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약육강식(弱肉强食) (3)
파트리스가 당황했다.
방금의 발언.
제대로 선을 넘었다.
국제회의가 치러지는 이곳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전체를 우습게 보는 발언을 내뱉었다.
“어떻게 처벌하냐니. 설마 세계 정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의미입니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세계 정부는 절대적이다.
이 자리에서 모두가 합의한 결론을 따르지 않는다면, 전 세계는 대한제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할 것이다.
그렇기에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세계 정부의 뜻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사람들을 포섭해 여론을 조성하면 조성했지,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앞으로 돌아올 후폭풍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집중되는 적의를 그대로 맞받아쳤다.
“제가 이 세상을 알아 가면서 제일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이 뭔지 아십니까?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을 과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전장에서는 적대국에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명분을 확보했는데도,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고 왜 전쟁을 벌여야만 했는지, 왜 그렇게 잔인하게 적들을 처리했는지, 다른 평화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등 많은 부분을 따지고 해명합니다. 그 해명은 인류애(人類愛)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경제적인 제재와 같은 방법으로 적대국을 말라비틀어지게 했으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피와 죽음이 자극적이기에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할 뿐입니다.”
모순이었다.
경제적인 제재로 인한 몰락, 전쟁으로 인한 몰락.
다르지 않았다.
굶어 죽든 칼에 찔려 죽든, 로만 드미트리의 기준에서 둘 다 인간의 잔인함에 포함되었다.
“대재앙이 발발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강대국들은 ‘보이지 않는 잔인함’으로 전 세계를 좌지우지했습니다. 강대국들의 말 한마디에 약소국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으나, 보이지 않는 잔인함은 그만큼 많은 것을 빼앗을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재앙 이후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피와 죽음이 익숙해지면서 더는 말뿐인 위협이 필요하지 않았고, 정말 필요하다면 전쟁이 벌어지는 세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눈에 보이는 힘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인식의 변화였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걸림돌로 남았다.
20년은 짧지도, 그렇다고 엄청나게 길지도 않은 시간이니만큼, 20년 전의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전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많은 조건을 덧붙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보다는 정말 높은 확률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
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핵폭탄과 같은 무기가 아니라, 헌터라는 전쟁을 끝내는 인적 자원으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큰 차이였다.
서로 단순히 언성을 높인 것만으로도, 20년 후의 현대 사회는 전쟁을 받아들여야 할 세상으로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겠냐고 물으셨죠. 예, 맞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에서 힘을 갖춘 제가 나약한 세계 정부의 말을 들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트리스 대통령님. 말뿐인 협박은 통하지 않습니다. 저와 대한제국을 상대로 내뱉는 말에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을 감행할 각오가 필요합니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전쟁.
예민한 문제였다.
아니, 이 자리에서 내뱉어서는 안 될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세계 정부를 상대로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는 게 상식적이건만, 웃음을 머금으며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든, 제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
콰앙!
“이런 건방진 새끼가 정도를 넘어서는구나!”
마르코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활화산 같은 분노를 표출했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SS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해 버린 네 전과는, 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세계제일을 논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세계 각국의 수장들이다. 너 하나가 강하다고 해서, 우리 전부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마르코프에게는 마론교라는 명분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부추긴 것이 아니지만, 그는 그냥 로만 드미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방지지 않은가.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대한민국은 아직 약소국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다수를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는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콧대를 세우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마르코프의 심기를 제대로 자극했다.
더 크기 전에 제대로 짓밟아야 했다.
마르코프의 눈빛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여러분. 로만 드미트리와 대한민국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보십시오. 세계 정부가 뜻을 모았는데도,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이 건방진 존재는 오히려 우리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런 존재가 강력한 세력을 갖추면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우리가 간신히 만들어 놓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질 것입니다. 힘을 보태 주십시오. 제가, 러시아가 로만 드미트리를 단죄하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상대는 간과했다.
협박을 내뱉는다면 세계 정부가 물러날 줄 알았을 터.
마르코프는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건방진 콧대를 꺾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전쟁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질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지금부터 여기에 있는 모두와 전쟁을…….”
“잠깐.”
왕위룡이었다.
마르코프의 말을 끊더니, 사나운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언제 세계 정부의 편을 들겠다고 했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왕위룡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만약 대한제국을 적대하고자 한다면, 중국도 같이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존 해리슨도 말을 덧붙였다.
“미국으로서도 대한제국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이번 대재앙에서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두 강대국의 지지.
상황이 복잡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대로 선을 넘었는데도, 중국과 미국은 대한제국과의 연결 고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왕위룡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천마를 배신할 수는 없는 일. 미국은 로만 드미트리를 옹호한 그 순간부터, 모호한 태도보다는 확실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당한 상황이었다.
마르코프는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그간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에, 그는 파트리스를 보았다.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파트리스와 나머지 국가들이라도 힘을 보태 준다면, 러시아는 기꺼이 전쟁을 강행할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
파트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더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마르코프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걷어찼다.
팍!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두고 보자고. 오늘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까.”
회의실을 떠나는 마르코프.
로만 드미트리는 그가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 * *
파트리스는 왜 침묵했을까.
복잡한 문제였다.
‘대재앙이 끝난 직후, 세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면 인류의 미래가 위험하다.’
마론교를 따르는 이유.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번 일처럼 사람들을 선동하는 등 그 또한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해서라는 목적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전쟁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각국의 지도자들을 포섭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몰아붙였던 것은 사실 말뿐인 협박일 뿐이었고, 이 정도로만 몰아붙여도 로만 드미트리가 알아서 백기를 내걸고 물러날 줄 알았다.
물론 처음에는 전쟁까지 각오했지만, 막상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망설임이 생겼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의 발언에 숨이 턱 막혔다.
말뿐인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짧은 시간에 파트리스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의미였다.
파트리스는 초식 동물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미리 경고하는데, 러시아의 마르코프 대통령님은 저와 다릅니다. 저렇게 분노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전쟁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습니까? 처벌이라고 해 봤자 대한민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텐데, 굳이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냐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딱 한 발.
한 발만 물러나면 된다.
그럼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힘을 갖춘 제가, 이 싸움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손해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파트리스 대통령님은 모두가 승리할 방법이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한발 물러나는 선례조차도 바라지 않습니다. 설령 이번 일이 전쟁으로 번질지라도 말입니다.”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든 벌이지 않든. 머지않아 결론은 내려지게 될 겁니다.”
걸음을 돌리는 로만 드미트리.
그가 밖으로 나서자, 왕위룡도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이 자리를 떠나 버렸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떠난 자리.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존 해리슨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파트리스와 그에게 동조했던 사람들만이 남은 상황에, 한동안 회의실이 깊은 침묵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브라질 대통령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두를 집결시킨 인물은 파트리스다.
모두가 그를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는 있었다.
문제는 파트리스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통제되지 않았고, 마론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다니, 곧바로 마론교 교주에게 통신을 요청했다.
교주의 지혜가 필요했다.
세바스찬이라면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그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전쟁을 감행하라.]
“정말 전쟁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 로만 드미트리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인 인물이다. 그분이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는 분명히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파트리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로만 드미트리가 중국과 미국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력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강대국 둘을 회유할 정도의 능력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세력을 확장할지 알 수 없다. 물론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대재앙이 끝나자마자 세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면 많은 사람이 죽고 말겠지. 하지만 인류의 생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피치 못할 희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파트리스! 약해지지 마라!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살아남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곧 ‘강림’을 앞둔 우리에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옳은 말이었다.
파트리스의 표정이 독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의 말을 들어 보니, 그분과 로만 드미트리가 공존하는 그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분을 위해 결단을 내리겠습니다.”
툭.
통신을 끊었다.
망설임이 사라졌다.
자리로 돌아와 정리한 생각을 말하려는데,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회의실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브라질 대통령.
그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에 러시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대한민국을 공격했습니다. 아무래도 마르코프 대통령은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대한민국을 공격할 준비를 모두 끝낸 것 같습니다.”
“……?!”
눈을 부릅떴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충돌!
이미 상황은 파트리스의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