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526화 (526/615)

526화 태풍의 눈 (2)

박민우가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로만 드미트리와 작전을 동행할 생각에, 그는 아까부터 씰룩거리는 입술을 참을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날 신뢰하는 게 분명해.’

생각해 보라.

자신만 콕 찍어서 미국행을 대동하겠다고 말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겠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신의 필요성을 로만 드미트리가 인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의 심복! 천마가 중용하는 존재! 행복회로가 돌아가면서 마음속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지난번 영등포 기습 작전에 동행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그때의 아쉬움이 단번에 녹아내릴 정도로 이번 작전의 스케일은 대단했다.

총총 걸어갔다.

얼른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위험합니다, 길드장님!”

“저희도 데려가십시오. 길드장님만 위험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장윤태를 비롯한 길드원들.

그들이 진심 어린 표정을 보였다.

특히 장윤태가, 길드원들을 선동하듯 열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위험할 정도라면 이번 작전의 위험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와 길드장님, 단둘만 가겠다니요. 이건 너무나 위험합니다. 황제 폐하와 길드장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지만, 저희로서는 두 분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대동해 주십시오. 저희가 목숨을 걸고 곁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절절한 충성심이었다.

박민우에게 밉보였던(?) 장윤태는, 미국행을 따라나서는 박민우의 의도를 다르게 생각했다.

황제의 명령이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생각에, 장윤태가 길드원들을 선동해 박민우를 막았다.

충성심이 솟구쳤다.

이 순간.

장윤태는 자신이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드장님이 항상 저희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백일은 하나라고. 매번 길드장님만 모든 위험을 떠안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같이하겠습니다. 죽든 살든. 백일 전체가 길드장님과 같이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힘을 보태 드리겠습니다!”

참.

가관이었다.

박민우는 마음 같아서는 장윤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이 씨발 새끼가 진짜.’

이번 미국행.

로만 드미트리와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천마의 곁을 지키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박민우는 정말 뭐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장윤태가 그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미국행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진실을 아는 박민우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종의 유희였다.

둘만의 시간을 망치는 장윤태의 모습에, 박민우는 치솟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말했다.

“아니. 너희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다.”

“아닙니다! 저희를 데려가 주십시오!”

장윤태는 신이 났다.

비장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자신의 의도가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충성심 어린 모습을 보였다.

X 같았다.

다른 말로는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민우의 입은, 백의의 마법사에 걸맞은 표현들을 내뱉었다.

“너희는 정말 내 뜻을 모른단 말이냐!”

“……예?”

“너희의 말처럼 이번 미국행은 위험하다. 강대국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만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미지의 위험에 너희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너희는 나와 황제 폐하와는 다르게 미지의 위험에서 목숨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러니 한발 물러나라. 정 나와 같이 정의를 행하고 싶다면, 오늘을 기억하고 치열하게 강해져라. 내가 인정할 만큼 강해진다면, 그때는 너희의 절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겠다.”

백일의 마법사들이 울컥했다.

박민우의 말이 애틋하게 들려왔다.

“머나먼 타국에도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을 돕고, 무사히 너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다려라. 날 정말 위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도록 대한제국의 안위를 부탁한다.”

“길드장님!”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어떻게 이리도 정의밖에 모른단 말입니까.”

마법사들이 난리가 났다.

장윤태도 그들과 같이 소리쳤다.

‘장윤태, 이 새끼. 미국에서 돌아오는 대로 너부터 죽여 주마.’

박민우가 애써 웃었다.

마법사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혹시라도 다시 질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민우는 멀어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미국 LA.

비상대책 본부.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계속되는 전투로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그들 중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성난 반응을 보였다.

타앙!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대한민국이라니요. 듣기로는 대한민국은 국호를 변경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미국이 어째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저는 이번만큼은 상부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도움을 받는 것도, 대한민국이 LA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안일한 판단 자체도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카터였다.

미국의 장교로서, 이번 LA 사태에서 상당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만큼 카터의 발언에는 힘이 있었고, 지휘관 벤자민은 그를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 정부에서는 단순히 대한민국의 지원군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병력을 편성해서 지원군을 보낼 것이고, 미한 연합군을 동원해 LA의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지금 LA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뱀파이어 로드는 이 순간에도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데, 겨우 대한민국에 지원을 요청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정부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권력자들의 안전을 챙기느라고 LA를 외면…….”

“카터 대위!”

벤자민이 소리를 질렀다.

방금 발언.

선을 넘었다.

벤자민이 카터를 바라보며 사납게 말했다.

“섣불리 매도하지 마라. 정부는 지금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수도와 LA라는 선택지에서 수도에 더 힘을 실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황의 전개뿐만 아니라 수도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로드는 숙주를 생성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미지의 존재는 죽인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고 있다. 그런 괴물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정부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했을 뿐이다.”

딜레마였다.

뱀파이어 로드가 더 강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것을 보스 몬스터라고 판단했지만, 미지의 존재는 뱀파이어 로드보다 약한 대신에 충분한 시간을 허락한다면 무한대로 위험해질 존재다.

미국 정부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LA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미국 정부는 타국의 도움을 끌어내고 지원 병력을 편성했다.

최선이었다.

벤자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터 대위. 자네가 분노하는 이유는 잘 알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아군을 불신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국 정부를 믿어라. 지원군은 곧 도착할 것이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 *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카터 대위.

그는 아직도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미국 정부의 안일함을 지적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

그들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셨지. 대한민국의 의도는 매우 불순하다고. 스스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한 그들의 행태는, 앞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겠지. 그런 진실을 모르고 옹호하는 꼴이라니. 벤자민 장군은 사람 자체는 좋지만, 인류를 위해 무엇이 옳은지도 모를 만큼 멍청해.’

그는 바로 마론교 소속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 어디에도 마론교가 있으며, 특히 미국에는 5명 중 1명 이상은 반드시 마론교일 것이라고.

카터는 미국 정부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서는 말한다.

그분이 세상에 강림하는 날, 그분이 보여 주었던 위대한 업적처럼 이 세상에 들이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문제는 그 이전에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대한민국처럼 개개인의 이득에 눈이 먼 존재들은 미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분은 절대 자신의 권위를 넘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에, 인류가 그분에게 밉보였다간 나중에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반발했다.

혹시라도 대한민국이 LA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입지가 공고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카터가 어딘가로 연락했다.

상황을 보고하자, 통화기 너머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론의 신자(信者)여. 그분이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인간들은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화가 무고한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이 LA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만약 정말 그런 힘을 갖추고 있다면, 그들의 공이 부각되지 않도록 상황을 만들어라.]

간단한 문제였다.

도움은 받되 공을 갈취하라.

마론교는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에 영광이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카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인류의 미래에 축복이 깃들기를.”

* * *

그날.

로만 드미트리가 LA에 도착했다.

박민우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고, 비상대책 본부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LA 대응팀의 지휘관 벤자민입니다. 그런데…….”

슬쩍 뒤를 살폈다.

박민우 외에 다른 병력이 없었다.

LA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대군으로도 부족할 텐데, 단 두 명만 나타난 상황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설마 둘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지원군은 없다. 우리만으로도, LA의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의문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는 S등급을 초월한 존재.

그가 지원을 나온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물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이 진심으로 도와줄 의도가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당혹스러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벤자민은 미국의 장군이다.

약소국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벤자민을 마주하고도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벤자민으로서는 의외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태도는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쩌면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모습이, 그의 미스터리한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옮겼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LA의 수뇌부들이 자리한 상황에, 벤자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LA의 방어 체계는 완전히 붕괴한 상황입니다. 뱀파이어 로드라고 명명한 보스 몬스터가 LA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군사시설의 80%가 파괴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4시간. 그 안에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LA의 회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제 작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카터 대위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에 계획한 작전이 있었으나, 지원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카터 대위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1시간 뒤. 미국 정부의 지원군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중에는 S등급 헌터가 무려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기에, 저희는 그때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LA 탈환 작전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일단 이렇게 지원을 나와 준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결단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계획은 간단합니다. 대한민국의 지원군과 저희 LA 대응팀이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길을 연다면, 미국 정부의 지원군이 뱀파이어 로드를 공격할 것입니다. 뱀파이어 로드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나, 수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S등급 헌터 세 명의 공격을 받는다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를 처리한다면, 그때부터 LA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카터의 계획이었다.

애초에 벤자민은 그것보단 로만 드미트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으나, 지원군의 규모를 확인하고서 카터의 말처럼 미국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한민국에는 감사한 일이었다. 미국의 S등급 헌터들이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할 때까지 체력을 비축하는 것만으로도, LA 사태를 해결하는 것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다만.

기대를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와 박민우 둘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벤자민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의도는 명백했다.

말뿐인 도움일 뿐, 희생을 감당하기는 싫은 것일 터.

미국의 위험은 결국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다 보니 카터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토사구팽(兔死狗烹).

마론교의 의도처럼, 적절하게 도움을 받는 선에서 중요한 공로는 미국이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말했다.

“뱀파이어 로드에 의해 미국의 S등급 헌터 둘이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겨우 한 명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하는 건가.”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상대의 힘을 예상하지 못해 당했을 뿐, 곧 도착할 S등급 헌터들은 수차례 합을 맞춘 존재들입니다. S등급 이상의 몬스터라 할지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상대할 수 있다라. 희망 사항인 건가.”

도발적이었다.

카터와 같은 인물들이 발끈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미국이 대한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너희들의 힘으로 ‘뱀파이어 로드’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만한 힘이 있고, 그렇기에 보상을 약속하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한 것이겠지. 그러니 나는 나의 역할을 할 것이다. 너희는 한발 물러나서 시민들의 안위를 챙겨라.”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한발 물러나라니.

방관은 계획이 아니지 않은가.

“이번 작전. 내가 혼자 적진에 들어가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할 것이다.”

“?!”

순간.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상식을 벗어난 발언에, 벤자민이 아닌 카터조차도 놀란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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