿠츠크를 무너트리고 다른 도시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다. 나를 건방지게 내려보던 그 눈빛처럼, 그는 지금 내게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까득.
이를 악물었다.
왕위룡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샤오룽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
그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는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고. 나는 그분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밑에서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는 것은 오로지 ‘그분’에 한해서다. 백의의 마법사 같은 주제도 모르는 새끼에게 무시당하려고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다.”
분노가 치밀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민우가 이인자라는 단어를 강조할 때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묘한 적의가 느껴질 때도.
거슬리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박민우가 선전포고했다.
본인이 이인자라고, 넌 자신에게 안 된다고.
그 의미를 파악한 순간부터, 지금의 상황은 왕위룡에게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더 중용 받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전력을 다하라. 전장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 나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존재들은, 내가 직접 목을 날려 버릴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르코프.
그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한제국과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왕위룡이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가자. 지금부터 내가 왜 천마신교의 후예인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제1차 이인자 대전.
박민우와 왕위룡이 제대로 불이 붙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