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41화 (541/615)

541화 약육강식(弱肉强食) (2)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왕위룡이 누구인가.

10년 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존재이며, 엄청난 무력으로 세계제일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왕위룡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대륙 정벌을 입에 달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왕위룡의 성향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마찰이 제법 일어났지만, 왕위룡은 상대가 미국이든 러시아든 가리지 않고 절대 물러나지 않는 호전적인 성향을 보였다.

실제로 수년 전, 사소한 자존심 문제로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왕위룡이.

중국을 대국(大國)이라고 표현하던 왕위룡이.

로만 드미트리가 회의실로 들어서는 모습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각국의 수장들은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위룡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달음에 달려가서 로만 드미트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그래.”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담담했다.

왕위룡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파트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자존심이 그렇게 강한 왕위룡이 마치 하수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중국의 태도는 대한민국을 합병하려는 의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믿기 힘들지만, 왕위룡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도 안 되는 가설만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콧대가 높은 왕위룡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진즉에 다른 강대국들을 상대로 짓밟혔을 것이다.

확실한 건.

왕위룡의 태도는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앉고 나자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파트리스는 이번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정적이 내려앉은 회의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왕위룡의 모습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다들 주변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정적을 뚫고 나왔다.

“제 처벌을 논의하기 위해 이번 자리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랑스, 러시아, 미국, 브라질 등등.

각국의 수장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로만 드미트리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모두를 훑어보더니,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툭 내뱉었다.

“어디 말씀해 보시죠. 제가 왜 처벌받아 마땅한지를.”

* * *

오만했다.

건방졌다.

죄인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역시.’

파트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교주의 말대로였다.

세바스찬은 로만 드미트리가 ‘그분’의 심기를 건드릴 존재라고 말했는데, 확실히 로만 드미트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사실 조금 전 왕위룡의 모습에 잠시 갈피를 잃을 뻔했다.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자신이 왜 그렇게 제2차 국제회의를 주도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먼 미래.

세상에 강림할 그분을 위한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분란 요소를 미리 정리해야만, 인류는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파트리스가 말했다.

“정말 황당하군요. 잘못이 명백한데도 ‘그 이유’를 물어보다니. 로만 드미트리 님. 저희는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재앙의 혼란 속에서 행했던 모든 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정부는 세상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대재앙 도중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동이며, 그것은 절대 예외로 허락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3년 전. 그리스는 몬스터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전후 과정이 명백하고 그리스는 토벌을 끝내는 즉시 돌아갔지만, 국제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적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스 대통령님. 그때의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제법은 모두가 동의한 규율이기에, 저희는 처벌받아 마땅했습니다.”

“맞습니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제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는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 님의 대한민국만 예외로 둔다면, 그동안 처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다른 나라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부당한 일입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할 문제가 아닙니다.”

파트리스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공감을 얻어 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 세계가 국제법을 철저하게 따라 왔기에, 파트리스의 발언은 강력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합니다.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모두 고려한다면 국제법은 항상 다른 잣대를 들이밀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단 한 번의 선례가 부당함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스가, 이탈리아가, 또 다른 나라들이. 모두가 국제법이라는 이름 아래에 처벌을 받아들였는데, 대한민국만 예외로 구별한다면 이후에 벌어질 모든 문제는 논란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스 대통령님에게 묻겠습니다. 만약 앞으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때도 과거처럼 그리스의 잘못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반발심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대한민국은 처벌을 피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단 한 번의 선례. 로만 드미트리 님이 만들어 낸 그 선례가, 국제법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릴 것입니다. 모두가 반발할 겁니다. 국제법을 위반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처벌이 발목을 붙잡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일처럼 한 번은 넘어가 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제 의견에 동의하는데도, 정녕 이번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나라의 지도자.

파트리스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강한 발언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지켜보는 이들은 파트리스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확신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런데.

“예,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위룡은 상식적으로 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 *

왕위룡이 말했다.

“그리스의 일은 이번 일과 별개입니다. 그리스는 충분히 보고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당시 지휘관을 맡았던 사령관이 독단적으로 토벌을 진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일은 다릅니다. 김정태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는 쓰레기였습니다. 그는 자국민을 핍박하고, 대통령으로서 보살펴야 할 사람들의 고혈을 빨았습니다. 세상이 대재앙으로 혼란스러워할 때.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그렇게 버림받았습니다. 김정태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기에, 당시 대한제국은 인천 정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어떻게든 살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각색을 섞었다.

그리스 지휘관의 선택은 옳았다.

보고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간 몬스터를 놓쳤겠지만, 그건 보기에 따라 판단의 문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정태.

그를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었다.

“김정태 대통령이 저에게 뭐라고 요청한 줄 아십니까? 지방은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서울의 위험만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수백, 수천 만의 생명이 죽더라도, 서울에 머무는 몇몇 사람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존재가 바로 김정태였습니다. 막말로 파트리스 대통령님의 정부도 반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전 정부에 대한 불만에 파트리스 대통령님이 반란 세력을 일으켰고, 그 결과로 지금의 프랑스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때는 대재앙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게 뭐가 다릅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프랑스나 대한제국이나. 선택의 시기가 찾아왔을 뿐입니다.”

대놓고 억지였다.

김정태의 일은 사실을 기반으로 했으나, 중국이 대가를 받고 도와주기로 했다는 사실은 쏙 빼 버렸다. 어차피 망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모든 업보는 김정태가 안고 죽음의 강을 건너면 그만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반란.

이번 일과 엄연히 달랐다.

이번 문제는 대재앙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기에 논란이 되는 것인데, 왕위룡은 논리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일단 물고 늘어졌다.

강대국의 일 처리 방식이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의 논리에는 힘이 있다. 비록 논리가 조금 달릴지라도, 사람들은 왕위룡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각국의 수장들이 동요했다.

왕위룡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모습에, 처벌을 강행했다간 문제가 심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리스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왕위룡 주석님!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중국과 김정태 정부! 이 자리에서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정태 정부는 공공연하게 중국과 거래를 해 왔고, 그 대가로 중국은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증거 자료가 명백하고, 실제로 중국의 샤오룽이 반란 세력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태도를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세계 정부를 농락하지 마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 저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설마 대한민국에 약점이라도 잡힌 겁니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벌떡.

왕위룡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왕위룡이 대놓고 말했다.

“사실 관계는 명확히 합시다. 중국은 약점을 잡힌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중국이 대한제국을 모시는 신하의 나라라고는 하나 이번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세계 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제국을 처벌하려는 이 상황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왕위룡의 발언.

사람들의 표정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신하의 나라라니.

그건 직접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 * *

중국.

세계적인 강대국이다.

왕위룡이 이끄는 강대국이, 전쟁이나 특별한 징조도 없이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황제 폐하라 말할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

미국의 대통령, 존 해리슨은 예상하고 있었다.

미국의 정보부는 대한제국과 중국 사이에 이상한 징조를 파악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왕위룡의 통신 직후, 왕위룡이 대한제국을 방문했다는 보고가 있었지. 둘 사이에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왕위룡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보여 주었던 태도는 심상치 않았다. 이는 분명히 둘 국가 간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하지.’

지금까지 미국은 상황을 관망했다.

진실을 확인하고 개입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더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중국과 대한제국.

둘이 힘을 합쳤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약점은 아직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인데, 세계적인 강대국이 힘을 보탠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중국의 인력에 SS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해 버린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 적대하기에 까다로운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의 의도가 명백했다.

그들이 굳이 신하의 나라임을 밝히는 이유는, 대한제국과 끝까지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존 해리슨이 말했다.

“저는 왕위룡 주석의 말에 동의합니다. 대한제국의 일은 피치 못할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법에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르코프였다.

존 해리슨의 개입에, 마르코프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

양분되어 있는 국가들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떻게든 서로가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려는 상황에, 시간이 갈수록 회의실의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그때였다.

“파트리스 대통령님. 질문을 다르게 해서 묻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순간,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 버렸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번 일이 이토록 과열되어 버린 이유는, 대한제국에 ‘로만 드미트리’라는 지도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저는 애초에 국제법 자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전 세계 국가가 합의하여 만든 법도라고는 하나, 국제법은 강대국의 입김이 상당히 개입된 불합리한 체계입니다. 만약 모두가 따라야 하는 국제법을 원한다면 지금의 것을 토대로 상당한 개편이 필요하겠지요. 물론 당장 그 문제를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처벌의 이유를 차치하고, 제가 처벌받아 마땅하다면 어떻게 처벌할 생각입니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는지.

끼익.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마주했다.

“저를, 그리고 대한제국을. 세계 정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우리를 대체 어떻게 처벌하겠느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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